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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수 없는 시간 - 다큐[진실의 문]을 찍으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1. 2. 10. 15:14

사랑할 수 없는 시간
- 다큐[진실의 문]을 찍으며


글·김희철 감독/docueyehanmail.net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 그는 군인이었다. 1997년 12월 전역을 한 그의 어깨에는 세 개의 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불 과 2달 후인 98년 2월 24일, 그는 장남 김훈이 판문점 공동경 비구역 241GP 3번 벙커에서 권총에 의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위 계급장을 달고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김훈의 사인 에 대해 군은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자살’이라고 발표했 다. 유가족은 믿을 수 없었다. 유서도 없었고 군이 발표한 당일 상황과 사인에는 허점과 오류가 많았다. 권총도 김훈의 것이 아니었고 총을 발사했다는 오른손에는 화약흔이 없었으며 오 히려 왼손바닥에서 검출되었다. 사건이 일어났다는 시간에 대 해서도 소대원들의 진술은 오락가락했고 소대원들의 알리바 이도 분명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사건현장의 유류품은 사건이 발생한 후 누군가의 손을 탄 상태였다. 한국군은 당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관할권을 갖고 있던 미군을 핑계대면서 유족의 요구들을 계속 묵살했다. 초동수사 를 진행했던 미군 범죄수사대와 한국군 헌병대의 수사발표는 형식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자리에 참석한 유가족의 질문들은 무시되었다. 예비역 3성 장군인 아버지 김척은 군 조직의 생리를 누구보 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유족은 군의 재수사를 강하게 요구했고 그해 6월부터 11월까지 육군본부 고등검찰부에 의해 2 차 수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김훈 중위가 복무염증과 무력감 등으로 자신의 권총으로‘자살’했 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사건을 TV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다. 육사출신 장 교가 판문점에서 사망했고 그 죽음에 의혹이 많다는 내용이었 다. 그런데 그는 내가 잠시 적을 뒀던 사관학교 때 봤던 기억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1994년 54기로 육사에 들어갔던 나는 진 로 문제로 오랜 시간 고민을 하다가 2학년 1학기 기말고사 때 시험지 백지를 냈다. 자퇴를 하려면 부모님 동의가 필요한데 군인이 되길 바라는 아버지가 도장을 찍어줄리 만무했기 때문 이었다. 그 후 나는 운 좋게 일반대학에 편입했다. 내가 알고 있던 김훈이라는 선배가 맞는지 계속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사관학교에서 생도들은 엄격한 내무생활을 하 게 되는데 군대처럼 중대, 소대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때 김 훈과 같은 중대에 소속된 것은 아니었지만 나보다 2년 선배로 다른 생도들보다 강인하고 모범적인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있 었다. 그런 그가 자살했다는 사실은 도저히 믿기 힘든 사실이 었다.


사회적 이슈가 된 이 사건은 이후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다루 어졌다. 사건 당시 소대원들이 국회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털어 놓은 사실들은 이 사건이 단순하게 발생한 사고가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사고부대인 판문점 경비대대 2소대는 불법적인 구 타와 물품 반출이 있었던 문제 소대였다. 특히 이 사건의 용의자 로 지목되는 사람이 북한군과 접촉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류매체들은 국가보안법 위반에 초점을 맞추고‘군기강 해 이’‘, 안보에큰구멍’이런식의기사들을남발하기시작했다. 대통령은 국방부에 재수사를 지시했고 부랴부랴 차려진 특 별합동조사단(단장 양인목 중장, 이하 특조단)은 세 번째로 이 사건을 수사하게 되었다. 여론을 의식한 듯 특조단은 민간시 민단체를 수사에 참여시키는 등 대대적인 규모로 편성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이 제스처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얼마 되 지 않아 드러났다. 해를 넘겨 99년 1월 15일, 김훈 중위 사인에 관한 법의학토 론회가 특조단의 주최로 개최되었다. 국내외 법의학자들이 초 청된 이날, 토론회의 불공정성에 항의하던 천주교인권위원회 관계자들은 동물 끌려 나가듯 회의장 바깥으로 쫓겨났고 김훈 의 어머니는 절규했다. 유일하게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만이 토론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날 유족의 주장처럼 타살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 했던 법의학자는 재미법의학자 노여수 박사 뿐이었다. 그는 미국에 서 8,000여 건의 부검을 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김훈의 사인을 자살로 볼 수 없는 근거들을 각종 자료들을 제시하면 서 설명했다. 하지만 다른 전문가들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로 자살 견해를 밝혔다. 아버지 김척은 불공정한 패널 편성을 지 적하면서 사건과 관련된 여러 가지 상황을 설명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최종결론으로 극히 예외적인 상황을 모아 자 살이라고 결론짓는 것에 대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노여수 박사에게 사회자는“그럼 지금 자살로 의견을 바꾸시는 겁니 까?”라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사건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식어가고 있던 99년 4월 국방부 특별조사단은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역시‘자살’이었다. 특조단의 최종발표가 있던 당시 나는 제대를 한지 얼마 되 지 않은 상태였다. 어릴 때부터 영화나 방송 분야에 관심이 많 았던 터라 영상 관련 공부를 하고 싶었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 는 현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에 강한 매력을 느꼈 다. 그리고 김훈 중위 사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마음을 먹고 기획안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 나에겐 기술적인 지식도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제작비도 없었고 오직 작품을 만 들고 싶다는 열정만 있었다.


김훈 중위 아버지를 무작정 찾아간 것은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아들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셨고 사건과 관련된 각종 자료를 다큐 만들 때 활용하라면서 모두 제공하셨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사건과 관련된 일이 있을 때마다 시간을 내서 함께 움직였다. 매년 2월 24일에 열리는 김훈 중위 추모미사에 참석했고 6월 현충일에는 김훈 중위의 유해가 봉안된 벽제 부 대에 아버지와 함께 갔다. 갈 때마다‘내년에는 여기 오지 않았 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생기지만 똑같은 생각을 10년 넘게 할 줄은 몰랐다. 아버지를 만난 그 날부터 힘들었던 시간도 있었고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도 많았지만, 항상 내 머리 속에는 김훈 사건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2009년에는 심적으로 많이 부담스러 운 때가 많았다. 그동안 김훈 중위 사건 재판에도 여러 번 참석 하여 대법원 판결까지 지켜봤고, 2006년 만들어진 군의문사진 상규명위원회(이하 군의문사 위원회)에 가서 참고인 조사를 받 기도 했었지만 그 해만큼 김훈 중위 아버지를 자주 만났던 적 은 없었다. 대통령직속으로 설치된 군의문사 위원회는 군사정권 시절 소위‘녹화사업’으로 불리는 강제징집, 프락치 사건과 관련된 군의문사 사건들을 비롯하여 전국의 군부대에서 발생했던 억울한 죽음들의 원인을 규명하여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을 했다. 과거에 일어났던 불행한 일들의 진상을 밝혀서 다시는 그러한 일들이 없는 미래를 기약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 권이 바뀌면서 이상한 경제논리에 의해 이러한 위원회들의 폐 지나 축소가 거론됐다. 사건 조사에 집중해야 할 조사관들은 뒤숭숭한 위원회 분위기에 휩싸이는 것처럼 보였다. 김훈 중위 사건은 시민단체 출신의 조사관이 맡았고, 그 위 에 검찰에서 파견된 과장이 조사를 지휘했다. 2009년에는 그 둘 사이에 국방부에서 나온 팀장이 조사에 들어왔다. 김훈 중 위 아버지는 이들을 자주 만나 사건에 대해 설명했고 그 자리 에 나를 불렀다. 아버지는 카메라로 조사관들과의 대화를 녹화 해주길 부탁하셨다. 6월 4일 판문점 현장에 다녀온 후, 아버지의 위원회 방문은 잦아졌고 나는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카메라를 들고 위원회에 방문했다. 많은 사람들이 군의문사위원회의 이번 조사가 마지 막이길 바라면서 김훈의 아버지와 동석했다. 하지만 조사관들 은 단 한번도 성의 있는 태도로 사건의 조사과정을 시원하게 말해 주지 않았다. 위원회의 조사완료 시간이 다가올수록 아버지의 목소리는 고성으로 변해갔다. 원래 아버지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극히 삼가는 분이고 목소리도 굉장히 나긋하신 분이었는데 과격할 정도로 조사관들을 질타하시는 상황이 점점 많아졌 다. 그럴 때 카메라를 쥐고 있던 나는 그 방에서 도망 가버리고 싶었다. 왜 나는 타인의 고통을 지켜봐야하는 일을 해야 하나? 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길을 택하지 않았을까? 그러한 고민들이 몇 개월째 지속되는 가운데 군의문사위원 회의 최종조사결과 발표가 다가오고 있었다. 뭔가 심상찮은 느 낌은 있었지만 그래도 국방부가 내렸던 결론처럼 얼토당토않 은 내용으로 발표하지는 않겠지 하는 기대심이 있었다. 위원회 는 최종발표일 겨우 이틀 전인 10월 19일에 중간발표를 하겠 다고 유족에게 통보했다. 군의문사위원회가 3년에 가까운 긴 시간동안 조사한 결과 는 실망스러움 그 자체였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국방부의 자살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유족이 주장하는 타 살설도 명확한 증거를 찾을 수 없으니 사건의 진실을 규명할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의문사의 이유를 찾아야할 위원회가 ‘나도 모르겠다.’며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었다. 김훈의 아버지는 벽을 치면서 소리 질렀다. 그날 이상하게 회의실 벽에 걸려있는 시계의 초침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한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김훈의 유족에게 시간은 98년 2월 아들이 죽었던 그 순간에 고정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 며칠 전 새해인사도 드릴 겸해 서 김훈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드렸다. 연일 계속되는 혹한에 감기가 걸리셨는지 예전과 다르게 많이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위원회 조사관들에게 설명하기 위한 자료 들을 고시생처럼 공부하던 그도 이제 기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를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영화를 만드는 일 뿐이다. 작년 5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피칭에 참 가했다. 기획중인 작품을 소개하고 상당한 액수의 제작지원금 을 받는 자리였다. 심사위원들과 청중들 앞에서 나는 김훈 중 위 사건을 소재로 다시 작품을 만들겠다는 프리젠테이션을 했 다. 아쉽게도 1위를 놓쳤지만, 소정의 기획개발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그 돈을 기획개발이 아닌 제작비로 활용하여 요긴 하게 사용했지만, 영화의 질적인 완성도를 높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그마저 이제 바닥을 치려고 하는데 아직 보충 작업이 많이 남아있다. 어쨌든 영화는 완성될 것이고 작업의 감옥에서 풀려날 날이 곧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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