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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위 역사] “오금 박힌 무릎으로 짚어간 어둠” - 시인 박정만이 부른 井邑別詞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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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위 역사] “오금 박힌 무릎으로 짚어간 어둠” - 시인 박정만이 부른 井邑別詞

기념사업회 2003. 9. 1. 14:09

“오금 박힌 무릎으로 짚어간 어둠”
- 시인 박정만이 부른 井邑別詞

신동호(시인)


  삶과 죽음은 공존해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삶이라는 바지 주머니에 죽음을 넣고 만지작거리며 다닌다. 아니, 죽음이라는 머나먼 길을 걷다가 두리번거리며 삶이라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릴 뿐이다. 다만 이것을 달의 뒤편처럼 끝내 보지 못하는 게 인생이다. 그러나 그림자를 이끌며 살 듯 죽음을 달고 다니는 이들이 없지 않다. 일생을 두고 삶과 죽음의 화두를 쫓는 이들도 있으나 본의 아니게 찰나의 깨달음으로 다가가 고통스러운 생을 마감하는 이들 또한 늘 존재한다. 
위험과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어쩌면 미래를 보는 일은 고통의 연속일는지 모른다. 만일 과거도 미래도 망각하지 못한다면, 인간이 최후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이 아닐까. 파괴를 통해 얻어지는 각성과 자각을 꿈꾸면서 말이다. 시대의 불화와 싸우는 일은 그래서 많은 열사들을 남겨두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기획해간다. 

 

  瘀血을 재우며
  수백억년 인류의 진화과정이 마치 인간의 전 생애를 거쳐 응축되어 나타나듯이 수십 년 민주화운동의 과정 또한 한 개인의 삶에 고스란히 담긴다. 백지의 시절이 있는가 하면 갈등의 시절도 있으며 보이지 않는 폭력의 희생양이 되기도 하고 때로 투사가 되기도 한다. 승리와 좌절은 망각의 시절을 지나 어느새 자신을 본래의 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과거에 꿈꾸었던 미래가 현실이 되었을 때 종종 방황하는 인간들이 있으나 대부분은 일상에 안착한다.
그러나 간혹 예민한 영혼들은 시대를 건너지 않고 시대와 더불어 저물어간다. 저 90년대 중반 생애를 마감한 시인 김남주가 그랬다.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찾아온 미시담론의 현미경 같은 언어, 그 간지러운 속삭임을 그는 견딜 수 없었으리라. 시인 박정만의 영혼 또한 거짓으로 점철되어온 80년대와 함께 온전히 사라지기를 원했으리라.
 
‘죽음이 들끓는 소리./절명하라, 절명하라, 절명하라,/이를 갈다 이를 갈다/가슴도 부글부글 소리를 내고……/분노도 피딱지도 약에 녹아/하나가 되고……/어혈은 풀어져서/내 몸의 피와 살과 뼈에 스미고…….’(박정만, <瘀血을 재우며> 부분, 이하 인용 박정만의 글)

  물레 잣는 밤
  1988년의 한국은 박정만의 목소리에 아무도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대립물의 투쟁 역사’는 여전히 우리 사회를 사분오열로 찢어놓은 채 수많은 싸움을 예고할 뿐이었다. 분노와 용서, 죽음과 삶, 불과 물이 결코 둘이 아닌 세계(不二)를 노래했던 그의 시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데는 세월을 한바퀴 돌고도 모자랐다. 아직껏 서로의 가슴에 비수를 들여댈 일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분노와 피딱지’를 ‘약에 녹’인 그의 노래는 들리지 않는다.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끌며 불렀던 그 절규가 말이다.

  ‘기름은 기름대로 저홀로 돌고/불씨는 불씨대로 저홀로 살아/어둠의 胎로 남는 이 헛된 소용돌이.//(중략)// 불초 내 욕사발이 산이 되고/산 위에 또 하나의 산을 이룰지라도/물에 젖은 나는 다만 불을 꿈꾸고/불 먹은 가슴으로 물에 젖으며/오늘밤에도 밤새도록 빈 물레만 잣는다.’(<물레 잣는 밤> 부분)
 
이 헛된 소용돌이를 잠재우는 방법을 우리는 아직 모르는가, 알고도 침묵하는가. 타도할 일은 여전히 그리도 많고 때려잡아야할 공산당은 여전히 대립물일 뿐인가.

  넋두리
  ‘내게 있어서 1985년은 절망과 고통의 올로 죽음의 피륙을 짜던 한해였다. 바깥출입이라곤 거의 금하다시피하고 날이면 날마다 방구석에 처박혀 미친놈처럼 소주잔만 기울였다. 작년 한 해 동안에 내가 쳐 죽인 술병의 숫자가 1천병을 훨씬 웃돈다면 누가 곧이들을까.(중략) 생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나의 편이 아니었다. 죽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시라든가 사랑이라든가 꿈 따위가 어찌 내 몫일 수 있겠는가.’(시작노트 <허무주의자의 넋두리> 부분)
 


  오월의 遺書
  나는 그 상처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한다. 다만 나는 그가 마셔댄 술이 결코 절망의 시구절만은 아니라 여긴다. 분노를 삭이는 그 밤새 비는 내리고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삶과 죽음 사이를 교차하는 사이 그가 본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 언젠간 인간들이 바라보게 될 하늘이었다.
그러니까, 1981년 5월 29일 소설가 한수산이 중앙일보에 연재하던 <욕망의 거리>가 문제가 되면서 영문도 모르는 채 보안사령부로 연행되어간다. 이어지는 모진 고문과 협박. 미모의 30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도시의 욕망을 질퍽하게 쫓아가던 이 소설은 그 짧은 시간동안 반체제의 소설로 바뀌어갔다. 박회장과 잠자리에 들었던 세희는 박회장 집에서 보았던 죽은 부인의 사진을 떠올렸고, “어쩌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만나게 되는 얼굴, 정부의 고위관리가 이상스레 촌스런 모자를 쓰고 탄광촌 같은 델 찾아가서 그 지방의 아낙네들과 악수하는 경우, 그 관리는 돌아가는 차 속에서 다 잊을 게 뻔한데도 자기네들의 이런저런 사정을 보도 들어 주는 게 황공스럽기만 해서, 그 관리가 내미는 손을 잡고 수줍게 웃는 얼굴”, 그 아낙의 얼굴이 왜 그를 닮았다고 생각했는지. 당시 권력자의 품위 없는 부인의 모습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필화사건을 낳고 말았다.
같은 날 신문사의 문화부장, 편집국장대리, 《문예중앙》의 주간, 출판국 부장 등이 줄줄이 연행되어 갔다. 당시 고려원의 편집부장으로 있던 시인 박정만의 연행은 뜻밖이었다. 조사를 해봤자 아무런 하자가 없으리라는 한수산의 생각, 그의 이름을 대도 무방하리라고 생각했던 문우의 지목 끝에 박정만을 반긴 것은 소설의 배후. 이윽고 온갖 고문과 만신창이의 육신. 또 비통.

‘마음이 가난한 자는 꿈이라도 꿀 일이요/애통한 자는 하루종일 밖에 나가/그의 별이라도 바라볼 일이다.//(중략)//물 고인 땅에는 눈물이 없다./가물 끝은 있어도 장마 끝은 없다는데/이 장마 그치면 맹꽁이는 우는가./캄캄한 이 시대의 정수리에 코를 박고/기별도 없이 큰 낮잠 주무시는 사람아.’(<맹꽁이는 언제 우는가> 부분)
 

 
사건이 마무리 되면서 한수산은 보안사령부의 권유를 받아들여 일본으로 떠나고, ‘맹꽁이’가 된 박정만은 고문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과 육체적 고통에 인간에 대한 절망까지를 더해 죽는 날까지 시달리게 되었다. 퇴직, 이혼, 그렇지 않아도 좋아하던 술을 입에 달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 그가 남긴 말은 ‘나를 죽인 것은 오월의 그날이다. 광주사태로 민심은 소란하고 힘을 결집할 곳이 없었다. 그런데 왜 가십란에도 못 오르는 뭇매가 나를 때리는가. 적어도 나는 건강하게 살려고 했던 이 땅의 보통 사람에 불과했다.’(《저 쓰라린 세월》 후기) 그리곤 세상을 원망하는 한편의 유서를 남긴다.

‘하늘을 바라고 하늘을 바라고/울지 말아라 벙어리야/미친 오월의 돌개바람이/자지러지게 자지러지게 네 울음을 울어도/말하지 말아라 벙어리야/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아무도 저 하늘을 보려 하지 않는구나.’(<오월의 遺書> 부분)

  연대기
  무릇 시인들에게 시대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불화의 원천이란 말인가. 문학은 시대와 호흡함으로써 생명을 갖는다. 수세기를 거치며 문학은 때로는 당대의 현실을 생동하게, 때로는 현실을 뒤틀며 영상문화에 자기자리를 양보할 때까지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어왔다. 격랑 속으로, 그러가다 안식의 공간에 혹은 풍자와 해학으로 견딜 수 없는 현실의 아픔을 정면으로 부딪치거나 위로해주었던 것도 문학이었다. 따라서 불온한 시대의 문학은 항상 반체제적이었으며 민중들의 편이 아닐 수 없었다. 독재에 시달려온 시대의 모든 문학은, 그것이 참여의 이름을 붙이던 순수의 이름을 붙이던 간에 근본적으로 반독재일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저항하는 문학이 처절하게 시대와 부딪치며 싸워왔듯 싸움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보듬어준 문학 또한 시대와 대결했다. 이제 와서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문학이 따로 있을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1946년 전북 정읍군 산외면 상두리에서 태어난 박정만은 일찍부터 문재를 뽐내며 경희대 국문과에 입학했고 대학교 2학년 때 <겨울 속의 봄 이야기>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학원출판사 편집부장과 《월간문학》의 편집부장 등을 거치며 자신이 좋아하는 문단의 한쪽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왔던 그는 <욕망의 거리> 필화사건이 있기 전까지 김소월의 맥을 잇는 전통적 서정시인으로 촉망받아왔다. 노래로나마 우울한 한을 달래보려는 사람들이 이 땅에 있는 한 그의 시 또한 영원히 행복을 누릴 것만 같았다.
 
  ‘메아리도 살지 않는 산 아래 앉아/그리운 이름 하나 불러 봅니다./먼 산이 물 소리에 녹을 때까지/입속말로 입속말로 불러 봅니다./내 귀가 산보다 더 깊어집니다’(<산 아래 앉아> 전문)
 
이토록 애잔한 노래를 부르던 박정만은 1987년 6월과 8월 사이에 500병 정도의 소주를 마신다. 거리가 뜨겁게 달궈지던 그 시간 그는 오직 술로써 생명을 유지하며 탈진해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불같은 정기가 일어나고, 손은 스스로를 배반하고, 생각들이 한꺼번에 난마처럼 얼크러지더니 8월 20일부터 9월 10일 까지 물경 300편의 시를 토해낸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접신(接神)의 경지’가 아닐 수 없었으며 ‘한 편을 쓰고 나면 또 한 편의 시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죽음을 예감하고 세상에 쏟아낸 이 시들은 1988년 올림픽 폐막식이 거행되던 날 영원히 주인의 손을 떠나 독자들에게 돌아간다. 주인은 쓰러진 술병처럼 저 홀로 방바닥을 나뒹굴 뿐이었다.

 
  도미의 아내
  독자들은 행복하다. 슬프고 한 맺힌 이 땅의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 ‘오늘도 낯선 땅을 헤매돌며/오금박힌 무릎으로 어둠을 짚어가는/불쌍한 거렁뱅이 도미의 아내.’ 슬프고 외로운 이 거렁뱅이의 사랑을 위해 시인은 기꺼이 ‘눈 먼 네 눈의 玉簪(옥잠) 위에/불타는 한 송이 장미를 놓’고 ‘네 몸의 눈이 되리니/언제나 다함없는 네 눈의 불이 되’(<都彌歌> 부분)겠다고 한다.
자기에게 닥쳐온 불행과 고통을 벙어리처럼 감수하면서 더 불행한 이들의 가슴속으로 침잠하는 시인의 모습이야 말로 이 땅 민주화의 밑거름이 아닐 수 없다. 수많은 문인탄압 사례와 필화사건이 있었지만 박정만 시인의 이야기를 서두로 꺼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정읍별사
  ‘사랑이여,/이제 곧 날이 저물고 밤이 오리니/그대 마음의 남끝동 한 천으로/내 육신의 허물을 잘 가리워다오.//(중략)//살아서 못 가졌던 한 평의 땅을/나는 죽어서 비로소 내 것으로 가질지니/인간의 뼈와 살도 다 삭고 나면/흙과 대지의 이름으로 날 불러다오.’(<정읍별사․Ⅲ> 부분)
 
인간은 종종 스스로 쳐놓은 울타리에 자신을 옭아맨다. 영원한 것 같지만 부질없는 것들, 시시각각 교차하는 선과 악, 진보와 보수도 마찬가지고 자본가와 노동자도 역시 그렇다. ‘절대적’이란 말은 흔히 배반을 낳고 ‘변증법’이란 말은 너와 나를 적대시한다. 군사독재가 사라졌다 해서 민주화는 온 것인가. 권력의 느닷없는 연행과 폭력이 줄어들었다 해서 민주화는 온 것인가. 민주화는 삶이고 독재는 죽음이었던가. 민주화란 이름으로 또 다른 울타리치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뼈와 살이 다 삭고 나면/흙과 대지의 이름’일 뿐인 인간이다. 화려한 날들 속에 외로운 죽음 하나가 그리워지는 건 여전히 ‘오금박힌 무릎으로 어둠을 짚어가는’ 이들이 많은 까닭이다. 사라져가는 세상의 이름들이 많은 까닭이다.
‘한 생을 하루해에 던져 놓은 채’ ‘앉은뱅이 시늉으로 걸’어온 시인 박정만. 마흔셋 그의 인생 또한 불행이면서 불행이 아니다, 그의 피와 살과 뼈에 섞인 어혈처럼. 더 많고 다양하고 색이 다른 것들이 저마다 고개를 삐죽삐죽 내미는 그런 세상이 시대의 고통으로 죽어간 그의 바램이 아닐 것인가. 

 

박정만
1946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하여 1965년 전주고 재학 중에 경희대 전국 고교생 백일장에서 시 「돌」로 장원을 받았으며, 1967년에 경희대 국문과에 입학하였다. 이듬 해에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겨울 속의 봄 이야기」로, 1972년에는 문공부 문예작품 공모에 시 「등불설화」, 동화 「봄을 심는 아이들」이 당선되었으며, 1979년에는 첫 시집 『잠자는 돌』(고려원)을 발간했다 .1981년 5월, 소설가 한수산이 ‘중앙일보’에 연재하던 장편소설 『욕망의 거리』의 필화 사건으로 연행되어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극심하게 악화되어 말년에 간경화증을 얻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시 세계는 이 무렵부터 새로운 변모를 하게 된다. 1984년는 동화집 『크고도 작은 새』(서문당)를 1986년에는 『맹꽁이는 언제 우는가』(오상사)와 동화집 『별에 오른 애리』(샘터사)를 발간했다. 1987년에는 수필집 『너는 바람으로 나는 갈잎으로』를 발간하여 경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선시집 『무지개가 되기까지는』(문학사상사), 시집 『서러운 땅』(문학사상사)과『저 쓰라린 세월』(청하)을 발간했다. 1988년에는 시집 『혼자 있는 봄날』(나남)과『어느덧 서쪽』(문학세계사), 『슬픈 일만 나에게』(평민사)를, 그리고『해지는 쪽으로 가고 싶다』(나남)를 발간했으며, ‘박정만 시화전'을 연 후에 그 작품들을 담은 『박정만 시화집』(청맥)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 해 10월 2일에 봉천동 자택에서 홀로 운명했으며, 유고시집 『그대에게 가는 길』(실천문학사) 발간되었다. 그는 사후에 1989년에는 `현대문학상'을 1992년에는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했다.



신동호(시인)
강원도 화천 출생. 1984년 강원고등학교 재학시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0년 ‘오월문학상’을 시상했으며 1992년 《창작과 비평》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활동 시작. 1991년 전대협 문화국장으로 활동 중 구속, 첫 시집 《겨울 경춘선》을 옥중 발간. 이후 시집 《저물 무렵》, 문화평론 《전유성論-디오게네스와의 희극적 만남》 등을 출간. 현재 한양대 국문과에서 북한문학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마쳤으며 (사)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로 통일위원회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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