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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의 낮잠 -다종예술가 임의진의 새해 소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1. 1. 24. 15:07

토끼의 낮잠
-다종예술가 임의진의 새해 소망

글·사진 유성문 rotack@lycos.co.kr



멀고도 가까운 길이었다. 방랑을 돌아 방랑에 이르는 길. 담양(潭陽) 수북(水北) 회선재(回仙齋) 선무당(仙舞堂)의 떠돌이별, 어깨춤 임의진(44). 그는 소위 다종예술가다. 마중물의 시인, 참꽃 피는 마을의 수필가, 예수 동화의 동화작가, 세 번의 개인전을 연 화가, 4집 독집 음반을 준비 중인 포크 싱어, 게다가 여행자의 노래를 비롯한 월드뮤직 선곡자 및 수입음반 기획자이고, 해마다 두어 달은 인적 드문 세계 오지로 길 떠나는 여행가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다채롭다 못해 어지러울 정도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10년간 진보성향 개신교회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던 남녘교회의 목사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전남 강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해남, 광주에서 붉고 따뜻한 흙을 만지며 자랐고, 서울로 올라와 신학교와 청년시절을 보낸다.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어 크고 작은 고초를 겪는다. 당시 진보신학의 산실이던 한국기독교장로회 선교신학대학원(선교교육원)에서 공부한 뒤 목사 안수, 1995년부터 2004년까지 강진 남녘교회에서 담임목사로 목회를 한다.



그는 오지게 오지랖 넓은 목사였다. 월간 참꽃 피는 마을 발간(1995), 풍물교실 참꽃마을 개설(1996), 광주에 작은 연못 교회(후에 미래에서 온 교회로 개명) 창립(1997), 비전향장기수 송환추진운동 전개(1997)… 무등산 보호 환경음악회 풍경소리 증심사와 공동 진행(2002) 등등 통일마당으로, 환경운동으로, 유기농으로, 예술문화마당으로, 절마당으로 안 끼는 데가 없었다. 기어이 작은 시골교회에는 참꽃이 피기 시작했고, 그 아름다움으로 1998년 독일의 슈피겔지에 의해 아름다운 교회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딱 10년 만에 마침내 안식을 얻었다. 그리고 마땅히 순례의 길을 떠났다.

"목회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후 담양에 칩거를 마련했어요. 알고 지내던 스님께서 홀연 미국으로 떠나면서 절터로 마련해둔 곳을 제게 맡겼습니다. 잠시 목수가 되어 집을 짓고 옥호를 회선재, 당호를 선무당이라 했어요. 이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렸어요. 그러다 갑자기 세상구경을 하고프면 배낭 하나 걸머지고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과거 절친했던 인연들 덕분에 먹고 자고는 해결되니까 여비는 많이 들지 않았어요. 2003년에는 그 길에 동행이 되어준 책과 음악, 친구들에 대한 답례로 선곡음반 여행자의 노래를 펴냈어요. 마치 누군가 밤새워 60분짜리 공테잎에 노래를 모아 선물해주던 감동스런 기억처럼 그런 마음의 답례를 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이 음반을 펴낸 이후로도 여러 나라를 옮겨 다녔습니다. 그 결과로 쿠바 여행 러시아 여행 같은 지역별 에피소드 음반을 펴내기도 했고요. 언젠가 숨이 다하면 하늘나라 여행을 펴내게 될지도 모르죠. 어차피 여행은 제게 홀로 있기 연습, 곧 죽음 연습이기도 합니다."

작년에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티에스알을 타고 추방당한 예언자 트로츠키의 넋이 흐르는 바이칼호수 일대를 다녀왔다. 풍요의 바다 무당의 호수라는 뜻쯤의 바이칼호수는 우리 겨레를 낳은 어머니요 아버지 호수라는 이들도 있을 만큼 시원(始原)의 의미가 깊은 곳이다. 그는 바이칼호수 알흔섬에서 며칠 밤낮을 뜬눈으로 보내면서 기도 삼매경에 빠졌다. 그 기도는 제국과 자본에 맞선 목수 노동자 예수를 모신 기도였지만 우리네 4대강과 생명누리, 통일누리를 갉아먹는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바라는 비나리이기도 했다. 그는 바이칼이 추방당한 예언자들을 위무하는, 앞으로도 오래오래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찬물이 되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는 또 얼마 전에 커피여행에 이은 컴필레이션 음반 와인여행을 펴내기도 했다.

"커피여행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와인여행에 실린 곡들도 대부분 와인이라는 특정 소재를 주제 삼아 만들어진 음반입니다. 제가 와인을 만나고 사랑하게 된 것도 다 깊은 인연이라고 여겨집니다. 여행을 통해 각양각색의 와인을 만나면서 다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와인의 맛을 결정짓는다는 갖가지 포도 품종과 떼루아, 양조방법이 저마다 다르듯이 여기 실린 월드 음악도 각기 다른 품종에 출생지도 제조법도 다 다릅니다. 제가 와인과 월드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 다름의 소중함 때문입니다. 거기에 둘 다에 가득한 신령한 취기라니…."

애초 이 음반을 준비하면서 세계 최대의 와인 산지 가운데 한 곳인 남미 칠레에 입성하려고 일정을 완벽히 짰었다. 그런데 칠레에 진도 8.8의 강진이 일어나 많은 주민들이 죽고 가옥이 무너졌다는 비보를 접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길을 틀어 이베리아반도 스페인을 다녀와야 했지만 여전히 칠레가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었다. 그래서 음반에 칠레 포도밭 노동자들이 즐겨 부른다는 칠레 자장가를 한 곡 넣는 것으로 그곳 친구들에 대한 염려와 안부, 기도를 대신했다. 칠레의 포도나무가 다시 무성하게 자라 오르기를, 그곳의 와인농가 농부들이 모두 힘을 내기를.
그의 자유로운 음악영혼은 감상자나 선곡자를 넘어 내친김에 카수의 길로까지 나간다. 거기에는 의형제이자 자유혼의 신화적 가수 김두수의 부추김이 컸다. 2004년 첫 노래모음집 하얀 새를 낸 데 이어 2006년에는 명실상부한 자작곡 위주의 독집 음반 집시의 혀를 내놓았다. 집시의 혀는 일본의 정상급 만돌린 주자이며 기타리스트인 야노 토시히로와, 한국과 일본의 평화디딤돌이며 실험성 짙은 접목 음악을 추구하는 록그룹 곱창전골의 리더 사토 유키에, 그리고 펀펀한 포크록 마당에서 새뚝 솟아오른 신인 여성 포키 수니, 그밖의 여러 집시족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작업에 참여했다. 그리고 3집 방랑길에 이어 현재 4집 수십억 광년의 고독을 녹음 중이다.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이번 앨범에도 한 사람을 기념 헌정하고 있는데, 바로 월든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이다.

그의 변신과 통섭의 끝은 어디일까. 그는 몇 차례의 몸풀기를 거쳐 2007년에는 사진작가 김홍희, 목판화가 류연복, 시인 박남준, 서양화가 한희원과 함께 우리 시대 전방위 다종예술가 5인의 오락가락전(五樂街樂展)을 열면서 본격적인 다종예술가의 길로 나선다. 이어 2008년 보헤미안 랩소디를 시작으로 2010년 여행수첩 & 방랑의 별은 뜨고, 같은 해 방황하는 영혼까지 화가로서 세 차례의 개인전을 열기에 이른다. 2007년부터는 경향신문에 글과 그림을 곁들인 임의진의 시골편지를 연재하고 있기도 하다.



그에게 있어 시골편지는 자연 속에서 펼치는 작은 설교나 다름없다. 들꽃과 새들, 물과 바람, 그와 더불어 사는 이웃들이 소재이고 어쩔 때는 그들이 직접 설교를 하기도 한다. 그 회당에서는 예수조차 농부이거나 목수일 뿐이고 부처는 옆집 아저씨다. 예수 동화를 쓰기도 했던 그는 지금 붓다 동화를 쓰고 있다. 본연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데 있어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다르지만 같기 때문이다. 삽화는 류연복의 목판화로 채울 예정이다. 그러나 시골 살면서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농촌공동체가 깨지면서 농촌문화도 사라졌어요. 산업으로서 농업만 있을 뿐이지 농촌은 없어진 셈이지요. 어쩌다 마을에 돈이라도 조금 떨궈지면 난리가 나고 서로 원수가 되기까지 합니다. 귀농을 하더라도 받아들일 농촌문화가 없으니 결국 경제논리를 따라가고 맙니다. 시골도 이제는 농촌이 아니라 그나마 자연으로서만 남게 되는 것 같아요. 그 자연마저 생각 없는 사람들이 망쳐놓고 있습니다. 비닐의 과도한 사용으로 들판이 온통 비닐꽃 천지가 되어갑니다. 하한선이라고나 할까, 최소한이라도 자연친화적인 사람들이 농촌에 살면서 자연도 영혼도 같이 살릴 방법을 찾아야 해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농촌문화도 다시 일궈낼 수 있을 것이고요.
변두리 아름다움이 있는데 사람들은 모두 복판으로만 가려합니다. 예수도 부처도 모두 변두리 사람이었습니다. 주변부는 쓸쓸하지만 그만큼 울타리가 큽니다. 전환의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지요, 변두리를 향한 전환이 있을 때 도시도 숨통을 틀 수 있어요. 도시가 살기 위해서라도 내려가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합니다."


새해에는 좀 더 작업에 집중할 생각이다. 사람들과의 어울림도 좋지만 그만큼 작업량은 저하된다. 피카소가 그랬던 것처럼 예술노동의 투쟁 정신으로 밀어붙여 보리라. 골방을 더 사랑하고 자기집중을 해야 된다. 4집 음반을 낸 후 뉴질랜드로의 여행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가능하다면 그곳에서 음악회도 열어볼 생각이다. 어떤 조심스러움 때문에 10년 동안 하지 못했던 책의 출판도 해낼 계획이다. 그렇지만 건강하게 이웃과 함께 막걸리를 같이 마실 여유쯤은…….

"금년은 토끼해입니다. 그래서 토끼의 낮잠이라는 화두를 생각해 봅니다. 토끼가 경주 도중에 낮잠을 잔 것은 일부러 거북이가 이기게 해주려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우리는 너무 달리는 것만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경제성장도 이루었으니 그동안 열심히 부와 힘을 쌓은 사람들은 이쯤 일 좀 그만 하고 뒤처진 거북이가 따라올 수 있도록 잠시 낮잠을 자주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산들바람 부는 산언덕에 팔베개하고 누워 묵상에 드는 기분 또한 얼마나 좋겠습니까."

너무 잡다했는가. 그렇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그에게 있어 다양성은 마치 사명과도 같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게 다양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부족할 때 봉건전제가 판을 치고, 체제와 반체제에 따른 대립의식이 팽배한다. 사회적 상식 안에서 다양성이 존중될 때 새로운 생각이 싹트고 진화의 기반이 된다. 그때 비로소 민주주의도 평화도 오해 없는 정착이 가능하다.

"제가 다양성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 좋습니다. 기성품이 아니라는 것, 수제품이라는 것, 밑바닥 남녘이 만들어낸 핸드메이드라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와 다른 게 좋고, 가장 다르게 살고 싶기도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저를 사랑한다면 분명 그런 모습을 예뻐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많아야 우리 사회에 윤기가 돕니다. 자본주의적 욕망에서 벗어나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할 때 사람에 대한 사랑이 가능하겠지요. 떠나고 비우고 다양한 영혼을 만나는 일, 그것이 저의 순례입니다. 우리가 지구를 떠나야 할 때를 대비해서 저 같은 외계인도 하나쯤은 있어야지요."

글·사진 유성문 | [희망세상]독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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