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레아 패션을 중심으로 익산 자유무역지역

채 스무 살도 안 된 앳된 소녀들이 한겨울 날선 바람에 곱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공단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 달 내내 동굴 같은 작업장에서 먼지를 먹어가며 일해 봐야 그들 손에 쥐어지는 돈은 단 몇 푼. 그러나 소녀들은 그 돈을 아끼고 아껴 시집갈 밑천을 삼거나, 동생 학비를 보태거나, 부모님 병원비를 대거나, 한 가지도 불가능해 보이건만, 그 많은 일을 해왔다. 그리고 지금 그 소녀들은 어느덧 중년의 여성이 되어 있다. 그 많던 소녀들,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후레아 패션에 입사했던 박경이 씨도 지금은 중학생 딸을 둔 마흔 다섯의 중년의 여성이 되어 있다. 이리 수출자유지역 수출자유지역이란 세관의 수속 없이 특정지역에 상품을 반입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주고 자유롭게 상품을 처리·가공·제조할 수 있도록 한 지역을 일컫는다. 이런 지역을 지정한 이유는 외국인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서였다. 1970년 1월 제정된 ‘수출자유지역설치법’에 따라 최초로 마산과 이리(지금의 익산) 두 곳이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익산에서는 1974년 말에 29만 평 규모의 공단 조성이 완료되고 외국 기업들의 입주가 시작되었다. 이리 수출자유지역에 독일 기업인 후레아 패션이 들어선 건 1978년 무렵. 박경이 씨가 입사한 건 이듬해인 1979년이었다. 후레아 패션은 수출자유지역에서뿐만 아니라 전라북도 내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였다. 사무직을 제외한 생산직 노동자만 약 1,800여 명에 달하는 의류공장이었다. 외국 기업이 수출자유지역에 입주한 이유는 관세 혜택 말고도 양질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수출자유지역 내에서는 노동조합의 설립이 불법이어서 사원들을 회사 측이 임의로 통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 입장에서야 좋은 조건이겠지만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로서는 울며 겨자 먹기 식이 아닐 수 없었다. 낙후한 미개발국가의 노동자들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천형이었다고나 할까. 그런 상황 탓에 수출자유지역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파업이라도 할라치면 뭇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저러다 외국기업이 철수해 버리면 어떡하냐? 어차피 너희들은 외국기업이라서 대우도 좋지 않으냐, 이런 손가락질을 많이 받았어요.” 박씨는 1987년과 1988년에 걸친 후레아 패션 임금투쟁과 노조건설투쟁 당시 자신들에게 쏟아졌던 질책의 소리들을 이렇게 표현했다. 실제로 국내기업에 비해 외국기업들의 대우가 상대적으로 좋은 편이었으며 외국기업의 노동자들은 회사 측과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1978년 일본 자본으로 설립한 아세아 스와니 회사는 1989년에 노조가 건설되자 일방적으로 폐업통고를 하고 철수해 버렸다. “그건 상대적인 것일 뿐, 실제 임금 수준은 열악했고 노동조건도 좋지 않았어요.   팔십 년대에 들어서서 마지못해 노조를 허용했지만 그것도 어용노조였죠. 그래서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던 거예요.” 후레아 패션의 민주노조건설 투쟁은 1987년 4월 임금인상 투쟁을 계기로 시작된다. 이리 수출자유지역을 관통하는 도로의 양쪽 인도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무렵이었다. 당시 후레아 패션의 노동자들은 초임 일당 2,700원의 최저임금에 주야 2교대로 혹사당하고 있었다. 게다가 어용노조의 위원장이 독단으로 회사 측과 12.5%의 임금인상안이 타결되었다고 선언한 뒤 잠적해버린 상태였다. 원래 회사 측은 9%, 노동자 측은 16.5%의 인상안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던 중이었다. 후레아 패션의 노동자들은 이 타결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파업에 돌입하였고 회사 측은 기습적으로 휴업공고를 낸 뒤 12명을 해고하였다. 노동자들은 16.5%의 임금인상, 최저생계비 보장, 부당해고 철회 등을 요구하며 회사를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한다. 아직 6월항쟁은 오지 않았고 노동자 대투쟁도 오지 않은 때였다. 마찬가지로 수출자유지역 내 다른 공장들의 노동자들도 꽁꽁 얼어붙어 있을 때였다. 이때 문정현 신부를 비롯한 익산지역 천주교 단체 회원들이 해고 노동자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여러 방면으로 후원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후레아 패션의 파업도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힘이 된 건 공장에 남아 있는 동료들이었어요. 특히 대부분이 여자들이어서 회사 측이 물리력을 동원해 방해를 했는데, 동료들이 잘 견뎌주었어요.” 대부분이 여성인 사업장에서는 여성 노동자에 대한 성희롱이나 성추행이 비일비재했다. 후레아 패션 역시 1,800여 조합원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회사 측은 깡패를 동원해 이른바 구사대를 조직하고 농성장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때부터 이른바 여성의 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아줌마들의 힘은 대단했다.     회사 측의 공작으로 이탈해 가는 조합원을 설득해 붙들어 놓는 것도 아줌마였으며 가두시위를 할 때 최루탄과 전경의 곤봉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나서는 사람도 아줌마들이었다.‘공순이 주제에 무슨 파업이냐!’ 라는 힐난에 상처받은 어린 소녀들은 이 아줌마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끝까지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코트부에 있던 정경희(당시 33세) 씨는 늙은 노동자의 노래와 해고자 12명을 복직시키라는 요구가 담긴 유서를 남긴 채 화장실에서 손목의 동맥을 끊었다. 다행히 정경희 씨는 동료들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졌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 박씨는 지금도 그때의 아줌마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후레아 패션의 해고 노동자 12명과 공장에 남아 있는 1,800여 노동자들은 힘들고 기나긴 투쟁을 했다. 1987년 당시 노동쟁의는 전체 3,749건이었으며 그 가운데 3,458건이 6월과 9월 사이에 벌어졌다. 따라서 후레아 패션이 파업을 벌일 때만 하더라도 그곳의 노동자들은 외로운 섬에 불과했다. 해고 노동자들은 매일같이 출근투쟁과 퇴근투쟁을 했다. 그들은 수출자유지역 진입로 부근에 있는 감시초소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하기도 했으며 감시초소를 지키는 경비원들과 숱하게 몸싸움도 했다. “당신네 나라의 기업이 한국에 와서 이렇게 노동자들을 못살게 굴고 있다, 우리가 직접 독일에 가서 독일 국민들에게 후레아 패션의 진실을 알리겠다, 이렇게 독일 대사관에 가서 따졌지요.” 당시 독일에 있던 한국인 간호사들의 단체와 독일 시민단체들도 후레아 패션의 노동자 탄압에 대해 독일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해고 노동자들은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기도 했으며 국회의 진상조사단이 익산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이처럼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회사 측의 부당해고를 알려낸 결과, 1년 만에 회사 측은 두 손을 들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공장에 남아 있는 동료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고 노동자들이 바깥에서 싸우는 동안 후레아 패션의 노동자들은 회사 전체의 생산라인을 통제하는 메인컴퓨터가 있던 기술부를 점거하였고 결국 노조 위원장 직선제, 고혈수당, 휴업수당 등 몇 가지 사항에 대한 개선책을 회사 측과 합의하게 된다. 드디어 그해 9월 노조 위원장 직선제 선거가 치러져 민주노조가 건설되었으며 그 뒤에도 끊임없이 회사 측에 해고노동자의 복직을 요구했던 것이다. 공순이들이 사고를 쳐도 단단히 친 셈이었다. 사고를 치고 난 뒤 그들은 더 이상 공순이가 아니었다. 여성 노동자였다. 공순이에서 여성 노동자로   회사 측은 해고 노동자들에게 회사에 복직할 것인지, 천오백만 원의 보상금을 받고 회사를 떠날 것인지 결정하기를 종용했다. 해고 노동자 가운데 열 명은 보상금을 받고 회사를 떠났지만 박씨를 비롯해 다른 한 명의 동료는 복직을 선택했다. “그때 천오백만 원이라면 상당히 큰돈이었어요. 보상금을 선택하고 떠나야했던 동료들은 또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으니 원망 같은 건 전혀 없어요. 다만 저는 일터로 돌아가서 그곳의 동료들과 함께 지내고 싶었기 때문에 복직을 선택한 것뿐이지요.” 박씨는 회사로 돌아간 이듬해 노조위원장으로 출마하여 당선된다. 갓 스물의 나이에 시다라 불리는 보조원으로 시작하여 십 년이 흐른 때였다. “다른 사업장의 임금협상이 한 달 안에 끝나는 데 비해 후레아 패션은 거의 두세 달을 협상했어요. 그래서 해마다 벚꽃이 필 무렵 임금인상투쟁이 시작되어서 벚꽃이 지고 난 뒤에야 끝나게 마련이었죠.” 그래서 그들은 한번도 제대로 벚꽃에 심취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수출자유지역을 관통하는 벚꽃 길을 눈앞에 두고도 말이다. 박씨와 함께 찾아간 이리 수출자유지역은 익산 자유무역지역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지난 2000년 수출자유지역이라는 이름은 완전히 사라졌고, 자유무역지역 역시 예전의 수출자유지역과 비교하면 규모가 많이 준 편이다.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관세 특혜 지역임을 알리는 철조망이 여전히 울타리로 서 있다는 점이다. 지금 익산 공단은 자유무역지역, 귀금속단지, 국가산업단지, 일반 공단으로 분류되어 있다. 자유무역지역 입구 맞은편으로는 익산 제2공단지대가 있으며, 입구 왼편에는 귀금속 제2단지가 자리 잡고 있다. 익산은 보석세공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자유무역지역 입구에서 조금 걸어 들어가면 감시초소가 나온다. 당시 해고노동자들은 출퇴근 투쟁을 하면서 바로 이곳 감시초소에 막혀 더 이상 자신들의 공장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감시초소를 지나면 바로 오른쪽이 예전의 광전자 터이며 왼쪽이 이리모방 터이다. 광전자를 지나면 지금은 선진산자로 바뀐 옛 후레아 패션 건물이 나온다. 박씨에 따르면 건물은 예전 그대로이다. 한눈에 보아도 자유무역지역 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한때 그 건물 안에서는 여성 노동자 1,800여 명이 2교대로 작업을 했다. 미싱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있기라도 하는 것일까. 박씨는 귀를 곤두세우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전북지역 민주노조 건설의 신호탄 후레아 패션 양옆에는 남성 노동자가 많았던 광전자와 여성 노동자가 많았던 아세아 스와니가 있었다. 1987년 후레아 패션이 파업을 시작했을 때 가장 긴장했던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광전자와 아세아 스와니 사측에서 보자면, 후레아 패션의 파업 불똥이 튈세라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불똥은 튀고야 말았다. 앞서 말했듯이 아세아 스와니에도 1989년에 노조가 결성되었고 광전자 역시 후레아 패션에 자극을 받아 민주노조를 결성했다. 아세아 스와니의 사원들은 대부분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는 어린 소녀들이었다. 회사 측이 일방적으로 폐업을 통고하는 바람에 어려운 처지에 놓이기도 했지만 이 어린 소녀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일본에 협상단을 보내기까지 했다. 결국 회사 측은 해고통고를 취소하고 모든 사원들에게 퇴직금을 지불하였으며, 폐업 선언 뒤 공장 가동이 멈춘 6개월 동안의 임금까지 지급하였다. 이리 수출자유지역의 이러한 민주노조 건설 투쟁은 다른 공단에도 자극을 줘, 동양석재, 국제정비, 삼립테코, 한성공업 등도 민주노조를 건설할 뿐만 아니라, 익산을 넘어 전주의 에이스제과, 세일나염, 썬전자, 완산제지 등도 마찬가지의 길을 걷게 된다. 전북지역의 대부분 사업장들은 1988년에 이르러서야 민주노조를 결성하게 되는데, 이에는 1987년의 노동자 대투쟁뿐만 아니라 후레아 패션의 민주노조 건설 투쟁이 큰 영향을 끼쳤다. 군산 공단의 세풍제지, 세풍합판, 두산유리 등이 시초였지만 익산을 거쳐 전주로 확산되기까지는 이리 수출자유지역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후레아 패션의 민주노조 건설 투쟁은 전북 지역 모든 노동자들의 민주노조 건설을 향한 움직임의 신호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의 뒤안길로 박씨는 지난 1994년 노동현장을 떠났다. 건강도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늦게 얻은 딸을 키우려면 어쩔 수 없었다. 자식을 키우다보니 교육문제에 관심이 기울어 내일신문의 부설기관인 청소년을 위한 내일 여성센터에 3년 동안 발을 들여놓기도 했지만 그마저 지금은 접은 상태다. 그런 박씨의 행보와 맞추기라도 하듯 후레아 패션 역시 5년 전 수출자유지역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값싼 노동력을 찾아 많은 기업들이 중국 등으로 자리를 옮기는 추세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군산의 국가산업단지 내에 익산보다 네 배나 큰 새로운 자유무역지역이 지정되어 익산 자유무역지역은 국가산업단지로 전환될 전망이다. 이리 수출자유지역부터 이어져 온 내력이 이제 마침표를 찍고 역사의 뒤안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가끔은 쓸쓸해요. 그래도 노동자로 살아왔는데, 그 순수했던 마음을 잊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 고민도 하지요. 지금 바라는 게 있다면 낮은 곳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제가 조금이라도 보템이 될 수 있다면 하는 거예요.” 박씨는 후레아 패션 시절의 동료들을 최근에 다시 만났다. 자주는 아니지만 한 달에 한번쯤은 모여 옛 추억을 나눈다. 단지 추억만을 나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사회복지 시설과 노동현장에 후원을 하는 모임으로 거듭나기 위해 함께 노력 중이다. 박씨와 함께 눈꽃이 피어난 벚나무 길을 걸어 자유무역지역을 빠져나왔다. 자유무역지역임을 알리는 철조망을 따라 걸어가는 박씨의 뒷모습을 보며, 그 많던 소녀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글 손흥규> 1975년 전북 정읍 출생 2001년 최명희 청년 문학상 소설 수상 <작가세계>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사진 황석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