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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의 기억... 아우슈비츠 박물관 본문

민주화운동기념관/역사기념관_해외

홀로코스트의 기억... 아우슈비츠 박물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19. 18:14


아우슈비츠(Auschwitz) 이후 더 이상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한 아도르노(Theodore W. Adorno)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홀로코스트는 살아남은 자들을 구속하는 20세기의 가장 어두운 기억이다. 그것이 남긴 수많은 슬픔과 상처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홀로코스트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기억이란 항상 망각을 동반하는 선택적 작업이다. 망각 또한 기억의 한 형태인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 무엇이 기억되고 무엇이 망각되는가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언제나 미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전제로, 현재의 문맥에서 과거를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박물관으로 남은 홀로코스트의 현장 아우슈비츠는 그런 의미에서 과거이면서 현재이자 동시에 미래다.
아우슈비츠의 원래 이름은 오시비엥침 이다. 폴란드 남부의 문화도시 크라쿠프에서 100여 킬로 떨어진 곳으로, 옛 폴란드의 병영이 있던 자리였다고 한다. 이 곳은 당시 독일이 점령한 유럽을 놓고 보자면,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 각지로부터 대규모의 수송과 이동에도 편리한 지점이었다. 1940년 독일은 늘어나는 폴란드 정치범을 수용한다는 명목으로 이 곳에 ‘감옥’을 짓고 이름도 독일식인 아우슈비츠로 바꾸었다. 나치의 유태인 문제에 대한 최후의 해결책(Final Solution of the Jewish Question), 즉 유태인 말살정책을 실행에 옮기기 1년여 전의 일이었다. 그 후 나치의 세력이 확산됨에 따라 수용소도 늘어나 제2, 제3의 수용소가 속속 생겨났다. 1944년까지 존재했던 수용소는 모두 40여 개를 웃돌았는데, 대부분 광산이나 제철소 등 대규모의 공장 가까이에 지어졌던 것은 수용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나치의 유태인 말살 정책에 의해 이 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폴란드 출신 유태인이 가장 많았지만 소련의 전쟁 포로, 유고슬라비아, 체코, 그리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유럽 각지에서 끌려 온 공산주의자들, 사상범들, 그리고 집시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요컨대 수용소는 나치 권력의 눈 밖에 난 인종적 정치적 소수자들의 전시장과 같은 것이었다. 이들은 수용소에 도착하면 즉시 분류되어 수감되었는데, 노동력이 없다고 생각되는 환자나 어린이, 노인, 부녀자 등 70퍼센트 이상은 분류나 기록의 대상조차 되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수용소의 정확한 희생자를 헤아리기 어려운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인종적 정치적 소수자들의 전시장

종전 직후 그 곳의 수용자였던 알프레드 피데르키에비츠(Alfred Fiderkiewicz)가 폴란드 의회에 박물관 건립안을 제출하였고, 1947년에 아우슈비츠 제1 수용소가 ‘아우슈비츠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사이트로 지정된 것은 1979년이었다. 이후 아우슈비츠는 정치적 관심의 초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 예술, 영화 등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것은 홀로코스트의 기억이, 인간적인 연민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인류의 비극이었다는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홀로코스트가, 뿌리 깊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나, 최근 9·11과 이라크 전쟁에 이르기까지 오늘의 국제적 갈등의 연원을 캐갈 때 도저히 피해 갈 수 없는 뜨거운 감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방식은 과거에 대한 해석이기도 하지만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아우슈비츠 박물관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특별하다고 하겠다.

 


수용소 자체가 박물관

아우슈비츠 박물관은 그것의 기억을 담을 건물과 유물의 수집이 필요한 여타 기념관이나 박물관과는 달리 수용소 자체가 박물관이 되었다는 점에서 출발부터 그 성격이 다르다. 수용막사와 나치 본부, 그리고 생체 실험을 했다는 병동은 전시실이 되었거나 그대로 역사의 현장으로서의 유적지가 된 셈이다. 유물도 90퍼센트 이상이 현장에서 취한 증거물들이다.

독일이 패망 후 방화 등을 통해 수용소의 흔적을 지우고자 했던 것조차 또 다른 역사적 증거로 남아있다. 현재 일반에게 공개된 곳은 아우슈비츠 제1 박물관과, 이 곳에서 약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제2 박물관인 비르케나우 수용소이다. 191에이커에 달하는 넓은 지역은 당시 수용소의 규모와 참상의 정도를 간접적으로 전해 주고 있다.
최초의 수용소였던 제1 박물관은 제2 박물관에 비해 규모는 매우 작지만, 유태인 학살을 담당했던 나치 본부와 이에 이용된 모든 시설이 집약적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수용소 안으로 들어서면 흡사 버려진 영화 세트장 같이 을씨년스러운 붉은 벽돌 건물들이 정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모두 28개 동이다. 사진과 필름, 육성 녹음, 편지 그리고 수용소 관련 각종 서류 등 당시를 증언하는 증거들뿐만 아니라 루돌프 회스 등 수용소 책임자에 관한 재판 기록으로부터 홀로코스트에 대한 연구 결과물에 이르기까지 이 곳 아카이브의 자료는 엄청나다. 이 자료들은 1989년부터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컴퓨터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관리된다고 한다. 이밖에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6천여 점의 회화, 조각품들이 있다.
수용자들의 면면을 찍은 사진과 그들이 남긴 소지품을 보면 그저 막연하게 불쌍한 유태인이었던 그들이 보다 현실감 있는 실체로 다가온다. 추상화된 유대민족의 비극이 아니라, 일상의 저자 거리에서 평범한 삶을 살았던 구체적인 개개인의 아픔이 드러나는 것이다. 푸른 줄무늬 죄수복 차림으로 번호표를 달고 있는 정면, 측면 사진은 수용소에 들어오면서 신상 파악을 위해 찍은 것으로 겁에 질리고 당혹한 표정이 역력하다. 소지품들은 품목별로 분류되어 전시되고 있다. 학살의 방, 진혼의 방 등으로 이름 붙여진 전시실에는 희생자들의 사진, 안경, 신발, 면도날, 단추, 옷으로부터 금니와 의치, 머리카락에 이르기까지 스러져 간 주인들의 절절한 사연을 대변하고 있다. 이 증거들은 전시실의 선택된 유물로서보다는 일종의 총체적 증거로서 대개 더미를 이루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지푸라기 같은 희망을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있던 그들의 종착지는 대부분 죽음이었다. 굶주림으로, 병으로, 고문으로, 때로는 과중한 노동을 견디지 못해, 때로는 의학적 실험 대상이 되어, 때로는 무모한 탈출 실패로, 또 때로는 재수 없이 지목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죽음의 벽 앞에서 공개 총살되는가 하면, 치클론 B에 의해 가스실에서 대량 살상된 후 소각되어 한 줌의 재로 사라졌던 것이다.
치클론 B라는 독가스를 살포하던 가스실은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천장에 달려있는 가스 투입구는 막혀있었지만, 함께 들어간 어느 누구도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할 정도로 당시의 공포와 절망은 그대로 전해졌다. 치클론 B는 원래 독일이 페스트 등 전염병 예방을 위해 선박이나 빌딩의 소독에 쓰던 화학약품이었다고 한다. 쥐와 같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동물을 처치하기 위해 쓰이던 약품이 유태인 학살에 이용되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만도 아닌 듯 했다. 곧 그들에게 유태인은 인간 이하의, 인간에 해로운 쓰레기였던 것이다.
시체 소각로와 폐기장에는 아직도 꺼지지 않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하고, 주로 정치범을 총살했다는 ‘죽음의 벽’ 앞에는 그 날의 총성들이 아직도 울리는 듯했다. 전기 철조망이 높이 둘러쳐진, 감시탑이 굽어보는 수용소 안 구석구석에는 그 참상과 절망이 서려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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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곳곳에 참상과 절망이 서려 있어

비르케나우 제2 수용소는 제1 수용소에 비하여 훨씬 열악한 시설이지만 그 규모는 여덟 배도 넘는다. 유태인에 대한 착취와 학살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또 얼마나 빨리 확산되었는가를 말해 주기라도 하듯이 건물 또한 급조된 목조 막사이다. 긴 복도를 사이에 두고 대충 얽어 짠 3층의 침상이 양편으로 길게 늘어선 그 곳은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에서 흔히 보던 모습 그대로다. 그런 막사가 300여개가 있는 이 곳은 당시 최대의 유태인 수용소였다고 한다. 모두 다섯 개의 가스실과 소각장이 새로 만들어짐으로써 대량학살은 주로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제3 가스실과 소각장으로 기록에 의하면 하루에 1,500여 명까지 소각이 가능했다고 한다.



제1 수용소에서 제2 수용소인 비르케나우에 이르는 약 3킬로미터 구간은 소위 ‘사업 구역 (Interest Zone)’이라 불리는 곳이다. 나치 점령 당시 각종 공장과 작업장, 창고와 가게 등 수용소의 보조시설들이 밀집했던 지역이었다. 수송에 이용되던 간이 철로와 경사로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이 곳에서도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많은 사람들이 과로로 죽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박물관 측은 이 지역을 포함하여 제1, 제2 수용소 주변 지역을 완충지라 이름하여 개발을 통제하고 있는데, 이는 수용소 자체뿐만 아니라 그 지역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그대로 보존하자는 취지이다. 그러나 인근 지역 주민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역사의 망령으로부터 그만 벗어나 다른 세상이 누리는 풍요와 행복을 누리고 싶다는 그들의 항변을 듣다보면 그들 또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인근 주민들의 반발 만만치 않아

박물관을 나서면서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고 씌어있었던 제1 수용소 정문의 아치 위의 글귀를 다시 상기하였다. 그랬을까? 과연 수용소 안의 사람들이 자유롭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을까? 그들을 정말로 자유롭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노동이었을까 아니면 사랑이었을까? 어쩌면 실낱 같은 희망이었을까? 지금 그들은 자유로운가, 그리고 우리들은 자유로운가?
마침내 전쟁은 끝나고 전 유럽을 들끓게 했던 광기도 잠잠해졌다. 수용소에서 죽은 사람이 몇 명이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200만 명이라고도 하고 300만 명이라고도 한다. 수용소 소장이던 루돌프 회스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들을 자유롭게 한 것은 결국 죽음뿐이었다. 피해자에게도 가해자에게도.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것은 끝났는가? 그러나 그것은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또 다른 구속의 시작일 뿐이었다. 죽은 자들에 대한 죄책감과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역사라는 괴물에 대한 무력감이, 살아남은 것에 대한 안도감을 훨씬 압도하며 남아 있는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망령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외부 세계와 철저히 단절되어 있었던 아우슈비츠는 그러나 해방되었다고 해서 단절마저 해방시키지는 못했다. 피해자와 가해자, 적과 동지, 기억과 망각, 유죄와 무죄 등 더 철저한 이분법적 단절을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긴 것이다.



기억을 매개하는 물적 증거들을 모으고 선택하는 과정 자체가 생략되었다는 점은 아우슈비츠 박물관이 다른 기념관과 구별되는 점이다. 즉 어떤 전시 전략이나 장치의 도움 없이도 있는 그대로 그 날의 역사는 현장에서 넘치도록 재현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물적 증거로 남은 수많은 ‘진실’ 덕분에 이미 그 역사에 대한 판단은 이루어졌고,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을 재현하는 방식은 그 판단 만큼 단순하다. 이에 대한 단죄의 교훈 또한 문학이나 영화 등을 통해 우리에게 깊이 각인되어 왔다. 그렇게 각인된 홀로코스트의 기억은 우리로 하여금 막상 그 역사적 현장에서 거꾸로 그것을 확인하는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체험의 진정성만이 사실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즉 홀로코스트에 대한 논의는 대부분 유태계 학자들에게 독점되어 있었고, 그들은 체험의 ‘진정성’을 근거로 독자들에게 ‘닫힌 독서’를 강요함으로써 그 때의 기억을 전유했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집단적 희생자로서의 유태인의 상처와 고통에 눈물을 흘리고 집단적 가해자로서의 독일을 규탄하는 사이 그 어느 쪽도 아니었거나, 양쪽 모두이기도 했던 ‘인간’의 이야기는 종종 간과되어 왔기 때문이다. 사실 아우슈비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 중의 하나는 곳곳에서 무리지어 기도하거나 울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유태인들이다. 각지에 유태인 박물관과 홀로코스트 기념관들이 들어서고 그 희생자를 추모하는 물결은 아직도 세계만방에 넘실댄다. 그 상처나 고통에 눈감아 버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에 가려 미처 살피지 못한 진실은 없는지 되짚어 보는 일이 필요한 시점이다.

진정성과 사실성 사이에 틈은 없는가

이제 아우슈비츠에 남은 과제는 이미 넘치도록 증명된 유태인의 수난사와 그들의 빛나는 인간 승리를 재상산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그 진정성과 사실성 사이에 어떤 틈은 없는가 생각해 보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은 아우슈비츠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지도 모른다. 아우슈비츠는 이미 그 객관성을 확보해 줄 거리두기가 불가능한 문제의 현장, 문제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박물관을 방문하는 우리들의 몫으로 남는다.

 


<성혜영> 박물관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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