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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의 영롱한 일출도 분단의 상처와 함께 담는 사진작가 [이시우] 본문

인물/칼럼/인터뷰/희망을 말하다

동해의 영롱한 일출도 분단의 상처와 함께 담는 사진작가 [이시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22. 11:19

동해의 영롱한 일출도 분단의 상처와 함께 담는 사진작가 [이시우]

지난 4년 동안 국제사회에서 커다란 우려와 반발을 불러왔던 미국의 일방주의적 대외정책이 부시의 재집권으로 한층 강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또한 미국 내에서 소위‘네오콘’으로 불리는 강경 보수세력들의 영향력이 더 확고해지면서 대북강경론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한반도에서 우리가 원치 않는 전쟁의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고 있는 현 상황에서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린 분단의 상흔을 담은 『민통선 평화기행』이라는 책이 눈길을 끈다. 이 책은 정부가 지원하는 ‘한국의 책 100’에 선정되어 2005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 독일어로 번역되어 소개될 예정이고 일본 리츠메이칸대학에서도 일어로 번역하겠다는 책이다.
‘동해의 영롱한 일출마저 철책선을 통해 봐야 한다.’며 ‘분단이란 생활 속으로 들어온 전쟁’이라는 작가 이시우(37) 씨의 머리글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민간인 통제구역인 비무장지대와 그곳이 삶의 터전인 사람들을 10여 년 동안 자신의 사진 속에 한결같이 담아내고 있다. 분단의 상처를 요란하지 않지만 애잔하게 잡아낸 그의 사진과 글들은 작가의 집념과 놀랄만한 식견을 느끼게 한다.
지난여름에는 폭염을 뚫고 강화도 집에서 일본까지 54일 동안 “우리 스스로 이 땅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며 “유엔사 해체와 남북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하면서 걷기 명상까지 나섰던 그의 삶의 뿌리가 궁금했다.

“20대에는 통일과 평화를 화두로 길거리 운동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분단을 극복하는 것이 통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분단의 잔재, 국가보안법 등을 깨부수면 통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993년 활동했던 운동단체가 해산하여 혼자 버텨야 했던 힘든 시간들과 1995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서의 생활을 거치면서 원래 하나였던 것이 다시 합쳐지는 것이 통일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러자 민족성, 민족문화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위 정치투쟁을 하던 때에는 각박했었고 스스로를 억압하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자 너무나 많은 풍부한 소재들이 보였습니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그에게 6월항쟁은 ‘사진은 사치’ 라는 생각을 안겨줘 사진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지만, 생각의 전환은 다시 사진기를 들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사진기를 들고서 종횡무진 하던 그 시절, 그는 경원선 끝인 연천의 신탄리 역 근처에 있는 폐터널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터널 안으로 들어가다 막다른 콘크리트 벽을 마주했습니다. 고개를 돌리다 터널 입구를 보게 되었죠. 눈부신 빛이 쏟아졌습니다. 그 순간 빛을 잃었던 것이 아니라 빛에 겨워서 관성에 빠져 있었다는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빛의 유무가 아니라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민통선이라는 강한 확신을 이후에 갖게 되었습니다.”
그날의 경험은 어느 순간부터 관성적으로 운동을 하고있는 자신과의 싸움이 외부의 억압 보다 더 중요함을 일깨워줬다. 가장 낮은 곳을 안고 가야 온기 있는 운동이라는 각성이 서울을 등지게 하고 그를 강화로 이끌었다.


빛에 겨워 관성에 빠져 있었어

그의 생활과 사색의 터전이 된 민통선은 또 다른 깨달음도 선사했다. “비무장지대 남쪽은 한국군이 지키고 있는데 태극기와 유엔 깃발이 같이 있습니다. 무심하게 지나쳤었죠. 일본에 가보니 주일 미군부대에도 유엔 깃발이 꽂혀 있더군요. 유엔사의 후방기지가 일본에 7개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유엔군 사령부는 한국전쟁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설립된 것으로 전 세계에서 유일합니다. 유엔사는 한미연합군에게 작전권만 넘겼을 뿐 실체가 있다는 것을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유엔사는 이미 체결된 협정에 의해서 일본의 자위대를 동원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유사법제가 없어도요. 한미일 삼각구도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엔사라는 매개 고리를 통해 묶여 있습니다. 유엔사는 이미 50년 전에 유엔 안보리 결의를 통해 창설되었고 이 땅에 와 있기 때문에 다시 안보리 결의 없이도 당장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비무장지대를 관할하고 있는 유엔사는 그가 민통선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 두 번째 계기가 되었다.
지난여름의 ‘유엔사 해체 요구 걷기 명상’은 한반도의 평화로운 미래를 염원하는 그의 절박한 선택이었으며 동시에 자기 내면의 수련 과정이었다. 매일 아침 5시면 어김없이 길을 나서 하루에 3,40km를 걸은 후에 도착지에서 하루의 명상 기록을 정리하고 그것을 자신의 홈페이지와 시민단체 <비폭력평화물결>의 홈페이지에 올렸다. 관련 시민사회단체에서 대부분 이시우 개인의 이벤트쯤으로 여겼던 것이 아쉬웠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개의치 않지만 다른 현안에 밀려 단체들이 유엔사 문제에 무관심한 것을 그는 못내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것이야말로 분단이 몰고 온 구체적인 위협이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민통선에서 찾은 분단이 몰고 온 위협, 유엔사

9·11테러는 하던 일을 다 접고 그가 주한미군 문제에 몰두하도록 요구했다. “9·11테러가 미국의 보수성을 더욱 강화시킬 거라고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이 보수화 되면 한반도는 당연히 불안해질 수밖에 없고요. 그때 북핵문제가 터지더군요. 미국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은 ‘주한미군의 핵’이라는 생각에 하던 일을 멈추고 전국에 있는 주한 미군 기지를 거의 다 돌아다니며 찾았습니다. 사진만 찍으면 나중에 어디가 어딘지 모르기 때문에 그림도 그리면서 무조건 찍었습니다.” 그러나 열정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일본에 가면 뭔가 잡힐까 고민 중인데 일본에서 사진 초대전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때 일본에서 한 사진작가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한평생 주일 미군기지를 찾아다녔던 그의 책에서 중요한 가르침을 얻게 되었다. “탄약고를 보면서 무기의 종류를 판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그 뒤에 다시 주한 미군기기를 다니면서 탄약고를 관찰했죠.”
통일과 평화에 대한 그의 애착과 실천은 조직 속의 이시우가 아니라 사진작가 이시우로서 독특하게 발현되었다. 여전히 온몸을 던지면서.
“경남 진해에 핵잠수함이 들어오는데 핵무기가 거기에 탑재 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궁리하던 중, 미국 국방성 홈페이지를 검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안 되는 영어실력이었지만 영어사전 하나를 끼고 핵무기와 탄약고 관련 문서를 몇 달씩 뒤졌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죠.” 그의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영어 실력이 늘면서 검색 속도도 빨라지는 가운데 마침내 성과가 있었다. “95년부터 핵무기가 실렸다는 문서를 발견했죠. 정말 놀라웠죠. 설마 했는데, 진짜 있다고 하니 일단 걱정이 앞섰고 이것을 어떻게 알려야 할까 고민하다가 방송국에 연락을 했습니다. 그림이 나와야 하는데 당장 찍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뉴스 팀에서는 다루기가 힘들다고 하더군요.”
방송국이 안 되자 시민사회단체에 알리기로 했다. 그것도 우여곡절 끝에 여의치 않게 되었다. 그래서 언론매체에 알리려고 했다. 그것도 큰 효과가 없었다. 시민사회단체도 언론매체도 메이저가 아닌 무명의 작은 단체에게 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고집’은 결과적으로 1년 동안 북핵문제를 막아보고자 했던 온갖 노력을 무위로 돌려놓았다. 자료를 찾을 때보다 그것을 알릴 방법을 찾는 과정이 더 고통스러웠다. 우리 사회의 벽을 다시금 절감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는 화학무기에 관심을 돌렸다. 일본 작가의 가르침에 따라 탄약고 공식을 적용시켜 보니 그 전에는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판문점을 지키는 유엔사 경비대에서 그는 마침내 화학무기 표식을 발견했다. 때마침 유엔사에서 기자들을 초청하여 용산기지와 판문점을 견학시키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는 마음껏 자신의 사진기에 ‘증거’들을 담을 수 있었다. 프로그램이 끝나갈 무렵 그는 ‘다 공개해도 된다.’는 확인까지 받고 당당하게 보도할 수 있었으며 그것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유엔사 공보관의 반박이 있긴 했으나 그의 재반박 이후, 더이상 그들의 울림은 없었다.
분단의 상처와 위험을 많은 사람들이 느끼지 못 하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사진을 통해 웅변하고 있는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들꽃은 못 움직입니다. 자신을 아름답게 해서 꽃과 나비가 찾아오게 합니다. 꽃과 나비는 스스로 좋아서 들꽃을 찾고 기뻐하면서 들꽃의 꽃가루를 전파시킵니다. 그렇게 들꽃은 온 세상에 퍼지게 됩니다.” 어떤 식으로 살고 싶은지를 은유적으로 들려줬다. “제 생각을 공유 또는 주입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색깔이나 향기가 있다면 내 안으로 들어와 놀고 난 후에 퍼뜨릴 것입니다. 예전에는 다 꿰서 조직하려고 했습니다. 이제는 가만히 제 자리에서도 다 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달이 온 세상을 비추 듯이요.”
어떤 분야든 전문가만이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이 아닌가 싶어 부러우면서도 이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사는 그가 새삼 존경스럽기도 했다. 서울 가는 차비가 제일 비싸고 다른 비용은 거의 드는 게 없다는 그는 극도로 청빈한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사진을 통해 분단의 상처와 위험을 웅변

민주주의와 산업화의 성공적인 진전에도 불구하고 사망자, 부상자, 실종자를 포함하여 당시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300여 만 명의 인명 손실, 1천만 명의 이산가족 그리고 500만 명의 난민을 낳은 ‘악마의 저주’로 불려 마땅한 저 비극적인 한국전쟁의 상처가 아직도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사라지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에게 전쟁은 그 자체로 악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북미간의 긴장의 파고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질서의 급격한 변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의 생명과 안전 더 나아가 한반도에서의 보다 항구적인 평화를 성취하기 위해 우리는 온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황 정 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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