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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타파에 나선 철학자 [김상봉]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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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타파에 나선 철학자 [김상봉]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19. 18:11
대학서열 철폐를 주장하는 것은 포퓰리즘이다.”는 정운찬 서울대 총장의 말은 많은 사회적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학벌철폐를 포퓰리즘으로 연결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여론 주도층이 갖고 있는 소위 ‘과도한 평준화’의 위험성을 부각시키려 하였다. 이와는 달리 민주노동당은 ‘대학서열체제 극복으로 대학 교육의 공공성 실현’과 ‘학벌타파를 위한 사회제도의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학벌문제는 이제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 중의 하나가 된 듯 하다. 이는 학벌문제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들여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를 한 시민단체 ‘학벌 없는 사회’의 노력에 크게 힘입은 것 같다. 이 단체의 김상봉 정책위원장을 만나서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먼저 학벌타파운동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궁금했다. “어려서는 몰랐으나 석사 과정을 마치고 진로를 고민하면서 우리 사회의 학벌문제가 또렷하게 다가왔습니다. 1986년에 학벌이 없는 독일로 유학을 갔는데, 그 곳에서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했습니다.
독일에서는 학교의 명성이 아니라 각자가 하고 싶은 공부와 그 분야를 가장 잘 지도해 줄 수 있는 교수가 학교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이는 독일대학이 평준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대학입학자격시험만 합격하면 정원 제한이 없는 대다수의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습니다.” 입시에 구속받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독일의 상황이 그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독일에서의 경험은 무엇이 건강한 사회이고 무엇이 병든 사회인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1992년에 귀국하면서 김상봉 위원장은 고전문헌학과 칸트철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한국 사회의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기제가 무엇인지에 관한 책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서구식 개념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학벌문제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 문제에 대한 천착이 없이는 한국 사회의 특수한 계급재생산 구조를 적절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당시에는 진보진영에서조차도 학벌문제에 대해서 치열한 반성이 없는 상태였다.

학벌이 없는 독일에서의 경험은 신선한 충격

마침내 그는 1999년부터 학벌타파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함께 하는 시민행동’ 창립 주비대회에서 ‘바른 교육을 위한 시민행동분과’로 시작하여 2000년 6월에 독립했으며, 현재는 ‘학벌 없는 사회’에 이르고 있다.
그는 학벌타파운동을 진행하면서도 학자로서 현실에 대한 철학적 성찰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계속 고민해 왔던 ‘학벌사회’(가제)를 집필하기 시작했으며 곧 탈고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그는 학벌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단순히 고발하거나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고 철학적이고 체계적인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고 한다. 학벌문제에 대한 그의 보다 구체적인 견해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학벌은 계급적 불평등의 주체입니다. 중앙의 국가권력은 대학 학벌이, 지방의 권력은 지방 명문고가 결정합니다. 지방의 경우에는 고교 평준화 이후에 많이 희석되었으나, 중앙 권력은 요지부동입니다. 참여정부라고 일컫는 현 정부 초기에도 청와대 수석비서관 13인 가운데 12인이, 장관의 65%, 1급 공무원의 50%, 3급까지는 31%, 4급까지는 18%가 서울대 출신입니다. 권력의 중심으로 갈수록 독점이 강화되고 주변에서는 독점이 완화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기업, 문화계, 학계 순으로 집중도가 강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권력 투쟁의 주체가 바로 학벌입니다.”

또한 학벌은 현대판 문중이라며 그는 말을 이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가문이나 문벌은 해체되었으나, 가족주의가 뿌리 깊은 우리 사회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 울타리가 필요했으며, 그것이 바로 학벌이라는 것이다. “정상적인 의미의 근대 시민사회는 일과 뜻에 의해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경우 혈연의 해체에 대체된 학벌이 진정한 근대 시민사회로의 진행을 가로 막고 있습니다.”
사교육비 문제를 거론하며 보통교육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너무도 안타까워하는 그에게 학벌문제를 둘러싼 요즘의 논쟁 중 하나인 고교 평준화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고교 평준화가 하향 평준화로 귀결되어 국가 경쟁력을 키우는데 필요한 유능한 인재 양성을 가로막고 있다는 일각의 비판을 염두에 둘 때, 대학서열 폐지는 과도한 평등주의적 이념의 소산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 대한 그의 입장을 물었다. 대학서열의 철폐와 엘리트 양성은 양립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 사회는 참다운 인재를 양성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그는 피력했다. “국가 경쟁력의 측면에서도 ‘어느 시대든 사회를 이끌어가는 엘리트가 있다. 서울대는 사회를 리드할 정예의 지도자를 키워내야 한다.’는 정운찬 서울대 총장의 말은 적절치 않습니다. 전 과목 100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한 분야의 영재를 키우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현대 사회는 시험 성적만으로 인재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다양한 재능이 존중 받고 계발되어야 합니다.”


 학벌문제와 연관된 민감한 사항들에 대한 그의 말은 거침이 없었고, 학벌타파운동의 정당성에 대한 그의 설명은 열정에 가득 차 있었다. 실현가능한 대안이 있는지 묻자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학벌문제 해결의 알파와 오메가는 대학서열 폐지입니다. 독일처럼 대학을 평준화 시켜야 합니다.” 덧붙여 그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방법들을 들려주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가 제시하는 대안과 방법들이 많은 고민을 거친 것이며, 공론의 장에서 진지하게 토론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가 제시하는 방법들은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더 많은 사람들의 공명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


대학서열 폐지는 학벌타파의 알파와 오메가

스스로 조용한 학자라는 그에게 사회활동으로 인해 학자로서의 삶이 위축되거나 방해받지는 않는지 넌즈시 물었다. “개인적 소망은 학벌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다른 분들이 참여하여 짐을 벗게 되면 학문에만 정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려운 시절을 사는 지식인으로서 사회에 대해 발언하고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때 대학 교수였던 그는 지금은 민예총에서 주최하는 문예아카데미의 교장으로서 강의도 하고 책도 쓰고 있다고 한다. 그의 학문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열정은 바쁜 사회활동에도 불구하고 전혀 사그라지지 않는 듯 하다. “현재 대학에서는 인문학과 철학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문예아카데미에서는 오히려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새로운 기운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대학생, 대학원생, 교사, 교수, 시민들이 모여 재야학문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학문의 진보성, 주체성, 철저성을 지향하며 학벌을 얻기 위한 취업준비기관 또는 권력기관으로 전락하여 순수학문이 고사되고 있는 제도권 대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합니다.”

정화된 분노인 베토벤의 예술을 사랑

대학시절부터 베토벤의 과격함을 사랑한다는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베토벤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고 한다. “심오함이 중요합니다. 과격함이 탈색된 심오함은 심오함이 아닙니다. 모든 정신의 숭고의 뿌리에는 불의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분노는 정화시켜야 하는데, 베토벤의 예술은 정화된 분노입니다. 다른 음악도 많이 듣지만 그래서 베토벤을 사랑합니다.” 도덕적 분노가 그의 현실 참여의 하나의 원동력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철학에서도 가장 현실과 독립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쉬운 형이상학적 주제를 탐구해 온 그가 지식인의 현실 참여에 대해 부여하는 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어려서부터 실천이 굳건해지기 위해서는 이론적 성찰이 철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운동하는 만큼의 이론이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견입니다. 운동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어제의 투사가 기득권 세력에게 몸을 맡기는 경우를 왕왕 봅니다. 이 또한 철학의 부재가 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이상학은 세계관이고 예나 지금이나 지배자에게 이를 넘겨주고는 승리할 수 없다며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총체성을 위하여 철학이 필요합니다. 현실적 부분적 대안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총체성의 지평은 아무리 깊고 넓어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학벌이 우리 사회에 제기하는 화두도 주체성의 문제입니다. 학문 특히 철학은 참된 주체성을 발산하는 것입니다. 가장 깊은 이론적 성찰과 표면에 드러난 현상을 아우르는 것이 철학자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 참여는 철저한 철학적 성찰의 내적 요구에 기인한다고 그는 생각하는 듯 하다.

 

철학적 성찰의 내적 요구에 기인한 현실 참여


현실과 철학적 사유의 진지한 만남의 한 전형을 창출하려는 철학자 김상봉 위원장의 치열한 삶은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다”는 괴테의 명언을 생각하게 한다. 자신의 생각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현실 속에서 실현시키고자 노력하고, 동시에 현실의 삶에서 철학적 사유의 모티브들을 끊임없이 찾아내는 그의 사유의 오디세이의 끝이 무엇일까 기대된다.


<황정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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