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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뒤 역사] 감성으로 시대와 맞장을 뜨다 - 장돌뱅이 소설가 송기원 - 본문

문화 속 시대 읽기

[문학 뒤 역사] 감성으로 시대와 맞장을 뜨다 - 장돌뱅이 소설가 송기원 -

기념사업회 2003. 10. 1. 17:38



“어쩌다보니”라고. 시대의 가파른 벼랑에서 벗어나본 일 없는 소설가 송기원은 늘 이렇게 말한다. 그는 또 자신처럼 ‘어쩌다’ 운동하게 되었고, ‘어쩌다’ 감옥에 가게 된 그런 이들을 좋아한다. 처음엔 그 말이 그저 심각한 좌중의 분위기를 바꿔놓으려는 심사인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거창하게 말해서 “어쩌다보니”라는 말에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요구가 있었다. 아니, 이제 그 시대를 지나왔으므로 과거를 먹고 살지 않겠다는 진중한 제스처가 있었다. 또 그 말에는 ‘누구든 그 상황에 처하게 되면…’이라는 민중성이 녹아 있었다.
세상을 읽는 눈은 꼭 과학적 분석을 통해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때로 그것은 순간의 깨달음이나 본성적 행동양식으로 나타나곤 한다. 시대와의 불화 또한 그랬다. 70년대의 전태일이 그랬고 80년 광주의 시민군들 또한 마음이 부르는 쪽을 선택했다. 학력이 변혁과 개혁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이것 말고도 많다. 무슨 대학을 나오고 유학을 갔다 오고 몇 개씩 고시를 패스했다는 자들이 벌이는 한국정치를 우리는 신뢰한 적이 없다. 문화예술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상업성과 타협하고 뒷거래가 이뤄지지 않는 한 학력과 예술성은 전혀 무관하다.
이성이 필요한 시대가 있었다. 권력이 하룻밤 사이에 십수 명을 단두대에 매달 정도로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할 때 저항은 늘 갈등에 휩싸였다. 이성은 시대에 대항할 충분한 이유를 마련해주었고 자기변화의 동력을 주었다. 그러나 이성은 지식인들의 범위를 벗어나 대중과 함께 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때로는 이성이 지나쳐 편 가르기가 일어났다. 명백한 저항의 목표 앞에서 노선의 갈등을 일으켰던 것도 이성이었고 항로를 벗어나 투항하던 자들에게 면죄부를 준 것도 이성이었다.
그런 와중에 감성적 사유로 세상에 대항한 문학인들이 있었다는 건 한국 민주화운동사에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일초 고은의 일갈이며, 사회과학이 주지 못한 생생한 현장을 되살려낸 태백산맥 등 밑바닥으로 다가간 문학인들의 감성적 접근은 끝내 대중들의 감정선을 건드리고 말았다.

단골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시절부터 올라가 우리나라 문단의 탄압사를 들춰보다보면 한번도 빠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때로는 자신의 일과 전혀 무관한 듯 보이는 사건에도 연루가 되어 구속이 되고 때로는 선배라는 이유로, 주간이라는 이유로, 실상 들여다보면 지극히 계획적인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능청스럽게 ‘어쩌다’ 연행되고 구속되면서 대략 25년의 세월동안 이것저것 합쳐 8년여를 감옥에서 보낸 사람이 바로 소설가 송기원이다.
한때는 촉망받는 문학청년으로 74년에는 시와 소설이 동시에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문단의 기린아로 주목받기도 했던 송기원. 그의 지독한 탐미적 문장 앞에는 불우한 어린시절이 도사리고 있었다. 소설 <사람의 향기>에는 송기원을 둘러싼 가족들의 죽음이 묘사되어 있는데,

모두 한결같이 비명횡사 아니면 병사로 소위 천수와는 거리가 먼 죽음이었다. 생부는 술이 취해 철도를 배게 삼아 자다가 그대로 기차에 깔려 시신조차 제대로 추리지 못할 정도였고, 어머니는 자식의 옥살이가 한스러운 나머지 대문 고리에 목을 매단 채 자진하였고,(중략) 의부는 의부대로 몹시 외로운 말년을 맞아 생전에 단 한번만이라도 자신이 길러준 의붓자식인 나를 만나보기를 소원하면서 간경화로 배에 복수가 가득 찬 채 눈을 감았고, (송기원, <사람의 향기> 중에서, 이하 송기원의 글)

장에서 건어물을 파는 어머니를 따라 장돌뱅이 노릇을 했던 송기원은 어린시절부터 거친 세계를 체험한다. 건달패의 똘마니로 그의 주변에는 술꾼, 노름꾼, 밀매꾼, 술집 작부 등 밑바닥 인생들이 즐비했고 그들은 그대로 이후 송기원 문학의 모태가 된다.
작가의 인생에서 특히 삶의 살아있는 현장을 그대로 포착하고자 하는 리얼리즘 작가에게 민중들의 삶은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며 살붙이가 아닐 수 없다. 작가가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동안 작가는 그들의 삶에 개입할 수밖에 없으며 그들이 요구하는 쪽으로 행동하고 그들의 불행을 앞서 막아서고자 하는 투사가 된다. 더군다나 저 70년대의 막막한 삶들, 그저 빼앗기고 눈을 가리운 사람들의 일상에 가까웠던 이들이라면 어찌 그것을 외면할 수 있었을까.
송기원이 소설가로 감옥의 단골손님이 된 데에는 이런 이유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아들이 간첩의 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절망해서 목을 맨 어머니를 두고도 그가 다시 감옥을 갈 수밖에 없었던 현실 또한 이런 이유가 아닐 수 없다. “제가 감방에 있을 때 세계문학전집을 일곱 번 읽었어요. 하도 지겨운 시간이어서 1권부터 100권까지 읽다 보니까 재미있는 현상이 나왔어요 그 속의 주인공들이 다 정상적인 인간이 하나도 없어요. 사회에서 잘했다고 칭찬 받는 인간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그게 시대는 다르지만 문학의 주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라는 그의 말에는 민중들에 대한 지독한 애정이 베어있다. 물론 동료 문인들에 대한 그의 의리와 애정을 폄하할 수는 없을 터이지만 근원적으로 송기원의 삶에는 작가적 감성이 존재했던 것이다.

문학과 문학적인 삶

1985년 신민당의 총선 선풍과 미문화원 점거 농성 등 민주화운동의 거센 저항이 불길처럼 타오르자 민정당은 학원안정법을 마련하여 통과 시키려했다. 학원소요나 집회시위 등 시국 관련법 위반 학생에게 재판 없는 검사선도처분을 골자로 한 학원안정법은 실로 악법이 아닐 수 없었는데, 이를 통과시키기 위한 여론몰이로 필화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른바 ‘민중교육지사건’이었다.
당시 양정고 교사였던 시인 김진경, 성동고 교사였던 시인 윤재철 등이 주축이 된 무크지 《민중교육》은 문학을 통한 교육개혁을 표방하며 실천문학을 통해 그해 발간되었다. 정부는 이를 두고 ‘민중교육, 당신의 자녀를 노린다’는 제목으로 용공조작 해 몰아 부쳤고 교사들은 줄줄이 구속되었다. 송기원은 이때 실천문학의 주간이라는 이유로 강제 연행되었으며 교사들의 피해를 줄이고자 자신이 기획부터 제목까지 주관했다고 주장했으나 결과는 그 반대로 북한의 선전선동활동에 동조한 것을 시인하라는 것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1989년에도 송기원은 오봉옥 시인의 장편 서사시 《붉은산 검은피》의 필화사건에도 연루된다. 1930년대의 항일투쟁부터 1946년의 10월항쟁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이 시 또한 정부의 수거 판금조치가 내려졌다가 구속 기소의 단계로 접어들었는데, 당시 실천문학사의 사장이었던 소설가 이문구, 시인 오봉옥과 함께 송기원도 동시 연행되었다. 필화사건의 당사자인 오봉옥은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나 송기원은 ‘민중교육지사건’의 누범 기간이 끝나지 않아 6개월의 실형을 받았다.
아마도 80년대는 시대에 대항하는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문학은 책상을 벗어나 거리로 뛰쳐나왔고 지식인의 펜 끝에서 노동자의 선반 위로, 농민들의 풀밭 위로 영역을 확대해 갔다. 작가들이 세상을 향해 거친 숨소리를 토해내는 동안 송기원은 묵묵히 그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본의 아닌 절필로 출판사의 기획 일을 맡고 출판하고 책임지는 생활을 10년을 이어갔던 것이다. 그 또한 문학을 한 방법으로 여기면서 작가 송기원은 현실 속에서 자기의 삶을 문학화 하면서 살았다. 실로 80년대 송기원의 삶은 그 자체가 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한 소설이 아닐 수 없다.

여자에 관한 명상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시작한 송기원의 80년대는 1990년 실천문학사의 퇴사로 막을 내린다. “돈 맛을 보니 작품성보다 상업성이 먼저 보였다. 출판기획자의 자격이 끝난 것이다. 또 사회변혁진영에 대한 회의도 컸다”는 고백과 함께 송기원의 삶은 소설가로 돌아온다. 그렇게 발표된 소설이 <아름다운 얼굴>이었으며 이 작품으로 동인문학상을 받는다. 이후 첫 장편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라가 출판되었고 이 작품은 이후 김영빈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진다.
그러나 작가로 돌아온 그는 결코 세상과 등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만의 방법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었는데, 장편 《여자에 관한 명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 던진 송기원의 메시지는 일견 추악한 고백으로 보여지기도 했지만 그 내면에는 자신을 온전히 들어냄으로서 거짓을 질타하는 시대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자신의 복잡했던 과거의 여자관계를 털어놓은 이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 가족들과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편함이 없었을까, 그러나 이런 솔직함을 통해 딸들에게 “적어도 우리 아빠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고 전한다. 세상에 그가 보여주자 했던 것도 이런 믿음이었을 것이다. 이성을 통해 보여줄 수 없는 살붙이의 마음을 거침없이 자기의 치부를 토해냄으로써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늙은 창녀조차 세상의 한 구성원으로 당당히 선언하면서 말이다.

나이 마흔이 넘응께/이런 징헌 디도 정이 들어라우./열여덟살짜리 처녀가/남자가 뭔지도 모르고 들어와/오메, 이십년이 넘었구만이라우./꼭 돈 뗌시 그란달 것도 없이/손님들이 모다 남 같지 않아서/안즉까장 여그를 못 떠나라우./썩은 몸뚱어리도 좋다고/탐허는 손님들이/인자는 참말로 살붙이 같어라우.(<살붙이> 전문)

안으로의 여행

서라벌예대에 입학하여 김동리의 애제자로 성장했던 송기원은 문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탄탄대로를 버리고 <썩은 문인은 붓대를 꺽어라>라는 문학담론을 발표함으로써 스승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뒤에 서라벌예대가 중앙대에 통합된 이후에도 송기원은 30여명의 학생들과 <대학인의 선언>을 발표하면서 유신에 저항했다. 급기야 오랜 외유 끝에 돌아온 늙은 복학생 송기원은 1980년 전두환의 관을 만들어 서울역을 돌아오는 시위를 주동하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된다.
그러나 모진 시대를 지나온 송기원의 힘은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에 대한 사랑이다. 마치 민중들이 자신의 일상을 버릴 수 없듯이, 때로 그들이 선과 악의 경계지점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듯이 송기원 또한 일도양단의 극과 극이 아니라 민중들의 삶에 애정을 보내면서 그의 말마따나 ‘어쩌다보니’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서 있었다.
사회과학의 철저한 이론을 토대로 변혁에 참가한 이들이 얼마나 많이 변해갔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론의 틀에 얽매이다 결국 그 이론에 발목이 잡혀 극단적인 자리로 옮겨간 이들 또한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반대로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가슴이 흔들리는 지점에서 변혁에 동참한 이들이 얼마나 많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가도 알고 있다. 감성의 무기를 놓지 않았던 문학인들, 예술인들의 모습이 그러할 것이다.
요즘 송기원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을 보고야 말았다. 끝까지 좋은 사람이거나 끝까지 나쁜 사람일 수밖에 없는 헐리우드의 공식이 얼마나 인간을 괴롭히는가를 깨달았다. 그는 다시 감성으로 시대와 맞붙었다. 물론 과거의 방식과는 다르다. 죄짓지 않고 세상을 살 수 없는 시대의 불온함에 큰 내공으로 맞붙은 것이다.
인도에서의 여행 경험을 토대로 펴낸 《안으로의 여행》은 죄의식과 고통에 내몰리던 어느 순간 ‘나를 나 자신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고통도 고통 그 자체로 받아들이면 자유로워진다’는 사실을 그려내고 있다. 시대적 요구에 가장 충실했던 그가 어떻게 더 많은 사람들을 세상의 주인공으로 이끌어낼지 나는 늘 궁금하다.


 글_ 신동호
강원도 화천 출생. 시인. 1984년 강원고 재학시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0년 '오월문학상'를 수상했으며 1992년 <창작과 비평>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활동 시작. 시집 <겨울 경춘선>과 <저물 무렵>, 문화평론 <전유성論-디오게네스와의 희극적만남> 등을 출간. 한양대 국문과에서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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