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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자연에 대한 상실된 감수성을 일깨우는 [황대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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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자연에 대한 상실된 감수성을 일깨우는 [황대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19. 17:50

널리 알려져 있듯이 우리의 현대사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와 민주주의를 획득하려는 투쟁의 역사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독재정권 하의 권력의 부당한 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비인간적인 고문으로 고통을 받았고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다.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49) 씨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1985년에 학원 간첩단 사건으로 서른의 나이에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던 그는 1998년 마흔 세 살이 될 때까지 13년 2개월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2001년 6월 8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통해 그가 연루되었던 간첩단 사건은 국가 기관에 의해 완전히 날조된 조작극이었음이 밝혀졌다.
국가 권력에 의해 간첩이라는 누명을 쓴 채 긴 세월 동안 사회와 격리되었던 그가 겪었던 분노와 좌절 그리고 고통의 깊이와 폭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야생초 편지』를 통해 드러나듯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야생초들을 매개로 새로운 삶의 지평과 자연에 대한 따뜻한 감수성을 키워 나간 그의 삶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지난 세월 동안 그에게서 일어난 변화의 과정을 직접 들을 기회를 가졌다.


국가 권력에 의해 간첩 누명 써


학원 간첩단 사건이 어떻게 조작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1982년에 대학 졸업과 함께 미국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학생운동을 했었고, 또 암울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이었기에 쉽지 않은 결단이었지요. 많은 고민 끝에 더 넓은 세상에서 운동의 새로운 비전을 찾기로 마음을 정했었죠. 미국의 웨스턴 일리노이 주립대학(Western Illinois University)에서 여러 책을 보면서 생각이 통하는 사람들과 조국의 민주화운동의 방향에 대해 많은 토론을 했습니다. 결코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빌미가 되어 당시 총선에서의 패배 등 수세에 몰린 전두환 정권의 국면 전환용 공안사건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당시 남산 안기부(현재 국정원)에서의 죽음을 넘나든 60일 간의 온갖 고문을 통해서 학원 간첩단 사건은 꾸며졌다. 그는 감옥에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처음 5, 6년 동안은 갈등과 혼돈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감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단식 투쟁, 밀서 내보내기, 혼자 만세 부르기 등등. 그러나 어떤 울림도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감옥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판단이 들자, 고민 끝에 결심한 마지막 몸부림이 난동 부리기였습니다. 난동을 부려 추가 징역을 살게 되면 법정에 설 수 있고, 재판 과정에서 세상에 진실을 알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무기징역을 사는 마당에 추가 징역 따위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바닷물에 물 한 방울 더 떨어뜨리는 격이라고 생각했죠.”

그는 당시에 그가 머물고 있었던 안동교도소의 개신교 집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내외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이는 이 집회에서 그는 “국가보안법 폐지”와 “양심수 석방” 등을 외치며 단상을 점거하고 유인물을 뿌렸다. 확실하게 사건을 만들기 위해서 일종의 정치결사체를 구성하기로 하고, 그를 믿고 따랐던 일반수들을 설득해 행동을 같이 했다.

“추가 징역을 확실히 살 줄 알았는데 공교롭게도 그 당시가 1991년 강경대 열사의 죽음 이후 분신이 잇따르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사면초가 상태였던 안기부는 자신들의 조작사건이 드러날까 두려워서 저를 법정에 세우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그는 추가 징역 대신 교도소 징벌방에서 온몸이 꽁꽁 묵힌 채로 또 한번 생사를 넘나든 두 달을 보내면서 철저한 무기력을 경험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으나 뜻대로 되는 것이 없음을 겪으며, 억울하고 빨리 나가고 싶다는 기대와 희망뿐만 아니라 절망조차 그를 붙들지 못 했다.

 

 

철저한 무기력을 경험

징벌방에서 나온 그는 마음 못지않게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몸을 추스르기 위해 자연요법을 시작했다. 만성 기관지염을 고쳐보려고 야생초를 길러 먹으면서 그의 삶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한다.
인간의 관심 밖에 내버려져 있는 야생초에게서 자신의 처지와 같은 생명체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런 일체감은 한갓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던 벌레나 풀과 같은 존재도 아주 고귀한 생명체라는 느낌으로 발전했다. 이런 체험을 통해 그는 인간 사회의 제도만의 변혁을 목표로 하는 정치투쟁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데 한계를 지닌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적인 변화와 함께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의 변화로 관심이 옮겨가야 합니다.”

그의 생명사상은 ‘국민의 정부’ 출범으로 1998년에 가석방 된 후에 더욱 더 구체화되고 발전된다.

 

 

야생초에게서 자신의 처지와 같은 생명체 발견

가석방 후에 전남 영광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중 그의 석방 운동을 펼쳤던 노르웨이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이하 앰네스티)로부터 한국의 인권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협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앰네스티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일단 궁금했다.


“감옥에서 1988년에 내보냈던 밀서 ‘나는 어떻게 간첩이 되었는가’의 전문이 그 당시 평화신문에 실렸다고 합니다. 두 달간의 고문 내용을 상세히 기록한 이 밀서를 재미교포인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당시 간사가 영역을 했고, 이것을 앰네스티 런던 본부로 보냈답니다. 앰네스티는 자체 조사 후에 저를 세계의 양심수로 지정하고, 저의 석방운동을 지원했습니다.”

1991년 1월부터 앰네스티와 국제작가협회(International PEN Club) 회원들이 보내는 격려의 편지들이 외국에서 계속 왔다고 한다. 그들과의 편지 교환은 야생초와 더불어 그가 혹독한 감옥 생활을 이겨내는데 큰 버팀목이 되었다.
촬영에 협조한 그에게 다큐멘터리 상영을 계기로 앰네스티 모금 운동을 할 계획이니, 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이 날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여권을 발부 받아 유럽에 도착했고, 감옥에 있는 동안 편지로 우정을 나눈 지인들을 만나기도 했다. 모금 행사 참가 후에는 못 다한 공부를 영국에서 다시 할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 마흔 다섯의 나이에 그는 ‘영국 임페리얼 대학교 자연과학대
학 지속가능농업학과 농업생태학 석사과정’ 을 엠앰네스티와 대학의 장학금 후원으로 마쳤다. 유럽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면서 감옥에서 싹 튼 그의 생명사상은 생태공동체운동으로 발현된다.

생명사상이 생태공동체운동으로 발현

21세기에는 인간의 자율성 이념과 그가 추구하는 생태중심사상 사이의 연대가 중요한 화두가 되지 않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현재 우리 사회는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적인 혼재 상황에 있습니다. 압축 성장의 역사 때문이지요. 복잡하게 서로 얽혀있는 문제들이 단계적으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생태와 환경문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실현 후에 생태계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올바른 해결방식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누적적인 문제를 끌어안으면서 21세기에 가장 중요한 생태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식물에도 생장점이 있듯이 한 시대의 화두는 여타의 모든 부분들의 성장과 발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인간의 자유라는 가치는 아주 소중한 것인데, 이 가치들이 현재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보는 듯 했다. 그 중에서도 환경문제는 이들 가치들의 존립 여부를 가늠할 문제라는 것이다. 생태계가 없는 인간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21세기의 화두는 단연 생태와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운동을 시작했으나, 이 시대의 누적적인 문제를 포괄하여 해결할 수 있는 생태공동체운동에 이제는 전념하려고 합니다. 지역 중심의 생태 공동체를 만들어 민주주의와 복지를 실현해 보고자 합니다.”


21세기의 화두는 생태와 공동체

생태공동체운동을 하는 그가 한국의 인권상황의 후진성을 대표하는 ‘보안관찰법’에 의거한 거듭되는 보안관찰 처분은 부당하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최근에 승소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이런 승리는 아마도 생명사상을 통해서 마음을 다스리며 사회의 변화를 추구한 그이기에 가능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보안관찰법’이 악법이라는 생각에서 그것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전투적 방식을 택하지 않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 법의 위헌성과 부당성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여 승소했다. 이 승소는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반인권 악법의 개정 및 폐지에 아마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다.
올해 안에 시골로 다시 내려가 생태공동체를 직접 만들고, 자리가 잡히면 야생초 편지 후속편을 집필하여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워 주고 싶다는 희망을 그는 내보였다. 그로부터 머지않아 인간과 자연이 함께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하모니가 들려올 것 같다.

 

다른 생명체와 조화롭게 사는 겸손함

황대권 씨는 국가 권력의 노골적인 폭력에 의해서 한 개인이 얼마나 무기력해질 수 있는가를 처절하게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인간 사회에 대한 물음의 지평을 넘어 야생초에게서 자신과의 동질성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 체험을 통해 그는 생명의 소중함은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이름 없는 들풀에게도 확장되어야 함을 보여 준다.
그의 삶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진정한 위대함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몇 백 년 전부터 스스로를 우주에서 유일하게 존엄한 존재이고 가장 가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인간. 자신 이외의 모든 존재, 즉 자연세계를 오로지 자신의 물질적 풍요로움을 위해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은 대상으로 여기며, 이를 지배하면서 우월성과 위대성을 증명하려는 오만함에 빠져 있는 인간. 그 결과 무차별적으로 자연을 파괴한 인간은 이제 자신의 존립 여부를 염려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황대권 씨는 인간의 진정한 위대함이란 여타 생명체와의 일체감 속에서 그들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겸손함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가장 심오한 것을 생각해 본 사람은 가장 생명적인 것을 사랑한다.”는 독일의 시인 횔더린(J. Foelderlin)의 말을 떠올려 본다.

<황정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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