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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돌아가야 합니다/비전향 장기수 송환운동 권오헌 본문

인물/칼럼/인터뷰/희망을 말하다

살아서 돌아가야 합니다/비전향 장기수 송환운동 권오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22. 15:39

 

지난달 2일 2차 송환 대상자였던 장기수 정순택 선생의 시신이 북측 가족들에게 인도되었다. 2000년 9월 2일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측으로 송환된 후 처음 실시된 송환이었으며 더욱이 유해 송환은 역사상 최초의 일이라 언론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장기수들의 송환 문제는 1993년 전 인민군 종군기자 이인모 선생이 북측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면서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장기수 문제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관심이 촉발되었고, 다양한 입장에서 ‘장기수’와 ‘전향’에 대한 문제가 논의되었다. 얼마 전에는 장기수들의 수형생활과 송환 과정을 담은 영화들이 제작되어 극장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송환 문제는 아직도 분단 상태에 있는,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이 존재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야기하기 껄끄러운 논제이다.
가을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던 날 오후, 장기수 선생님들이 함께 사시는 ‘만남의 집’에서 민가협양심수후원회(양심수후원회) 회장이자 비전향장기수송환추진위원회(송환추진위원회) 상임공동대표로 장기수들의 송환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권오헌(68) 선생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송환’과 ‘방문’
“생전에 신념의 고향을 찾지 못하고, 시신이나마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신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합니다. 다만 생전에 송환이 실현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최초로 ‘송환’이라는 이름으로 유해 송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1차 송환 때도, 이인모 선생 때도 ‘송환’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북한 ‘방문’의 형식이었습니다. 이번에 최초로 ‘송환’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정부가 송환의 당위성을 드러낸 의미이기도 합니다.”

‘송환’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처음으로 쓰였다는 사실은 조금 놀라운 일이었다. 용어 자체도 사용하지 못할 만큼 우리 사회가 경직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송환은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송환의 원칙은 첫째, 북쪽이 고향이고 둘째, 북쪽에 가족이 있으며 셋째, 오랜 세월 감옥살이를 했고 넷째, 장기수로서 본인이 원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난 1차 송환 후 당시 송환에서 제외되었던 분들을 포함하여 33명을 희망자로 2차 송환을 요구해왔습니다. 그러는 사이 다섯 분이 돌아가시고 현재 스물 여덟분이 남았습니다. 이 외에 미처 몰라 신청하지 못하셨던 분들까지 포함하여 현재 40여 명의 장기수 선생님들이 송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송환의 문제는 ‘6.15남북공동선언’의 합의사항입니다. 정부는 적극적으로 송환의 문제를 검토하고 실현해야 합니다.”

 

송환은 ‘6.15남북공동선언’의 합의사항
1차 송환 때 송환 여부를 결정짓는 요소 중 하나는 해당 장기수가 ‘전향’을 했느냐 안 했느냐의 문제였다. 지난 2002년 2월 5일 송환을 희망하는 장기수들은 ‘강제전향은 전향이 아니다.’라는 전향 무효선언을 하고 송환을 요구했다. 전향제도는 원천적으로 위헌이며 본인 의지에 반해서 잔혹한 고문 등으로 강제전향을 당한 장기구금 양심수는 비전향 장기수로 간주하여 공동선언 정신에 따라 조건 없이 송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상전향이란 반체제 운동의 지도자나 진보적 지식인이 국가권력의 강제에 굴복하여 자신의 사상이나 정치적 신념을 변경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사상전향제도가 국내에서는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에 위헌이라는 법률적 비판과 인도적 차원의 비판, 민주화운동 차원에서의 비판이 잇따랐고, 국제적으로는 세계 인권단체로부터 비인도적 제도라는 비판을 받으며 반인권 국가로 낙인이 찍히기까지 하였다. 1998년 7월 전향제도는 준법서약제로 대체되었지만, ‘전향’의 문제는 여전히 조심스럽게 해결해야 할 문제다.
“전향은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표명한 헌법정신에 반하는 것이며 국제협약과 인권선언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인권의 문제로 본인의 의사에 반하며, 고문 등 잔인한 방법으로 전향한 것은 무효입니다.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사상전향제도의 위법성을 지적하며 강제 전향한 것은 원상회복 시켜야 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여기서 원상회복이란 전향은 무효이기에 전향하여 불이익 당한 것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송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정부에서도 전향과 비전향을 구분하지 않으며, 사상전향을 했기 때문에 송환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하지 않습니다.”

 

전향 여부는 송환에 중요치 않아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송환과 전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선생이 어떻게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해왔는지가 궁금해졌다.
“처음 농민운동으로 시작했습니다. 당시 4-H그룹이라 했던 농촌 청소년운동 활동을 했습니다. 비닐재배 등 새로운 농사개량법을 도입하고 농산물 소득증대 사업, 부녀생활 개선, 농촌 공동체문화 형성을 위한 일들을 했습니다.
노동현장을 체험하던 1964년 몰래 몰래 서울에 와서 한일회담 반대데모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함석헌, 장준하 선생과 교류하게 되었지요. 또 현장에서 만난 인텔리 선배의 권유로 통일사회당(통사당)에 입당하여 문화국장 일도 하고, 당원 교육을 맡아 하기도 했습니다.
통사당 활동을 하며 남민전 활동을 했고 이로 인해 구속되었습니다. 1983년 출소 후 양심수 석방운동을 시작한 것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1985년 민가협을, 1989년 민가협양심수후원회를 만들었고, 이 일만 하면서 인권과 민족자주, 자주통일에 관련한 연대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인터뷰가 진행된 ‘만남의 집’은 양심수후원회가 결성된 1989년 독지가의 도움으로 구로동에 처음 전셋집을 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당시에는 한 곳에 오래 있지 못했는데, 신분이 드러나면 주거를 거부당해 수유리, 봉천11동 등으로 옮겨 다녀야 했다.  그러다가 1994년 이곳 낙성대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 집 주인이었던 양심수후원회 부회장이 선생님들을 위해 집을 내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곳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장기수 선생님들의 신분이 완전히 보장되었고 그 위상이 확고해지게 되었다.



경찰이나 정보원들의 출입이나 전화도 불가능해졌고, 선생님들의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된 것이다. 이곳 ‘만남의 집’ 외에 대전에 ‘사랑의 집’, 광주 ‘통일의 집’ 등이 지역단체들의 도움으로 운영되고 있다.
비전향 장기수들의 송환에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송환추진위원회는 1993년 ‘인민군 종군기자 이인모 노인 송환추진 모임’을 계기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인모 선생이 송환된 후에는 ‘김인서, 함세환, 김영태 노인 송환추진본부’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비전향 장기수들이 완전 석방되기 전인 1999년 23개 단체가 모여 ‘비전향장기수송환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양심수 석방과 후원을 위한 활동
지난 9월 2일 송환추진위원회는 비전향 장기수 송환 5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비전향 장기수의 신속한 2차 송환을 촉구했다.
“정부에서는 조건을 달지 않고, 전향과 비전향을 구분하지 않고 송환하겠다는 입장입니다. 송환추진위원회는 정부에 송환을 촉구하는 활동은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다만 너무 늦어지는 것을 앞당겨 달라는 요구는 할 것입니다. 그리고 환송준비 등 가실 선생님들에 대한 준비를 계속 할 것입니다. 1차 송환 후 미신청자의 송환문제, 전향으로 인해 제외된 장기수, 그리고 남측에 남아있는 가족의 재결합 문제 등이 송환추진위원회에서 남은 과제로 꼽은 문제들입니다. 또한 가족 때문에 북에 가지 못하는 분들의 송환문제, 송환을 기다리다 돌아가신 분들의 유해송환 문제도 해결되어야 합니다.”

인터뷰를 마감하면서 선생은 다음의 말을 꼭 전해주기를 부탁했다.
“송환은 6?15공동선언의 합의사항입니다. 남북정상이 합의한 돌이킬 수 없는 주요 합의사항입니다. 그리고 인도주의 문제입니다. 일부에서 송환과 관련하여 상호주의를 주장하며 다른 문제들과 연계시키려 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합의사항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다른 인도주의 문제가 있다면 남과 북이 새로 합의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인도주의 정신으로, 인권 그리고 인간적 도리로써 송환이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인간적 도리로써 2차 송환을 신속히 실행해야 한다
비전향 장기수는 냉전의 시대, 좌우 갈등의 산물이다.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지극히 대립적이다. 한쪽에서는 ‘빨갱이’ 담론을, 다른 한쪽에서는 인권 담론을 이야기한다.
우리 사회는 불신과 대결의 과거에서 벗어나 민족의 화해와 협력, 자주와 평화 통일로 가는 길 위에 서있다. 2차 송환을 희망하는 비전향 장기수들의 평균 나이는 77세이며, 이들이 감옥에서 보낸 햇수는 총 400여 년이 넘는다. 그리운 마음으로 고향과 가족을 찾는 이들을 인도주의 정신으로 감싸 안을 수는 없는지…….
돌아오는 길, 비전향 장기수들의 송환 과정을 담았던 다큐멘터리 영화 <송환>의 여러 장면들이 떠올랐다. 북쪽의 가족들에게 돌아가게 됐다고 환한 웃음을 짓던 장기수 선생님들의 모습보다 전향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그래서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없었던 또다른 장기수 선생님들의 그늘진 모습이 오래도록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글 / 이수원> <사진 /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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