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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쓰는 민주주의
지역문화운동을 아이들과 함께 그이가 걷는 길, 탈춤 봄 날씨가 요란하다. 바람 불다 비 내리고 다시 황사바람이 일고……. 계절상으로 보면 아이들이 야외에서 뛰어 놀기에 가장 좋은 시기이지만 이런 변덕스런 날씨엔 노는 거 좋아하는 아이들도 난감할 것이다. 경기도 과천시 문원동 마을에는 바깥의 날씨와 상관없이 아이들의 춤사위가 한창이다. “낙양~동천 이화~정” 덩더쿵 쿵덕! 장구를 치며 실내의 훈기로 얼굴이 상기된 선생님의 목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아이들의 입 모양이 곧 따라붙는다. “낙양~동천 이화~정” 덩더쿵 쿵덕! 목소리를 너무 크게 내서 그런가 가까이서 지켜보던 아이 하나는 얼굴이 벌게진 채 목에 잔뜩 핏대가 섰다. 그래도 저희들끼리 경쟁이라도 하듯 추임새를 넣는 아이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요즘 ..
10년 전 그대로 무대와 거리에서 배우 권해효 시민단체가 가장 신뢰하는 배우 “나름대로 룰이 있습니다. 본업이 연기자이기 때문에, 예정된 촬영이나 공연 시간을 바꿔가며 집회나 관련 행사에 나가진 않습니다. 다만 그 이외 시간엔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부지런을 떱니다. 하다못해 얼굴이라도 비추고, 활동가나 시민 여러분께 ‘안녕하십니까, 고맙습니다, 힘내세요’라는 뜻을 전하려고 노력합니다.” 배우 권해효(41) 씨는 “활동가도 아니고, 대단한 참여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부지런을 좀 떨고 얼굴이나 비추는 정도”라며 ‘참여’나 ‘활동’이라는 말을 한사코 사양했다. 하지만 그는 안티 조선 운동, 대통령 탄핵반대 촛불집회, 호주제 폐지 운동 등 수많은 ‘활동’에 ‘참여’하며 시민단체들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문화..
깊숙한 인천지하철 1호선 ‘예술회관’역을 빠져나오자, 거리의 모든 것들이 봄바람에 나부낀다. 바다가 가까워서 그런지 유난히 바람이 심하다. 별로 낯설지 않은 골목길을 짚어 옥탑에 있는 작은 사무실로 들어서자 귓속에 울려대던 바람소리가 잦아든다. 낮은 천장이 다정하게 느껴진다. ‘월미산대책위’를 꾸리며 활동 책상 위에는 눈이 시리도록 파란 바탕에 ‘역사와 문화와 환경이 조화를 이루는 인천의 도시공간을 위하여’라는 하얀색 글자가 도드라져 보이는 인천도시환경연대회의의 회원가입 신청서가 놓여있다. 회원가입 신청서가 너무 예뻐서 회원가입 안 하고는 못 배기겠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만난 집행위원장 이희환(41) 씨는 동그란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생후 50일만에 인천으로 올라와 송림동에서 자랐다는 그는 지금은 ..
여성 가장들의 홀로서기 아낙과 사람들 “열 잔 먹으면 한잔 무료야” “푸~~우 쉬이~” 능숙하게 테이크 아웃 커피 카푸치노를 만들어내는 ‘아낙과 사람들’의 최혜린(48) 상임이사는 인터뷰 도중에도 간간히 학생 손님들을 맞아 분주하게 움직인다. “하루에 벌이가 얼마나 되요?” “6~7만원 정도, 요즘엔 방학이라 좀 덜하지만 여기 ‘하자센터’ 개학하면 손님이 더 많지. 그래도 한달에 100만원 정도는 수입이 되니까 괜찮은 거죠.” 시립청소년 직업학교 ‘하자센터’ 건물 1층에는 카페 ‘그래서’가 있다. 카페라고 해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세련된 인테리어로 꾸며놓은 카페가 아니다. 한쪽 편에 나무를 둘러 주방을 꾸려놓고 그 안에 커피를 제조할 수 있는 기계만 있을 뿐이다. 의자라고 해야 ‘하자센터’ 학생들이 편하..
볼륨을 높여라 이주노동자방송국 어둠이 빨리 내리는 겨울저녁, 일민미술관 5층 영상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이주노동자방송국’ 박경주 대표는 짧은 커트머리에 아담한 체구를 가진 이였다. 그곳에는 박경주 대표 말고도 방송국 친구들 여러 명이 컴퓨터 앞에서 사진 파일을 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난 10월부터 영상미디어센터의 후원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이주노동자 시민기자 양성을 위한 미디어교육’에 참여하고 있는 친구들이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친구들을 기다리며 그네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치 친자매들처럼 다정하고도 정답다. 기다리는 친구들은 금방 도착하질 않는다. 다국어 라디오방송 계획하고 있어요 외국인상담소에서 태국어 통역을 하고 있는 쥴리아는 한국에 온 지 12년이나 됐다. ‘이주노동자방송국’에서 ..
살아있는 글쓰기 삶이 보이는 창 르포 문학모임 ‘구로’라는 지명은 서울의 한 자치구다. 그럼에도 ‘구로구’라는 지명보다는 ‘구로공단’이란 명칭으로 더 빨리 인식하는 것은 지난 85년 구로동맹파업과 87년 노동자대투쟁 등 활발한 노동활동의 근거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여전히 저소득층이 많이 살고 ‘코리안 드림’을 안고 온 이주노동자들의 생활 터전이 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지역의 역사와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진보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삶창)이 구로에 있다는 것이 그다지 낫설지가 않다. 삶창에서 진행하는 르포 문학모임에 오늘 강사는 소설가 이인휘 씨다. 대 여섯 평 됨직한 작은 강의실에 앳된 대학생부터 다양한 연령대의 얼굴들이 속속 자리를 차지한다. 저녁 7시 40분,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
박형진의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 - 서정민갑 변산에는 그가 산다. 농사꾼 시인 박형진, 그는 변산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농사지으며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50줄이 가까운 나이에도 흙 파먹고 사는 것을 운명처럼 아는 그는 학교라고는 중학교 1학년까지 다니다 만 것이 전부다. 학교 공부는 일찌감치 작파하고 서울에서 고물장수를 해가며 세상공부를 하던 그는 어느 날 “농민은 농촌에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으로 다시 고향에 돌아와 농사짓고 굿치며 농민운동을 하고 또 글을 쓴다. 세상에 글 쓰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시인이라고 소설가라고 작가라고 명함 내밀며 목에 힘주는 이들이 넘치는 세상에서 박형진은 잘난척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쓴다. 중앙문단에서 알아주지도 않고 상표등록도 되어 있지도..
소백산의 잔설이 이른 봄까지 날리던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아마 고등학교 2학년 새학기가 막 시작됐을 무렵이었다. 지루하고 따분하던 학교생활에서, 그래도 새학기만큼 매력적이고 가슴 뛰는 시간은 없었던 것 같다. 옆자리 짝꿍도 바뀌고, 모든 교과목의 담당 선생님들이 바뀌었으니 말이다. 새학기 첫 번째 한문 시간이었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의 한문 선생님은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칠판에다 흰 분필로 뭔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너는 온다’로 시작하는 이성부 시인의 ‘봄’이라는 시를 단숨에 써내려갔고, 우리는 그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아마 그때 교실 창문 밖으로는 겨우내 안달 난 봄이 살금살금 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처음 그녀를 만나고..
그 곳엔 지치지 않는 배움이 있다 풀무야학 저녁 6시, 서울 쌍문동 한 주택가 구석진 건물에 가방을 든 아주머니들이 하나 둘 씩 들어가기 시작한다. 젊은 여자부터 중년의 티를 훨씬 넘어 머리 희끗한 노인들까지 그 구성원이 다양하다. 댄스 교습소는 아닐테고……. 건물로 들어가는 이유는 모르지만 외벽에 걸린 나무 현판이 그들의 목적을 짐작케 한다. ‘풀무야학’에 불이 켜진다. “사! 백! 팔! 십! 만!” 서너 평 되는 칸막이 교실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이들은 아니다. “자아, 숫자 다시 한번 보시고 따라 읽어 보세요.” 셈을 가르치는 젊은 교사의 목소리 또한 학생들 못지않게 기운차다. “여기서 하믄 자~알 되드만 집에 가서 혼자 하믄 잘 안돼.” 푸념하듯 아쉬워하듯 고백하는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깊은 아쉬움이..
B급 좌파 김규항의 글 모음집 나는 왜 불온한가 고향 친구들을 만날때 마다 낯설다. 아저씨가 다 되어 가는 유부남 사내들의 화제란 건강관리와 재테크, 그리고 아이 얘기가 대부분. 늘 입을 닫고 조용히 들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어쩌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언제나 결론은 매한가지다. 세상이 원래 그렇고 그런 것이라는,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자조섞인 결론은 결국 노래방의 고성방가로 이어진다. 서른을 갓 넘긴 사내들의 조루같은 조로를 뒤로 하고 돌아오는 새벽길은 그래서 언제나 쓸쓸하다. 아파트의 크기와 은행계좌의 잔고와 자동차의 종류로 행복을 가늠하는 짐승같은 자본의 가치관에 잡아먹혀버린 친구들의 어깨를 두드리고 돌아설 때 김규항의 글이 생각나는 것은 당연하다. 개혁의 담론에 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