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쓰는 민주주의
10․28 건대항쟁의 현장을 찾아 -농성학생 대표 정현곤 씨 동행취재 태풍 ‘매미’가 지나가고 때늦은 더위가 찾아왔다. 부신 햇살을 받아 번득이는 건국대의 일감호 표면은 잘 닦은 유리 같았고 호수 주변을 산책하는 학생들의 얼굴은 모처럼 햇빛을 받아 광합성 작용을 하듯 싱싱하다. 등나무 그늘 아래 나무의자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는 학생들 틈에 끼어 1986년 당시 공안당국에서 공산혁명분자라 규정지었던 정현곤(40)씨를 만났다. 스물 셋의 공산혁명분자는 어느새 불혹의 나이가 되어 있었고, 그래서인지 이제 건국대를 찾아도 담담하다 말하며 살풋 웃는 그에게서 지난 세월의 상처는 쉽게 엿볼 수 없다. 정 씨는 서울대 지구과학과 83학번이다. 건대항쟁 당시에는 서울대 자민투 위원장이었으며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캐나다에서의 조국의 민주화와 인권을 향한 열망 이수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1986년 1월 16일 대통령 전두환은 국정연설에서 86․88을 위한 ‘큰 정치’로써 임기 내 개헌불가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어 법무부는 헌법논의를 빙자한 범법행위에 대해 엄벌하겠다는 방침을 거듭 천명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움직임은 1983년 2·12 총선 후 본격화되기 시작한 직선제 개헌논의를 봉쇄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개헌논의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1986년 2월 4일 서울대학교에서 15개 대학 1천여 명이 모여 ‘파쇼헌법철폐투쟁대회 및 개헌서명운동 추진본부 결성식’을 개최하였고, 12일에는 신민당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으로 ‘1천만 개헌서명운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5일 민..
박정희의 노래들, 과 10월 유신이 벌써 31년 전의 일이지만 내 세대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일 것이다. 1973년에 중학교에 들어가서 197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6년 동안 오직 유신헌법만 배웠고, 체력장의 던지기 종목을 공이 아니라 모조리 수류탄으로 사용했으며, 여학생에게도 사격을 권장한다는 정책에 따라 칼빈 소총으로 사격을 배웠던 세대였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노래는 , , , 같은 것들이다. 그 중 앞의 두 곡은 박정희가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로 거의 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았다.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하면 먼저 가 나오고, 과 가 뒤이어 나오고 나서야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노래의 중요성을 잘 알았던 박정희 박정희야말로 우리나라 대통령 중 노래의 중요성을 매우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을 ..
평범한(?) 사람들의 지구 지키기 * 지구방위기업 다이가드(1999, 미즈시마 세이지, XEBEC) 평범하기로 치면 봉급쟁이만한 것이 있을까요. 한 푼의 세금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유리봉투 월급에 부양가족까지 있게 되면 돈을 버는 목적이 가족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돼버립니다. 끼리끼리 모이면 직장상사를 안주 삼아 술 한 잔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되기도 합니다. 주인공 아카키 슌수케는 ‘21C’라는 보안회사 홍보과 소속의 평범한 샐러리맨입니다. 어떤 날은 회사 전단지도 돌리고, 어느 날은 회사 캐릭터 인형 옷을 뒤집어쓰고 애들에게 풍선을 나눠주기도 합니다. 그가 남다른 점이 있다면 홍보과 소속 거대로봇 다이가드의 조종사라는 것 뿐 입니다. 그나마 다이가드는 전투 목적이 아니라 홍보용으로 제작돼 여기..
“오금 박힌 무릎으로 짚어간 어둠” - 시인 박정만이 부른 井邑別詞 신동호(시인) 삶과 죽음은 공존해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삶이라는 바지 주머니에 죽음을 넣고 만지작거리며 다닌다. 아니, 죽음이라는 머나먼 길을 걷다가 두리번거리며 삶이라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릴 뿐이다. 다만 이것을 달의 뒤편처럼 끝내 보지 못하는 게 인생이다. 그러나 그림자를 이끌며 살 듯 죽음을 달고 다니는 이들이 없지 않다. 일생을 두고 삶과 죽음의 화두를 쫓는 이들도 있으나 본의 아니게 찰나의 깨달음으로 다가가 고통스러운 생을 마감하는 이들 또한 늘 존재한다. 위험과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어쩌면 미래를 보는 일은 고통의 연속일는지 모른다. 만일 과거도 미래도 망각..
한국의 진보적 여성운동과 여성평우회 유영산(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80년대 여성운동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경숙사건’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권신장의 필요성이나 성불평등의 심각성을 사회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80년대를 살았던 동시대인 중에서도 이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이후 세대들은 더욱 이 사건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보아 우리사회에서 이 사건은 잊혀졌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성운동단체 내에서 연대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가사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불평등의 심각성을 이슈화한 계기였다는 점에서 사회적 의미가 더욱 컸다. 그 사건의 중심에는 바로 여성평우회(이하 여평)..
병든 부모를 고국에 두고 돈 벌러 한국에 온 외국인노동자가 눈물을 흘리며 티비 화면에 등장한 식구들을 보고 있다. 수년 째 한국에 와 있는 그가 고향에 있는 가족을 만나길 간절히 바라는 모습이 화면에 어른거리고 그의 소원을 담아 연예인이 이주노동자의 고향을 찾아나선다. 고향을 찾아가는 연예인의 과정은 참으로 눈물겹다.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도 지나야 하고 난감한 현실 문제(비자입국거부 등)에 부딪치기도 한다. 어렵사리 찾은 이주노동자의 고향에서는 이미 부모가 죽어 저 세상 사람이 되다. 가족을 보고 싶다고 프로그램에 신청을 했던 이주노동자가 한줌의 재가 되어 있기도 한다. 요즘 한 방송에 나오는 이주노동자의 애환을 담은 내용이다. 물론 작위적인 면이 있기도 하지만 어쨌든 ‘휴먼다큐’란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
타오르는 활화산, 함석헌 1 함석헌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박정희 군사 독재정권의 막바지에 일어난 ‘3.1구국선언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받고 형 집행정지처분을 받았던 1977년 이후로 기억된다. 당시 이 사건으로 민주화운동의 불꽃이 피어올라 전국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청주도시산업선교회에서 흰 머리와 하얀 수염을 위엄 있게 휘날리며 강연을 통해 청주의 뜻있는 젊은이들의 생각을 바꾸고 있었다. 1930년대 일제의 식민 통치가 극에 달했을 때, 민족교육의 성지인 오산학교에서 역사 선생으로서 집필한 는 한국인이 쓴 최초의 민중역사요, 전체 역사 속에서 민족사를 재해석한 역사서이기도 했다. 함석헌 선생은 위대한 사상가이면서 역사가요, 진리 앞에서 솔직하며 어둠 속에 사는 백성들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란, 어느 시대 어느 노래에서나 단골 메뉴이다. 민중가요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노래는 추석이나 설날 같은 명절 때 더욱 사무친다. 가난 때문에 고향을 등져 도시로 올라온 노동자들이, 명절 전날 선물 보따리를 들고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하는 모습, 그나마 고향에 가지 못하고 잔업을 하는 그 모습, 이것이 우리 노동자들의 명절 풍경이다. 1980년대 초반 돌 작사․작곡의 는 추석 휴가 직전의 들뜬 느낌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내일이면 집으로 간다 오늘만 넘기면 집으로 간다’로 시작하는 첫 구절은, 단지 고향에 대한 그리움만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왜 하필 제목이 ‘오늘만 넘기면’이겠는가. 고향집은, 서울에서의 힘든 노동이 존재하지 않는 곳, 그 고통스러운 삶으로 빠져들기 이..
횃불을 든 사람들 - 영원한 자유인 조영래 3 이제 어느덧 조금씩 타성이 붙어가는 듯하다. 묶여 온 사람들을 바라보는 전율도 이젠 점차로 각질화되어 일상의 무감동에 조금씩 조금씩 압도되어간다. 나로서는 권력을 향유하는 최초의 체험이며… 어쩌면 아마도 마지막 체험이 될지도. 그러므로 이처럼 기이하게 주어진 넉 달의 기회를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가장 맑고 신선한 숨결로 부딪쳐 나아가 최선의 것을 이루어내어야 한다고 마음먹고는 있다. -1981년 12월 검찰청 사법관 시보 시절의 일기 조영래가 실정법의 사슬을 내던지고 다시 세상의 양지로 나온 것은 1980년 1월, 박정희 군사정권이 막을 내린 직후였다. 그해 2월, 수배시절을 함께 한 이옥경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그는 곧바로 사법연수원에 재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