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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앞 지역주민 홍팡 [조윤석] 본문

인물/칼럼/인터뷰/희망을 말하다

홍대 앞 지역주민 홍팡 [조윤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22. 15:48

 

황신혜밴드. 1997년 ‘빵꾸록’이라는 황당한 이름으로 출현하여 ‘뽕짝’과 펑크를 뒤섞으며 ‘남진 시대’의 감수성을 되살려낸 밴드.
희망시장. 자신의 작품을 인정하고 보여줄 수 있는 곳을 찾는 작가들과 홍대 지역의 주민들, 새롭고 독특한 문화를 찾아 즐기는 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만날 수 있는 공간.
홍대앞문화예술협동조합(홍문협). 다원적이고 실험적인 창작활동의 전초기지인 홍대지역의 상업화에 따른 문화사막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결성한 조직.
이 조합하기 힘든 조합 속에 조윤석(41)이 있다. 그는 황신혜밴드의 베이시스트였고, 희망시장이 생기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으며, 홍문협의 대표인, 홍대 앞 유명인사이다. 최근엔 윤이상 선생 10주기를 맞아 윤이상을 추모하는 콘서트 <밤이여 나뉘어라!>를 기획하여 주목을 받기도 했다.
아펙(APEC)이다, 쌀 개방 반대다, 교원평가다, 온통 머리를 시끌시끌하게 만드는 뉴스의 홍수 속에서 그를 만나면 뭔가 재미있는 삶, 자유로운 삶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법 쌀쌀한 초겨울바람이 부는 날, 홍대 앞 명소 중의 한 곳인 어느 까페에서 조윤석, 그를 만났다.

구의원 선거에 출마하다
인터뷰의 시작은 그에 대해 조금은 엉뚱하다는 생각을 갖게 했던, 구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이유에 대한 질문이었다.
“2001년도에 제가 결혼식 주례를 봤어요. 농촌에 가면 60세가 가장 젊은이지만, 홍대에서는 40살이 최고령이에요. 홍대는 윗세대가 없는, 동네에 어른이라고는 없이 애들만 있는 동네였죠.
대학을 졸업한 친구들이 취직하기는 싫고, 장사를 하기도 하고, 또 몇몇이 모여서 ‘클럽’이란 걸 만들게 됐죠. 열심히 음악하다 보니까 유명해졌고, 크라잉넛이나 황신혜밴드가 홍대를 대중에 알리게 됐죠. 그러면서 밴드가 순식간에 늘어났고, 시골에서 기타 하나 메고 홍대 앞에 상경하는 친구들이 생겨났어요. 이 친구들이 싼 노동력과 아이디어를 제공하면서 홍대를 떠받치게 됐는데 세월이 흘러 결혼할 때가 된 거에요. 그런데 이 친구들이 여기서 학교를 다닌 것도 아니고 그냥 연고가 홍대 앞인 거예요. 제가 당시에 출판사도 하고 사장이라고 밥도 사주고 그러면서 ‘성공한 어른’이 돼버린 거죠. 처음엔 주례는 안 된다고 난리를 쳤지만 결국 제가 아니면 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때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이 친구들을 뭘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클럽 공연 때문에 구청을 오가다가 ‘문화예술기금’이란 게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내가 빨리 구의원이 되서 예산을 좀 돌려줘야겠다는 단순한 계기로 출마하게 된 거예요. 그때는 아는 애들이 많으니까 될 줄 알았죠.”



 

자유스러움, 전복성, 관용적 태도
“홍대 앞과 홍대 밖은 전혀 다른 가치체계를 갖고 있어요. 훨씬 더 자유스럽다던지, 전복적이라던지.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홍대 앞에서는 다 용서가 되요. 다른 데서 하면 미친 짓인데 홍대 앞에서는 퍼포먼스 예술이라고 얘기를 하죠. 신촌만 나가도 쳐다보는 행동을 홍대 앞에서는 쳐다보지도 않아요. 관용이죠.
이런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졌냐면, 예전 1960-70년대 홍대 미대 선배들 얘길 들어보면 당시 남자가 미대에 오는 것은 호적을 파버리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대요.
독립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민주화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돈도 안 되는 헛짓거리를 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던 거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지역 주민들이 보기에 그들이 말하는 예술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인상 깊었고 어떤 의미나 가치가 있는 거구나라고 느끼게 된 거죠. 그래서 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어떤 관용적인 태도들이 있어요. 이런 것이 홍대 앞이 다른 지역과 다를 수 있는, 무언가를 해나가기에 가장 큰 힘인 거죠.”

그는 전복성, 관용적인 태도, 다른 가치관, 위계에서 벗어나있는 조직화되지 않는 자유스러움 등을 홍대 앞의 특성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홍대 앞의 특성들은 ‘자본’이 유입되면서 위협받게 되었고 상업 소비 공간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더구나 서울시가 문화지구 지정 검토를 발표하자 건물 값과 임대료 등이 급속하게 상승했고, 결국 한국에서 유일한 실험예술극장인 <씨어터제로>가 폐관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이에 홍대 앞 문화예술인들이 홍문협을 결성하고 <씨어터제로> 지키기 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씨어터제로가 없어진다고 해서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달려들어 막 했는데, 그때 ‘아, 이제 홍대는 끝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홍대는 지킬 게 없어야 되요. 홍대는 속된 말로 맨땅에 헤딩이고 없는 게 당연한 거예요. 지금까지 홍대가 그런 거였다고 하면 이제는 지킬게 생긴 거죠. 지킬게 생겼다는 건 가치가 생겼다는 거거든요?
이제 홍대는 산업화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땅값이 예전처럼 싸지 않아서 예술가들의 자유스러운 창작공간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겠죠. 홍대의 매력이라고 했던 건 생산과 유통, 소비가 같은 지역에서 일어난다는 것이었는데, 이제 생산은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는 거죠.”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홍대의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도시농업을 꿈꾸다
“홍대 앞에서는 뭘 해도 돈이 안 돼요. 그래서 여기는 ‘원’이라는 통화가 사용이 안 되고 있으니까 홍대 앞의 새로운 기초통화, ‘홍’이란 걸 만들자는 얘기를 하곤 했어요.
어차피 변화의 시점이고 변화를 어떻게 능동적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인가 고민을 하고 있죠. 그런 와중에 저는 홍대 앞의 미래는 ‘농사’에 달려있다. 홍대 앞 컬처(culture)에서 영속적인(permanent) 컬처, 에그리컬처(농업, agriculture)로 이행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고민을 하고 있죠.”
젊음과 자유로움을 대표하는 문화공간인 홍대 앞에서 농사라니 뭔가 어색하다.
“문화예술이라는 게, 자기 절실함이 있어야 노래든 글이든 나오거든요. 자기 체험이 없으면 자기 예술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거죠. 이게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친구들에게 제일 필요한 거예요. 그리고 문화예술, 놀이, 페스티벌 이런 것들은 열심히 일하고 난 다음에 함께 노는 거잖아요. 맨날 일도 안하고 논다는 건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땀 흘려서 일하고 농사져서 부족한 경제도 좀 보탬이 되고. 아니면 계속 장사를 하던가, 기금이나 쫓아 다니던가 해야 하는데 이건 삶이 팍팍해지는 거죠.

일명 365번지 기찻길, 걷고 싶은 거리 끝이 용산선 폐선이에요. 4만 5천 평 정도 되는 지역으로 2010년까지 공원화한다고 하는데, 거기에 농사를 지으면 어떨까 생각이 든 거예요. 쿠바의 도시농업이 가능하지 않을까, 홍대가 우리나라에서 도시농업의 발전지가 되지 않을까. 꿈만 갖고 있는 거죠.”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미국의 봉쇄정책으로 위기에 빠졌던 쿠바가 도시의 유기농장을 통해 농산물을 자급자족하게 되면서 도시농업은 도시문제와 식량주권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있는 방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홍대 앞에서 농사를 짓는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정말 멋진 프로젝트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역문화와 귀농운동
“홍대에서 뭘 하니까 지역에 있는 친구들에게서 자꾸 만나자고 연락이 와요.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만나게 됐는데, 만나고 나서 참 미안하다고 느낀 게 단지 홍대가 좋고 내가 아는 친구들하고 재미있게 잘 지내기 위해서 ‘홍대, 홍대, 홍대’ 그러고 다녔는데 지역에서 보면 홍대가 진공청소기처럼 지역에서 재능 있고 똑똑한 친구들을 전부 빨아들이는 거예요. 할 만하면 제일 똑똑하고 잘나가는 친구들이 하나 쑥 빠져 서울로 올라가고 그래서 와해되고. 지역에서 문화운동을 하는 친구들의 상실감이라는 건 말도 못하게 심각하더군요.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구나. 그래서 앞으로 내가 하는 활동에 후배를 위해 하는 일이 있으면 절반은 지역을 위해서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역문화들이 홍대를 통해서 보여 질 수 있고,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그런 기능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리고 서울에서 아주 적극적으로 다시 귀농운동을 하는 게 어떨까. 지역에 내려가서 농사도 짓고, 문화예술 활동을 하고 그러는데 홍대가 좋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죠.”

그는 홍대 앞에서 25년째 활동하고 있는 ‘홍팡(홍대 앞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홍대 앞이 기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실험 정신이 넘치는 곳이기를 바란다. 어쩌면 <카바레 볼테르>와 같은 공간을
되기를 꿈꾸는지도 모르겠다.
‘홍대 앞’, 이 단어는 홍익대학교 정문부터 지하철 2호선이 있는 큰 찻길을 중심으로 좌우의 상수동에서 서교동에 이르는 인근 지역을 지칭하는 의미를 넘어서 홍대 앞에 사는 사람들, 홍대 앞에서 창작 활동을 하는 사람들, 그들이 펼치는 다양한 문화 실험들, 수많은 클럽들, 그 속에서 자유롭게 즐기며 노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을 지칭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인디문화와 언더문화의 메카로 제멋대로 입고 먹고 놀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인 홍대 앞은 물밀듯 밀려오는 상업자본의 공세 속에서 변화의 소용돌이를 겪고 있다. 전철역 주변에 대규모 상가건물이 들어서고, 문화생산 공간에서 상업소비 공간으로 변질되면서 다양한 문화 시설과 거점들이 붕괴되고 있다.
홍대 앞은 다양한 개성들이 서로 어울려 더 큰 하나의 개성을 창조해 내는 문화 공간이다. 그곳에선 나이도, 성별도, 옷차림새도, 피부색도 문제가 안 된다. 이런 홍대 앞만의 독특한 개성이 자본이라는 거대 공룡에 잠식되어버리지 않길 바랄 뿐이다.


 

<글 / 이수원> <사진 /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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