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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쓰는 민주주의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 위치한 기독교회관. 1968년 시공된 이래 한국 현대사의 굵은 물줄기는 늘 이곳을 관통해 흘렀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 그 뒤를 이어 1972년 유신체제의 등장은 한국 현대사의 기나긴 고난을 예고하고 있었다. 군사독재정권이라는 그늘진 세월 속에서도 사람들의 억눌린 숨통을 틔어주는 쪽빛 양지를 제공한 곳이 바로 기독교회관과 명동성당이었다. 그래서 그 이름 앞에는 ‘민주화운동의 성지·메카·보루’ 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우뚝 솟아 여전히 지긋한 시선으로 인간사를 내려다보는 기독교회관, 그 건물 틈틈이 새새이 켜켜이 머금고 있는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본다. 역사와 함께 숨쉬는 교회 한국 기독교 교회의 사회참여 역사는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항거에서부터 시작된다..
영등포는 우리나라 산업 역사상 초기에 형성된 공업지역으로 이른바 ‘마찌고바’로 불리는 소규모 영세공장들이 밀집되어 있던 곳이다. 1990년대 들어 많은 공장들이 지방으로 이전을 시작해, 지금은 몇몇 중소 공장들만이 남아있다. 우리가 찾은 양평동 또한 그러한 변화에 예외일 순 없다. 지금은 몇몇 중소 공장들만이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을 뿐 대부분의 지역이 아파트와 상가들로 빼곡하다. 양평동 사거리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선 박석운 씨(52, 당시 고 문송면 산업재해노동자장례위원회 대변인)는 갈림길에서 잠시 멈춰 선다. 세월을 더듬듯 찬찬히 주위를 살핀 후 발걸음을 뗀다. 나도 그 뒤를 따라 걷는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걸었을 그 길, 차를 위한 길은 있어도 사람을 위한 인도 하나 놓여있지 않은 좁은 길, 화학..
4·3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북촌’이라는 마을을 4·3과 동일시한다. 그만큼 북촌이라는 마을이 제주4·3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코드가 된다는 것이다. 북촌과 4·3을 연결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다름 아닌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이다. 물론 소설에는 ‘북촌’이 아니라 ‘서촌’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북촌의 원래 명칭은 ‘뒷개’다. 마을의 아래쪽으로 포구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주시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북촌이 있다. 일주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함덕리가 나오는데, 이 함덕리가 4·3 당시 북촌에서 있었던 이른바 ‘북촌대학살’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함덕리에 당시 대대본부가 있었고 북촌 학살에 참여한 군부대가 바로 이 부대이다. 대대본부가 있었던 ..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나는 4·3과 관련한 청탁을 받곤 하는데 그 내용은 현장 취재를 하는데 동행하자는 부탁이거나 4·3과 관련한 원고를 써달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현기영 선생의 「순이삼촌」을 영화로 만드는 각색 작업을 마무리해야할 처지에 놓여 있어서 올해만큼은 어떠한 청탁도 받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결국은 허사다. 서울에서 내려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의 황석선 씨와 제주4·3연구소 강태권 연구원과 함께 남제주군 안덕면 동광리로 향한다. 섬의 날씨는 물론 일기예보가 정확하겠지만 때로는 섬사람들의 삶의 체험에서 오는 감각적인 느낌이 더 정확할 때가 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하루에도 대여섯 번 변화무쌍한 날씨를 아무리 첨단과학시대라지만 어떻게 감 잡을 수 있겠는가. 일기예보에서는 날이 풀릴..
강원도는 나에게 검은 이미지로 다가온다. 아마 그것은 험준한 산악과 탄광 때문일 것이다. 험준한 산악에는 검은 그늘이 있는 법이고, 탄광은 말할 것도 없다. 탄광은 어둠 속에서 검은 탄을 캐내는 곳이다. 태백시의 강원탄광을 찾아갈 때 나는 이 검은 이미지를 쫓아가는 느낌이었다. 제천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영월, 사북과 고한을 거쳐 태백시로 간다. 강원탄광의 흔적, 철암 태백시로 가면서, 나의 첫인상은 ‘역시 강원도’였다. 험준한 산맥들이 먼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강원도다운 풍경은 점차로 사라졌다.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고 사북이며 고한의 시가지에는 화려한 모텔과 음식점들의 입간판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인상적인 플래카드도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관광도시로 도약하자..
지난 1988년 청주의 택시노조 파업을 주목하는 것은 역사상 최장기 파업이라는 점이다. 근 일년여 동안 조합원 한명 한명이 자발적으로 또 연합적으로 부당한 사용자와 공권력에 맞선 이유때문이기도 하다.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뭘까?사람은 일을 하면서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가 있다. 업무를 수행하다 보면 부상이나 질병이 생길 수 있고, 부득이 하게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을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이유로 생활에 타격이 온다면 맘 편히 병을 치료하거나 집안 일을 처리할 수는 없다. 그래서 회사가 어떤 경우라도 법정 시간을 기준으로 정해진 기본급을 저하시키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는 것이다. 청주 택시노조의 장기간 파업 역시 근로조건을 완전 무시한 채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면서 택시기사들이 ..
전교조 부산지부의 반 아펙(APEC) 교육과 교원평가제 거부 투쟁은 야당과 수구언론의 색깔론 공세로 인해 지난 11월의 쟁점이 돼버렸다. 현재 조합원 수 10만 명의 전교조는 언론이 부추킨 부정적인 여론과 내부 강온파 대립으로 진통을 겪고 있는 모습이다. 제도교육을 받은 한국 사람치고 우리의 교육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껴보지 않은 이는 거의 드물 것이다. 입시경쟁에서 승승장구해 사회의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극소수 중에서도 시험과 강제적인 규율로 점철된 학창시절을 유쾌하게 회상하는 이는 얼마되지 않을 것 같다. 지금도 우리의 아이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선행학습의 압박을 받고 중·고등학교에 가서는 성적의 노예가 돼버린다. 제3자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의 교육 현실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20년 전과 크게..
파란 하늘을 향해 시원스럽게 뻗은 세련된 아파트 단지와 번듯한 상가들이 즐비한 목동의 거리에는 지나는 행인들마저 왠지 귀티가 흐르는 것 같다. 가을이 깊어가는 안양천의 깔끔하게 조성된 체육공원에서는 시민들이 자전거를 타거나 농구를 하며 한가로움을 만끽하고 있다. 이들 중 20여 년 전 그 곳에 있던 뚝방촌과 생존권을 위한 치열한 몸부림, 그 악다구니를 기억하는 이가 있을까? 정부의 신시가지 조성 계획 1983년 4월 12일, 서울시는 강서구 목동과 신정동 지역에 140만평의 신시가지 조성 계획을 발표한다. 당초 이 계획은 개발지역의 땅을 서울시가 전량 사들이는 ‘토지공영개발’ 방식을 처음 시도하여 인구 10여 만 명의 수용이 가능한 주거지를 만든다고 해서 국민들로부터 관심을 끌었다. 목동 주민들 또한 ‘..
이른 아침 용산역을 향해 가는 택시 안. “나비축제 보러 가시나 보죠?” v 광주가 고향이라는 운전 기사는 내가 함평에 간다니까 그렇게 되물었다. 거센 농민운동의 진원지였던 함평은 30년이란 세월을 거쳐 어느덧 축제의 고을로 재인식되는 것일까? 전라남도 광주에서 서남쪽으로 50여 km 떨어진 함평은 서울에서 기차로 꼬박 다섯 시간이 걸렸다. 태풍주의보 때문에 우려했으나 막상 도착한 함평에는 가을 햇살이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고 있었다. 강렬한 햇볕에 고개를 바로 들기 어려웠으나, 들녘의 벼이삭을 여물게 하기 위한 고마운 볕이라 생각하니 밉기는커녕 정다운 느낌마저 들었다. 서울에서 맛볼 수 없는 풀내음 묻은 바람이 외지인을 반겼고 가을의 초입에 들어선 논은 군데군데 노르스름한 빛깔을 띄고 있었다. 아침에 만..
2005년 8월, 신림 사거리는 대형 쇼핑몰과 나이트클럽, 오락실 등 각종 상가와 바쁘게 지나는 행인들로 분주하기만 하다. 19년 전 이곳에서 반미 시위 도중 분신한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흔적을 다시 찾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당시 집회 참가자들에게 들은대로 사거리에서 보라매공원 방향으로 100m 정도 걷다보니 연좌농성이 시작됐다는 가야쇼핑센터 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그 건물 진입로 쪽의 도로변에서 집회는 시작됐을 것이다. 하지만 열사들이 분신한 3층 건물이 지금도 남아 있을지에 대해선 확신할 수 없었다. 인근의 상인들 몇 분에게 물었으나, 86년에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포기하고 돌아가려는데 버스정류장 바로 뒤편 안경점 진열장 안으로 나이 지긋한 노인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