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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 시대 읽기/영화 속 시대읽기

평범한(?) 사람들의 지구 지키기

기념사업회 2003. 9. 1. 14:15
평범한(?) 사람들의 지구 지키기


  * 지구방위기업 다이가드(1999, 미즈시마 세이지, XEBEC)

  평범하기로 치면 봉급쟁이만한 것이 있을까요. 한 푼의 세금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유리봉투 월급에 부양가족까지 있게 되면 돈을 버는 목적이 가족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돼버립니다. 끼리끼리 모이면 직장상사를 안주 삼아 술 한 잔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되기도 합니다. 
  주인공 아카키 슌수케는 ‘21C’라는 보안회사 홍보과 소속의 평범한 샐러리맨입니다. 어떤 날은 회사 전단지도 돌리고, 어느 날은 회사 캐릭터 인형 옷을 뒤집어쓰고 애들에게 풍선을 나눠주기도 합니다. 그가 남다른 점이 있다면 홍보과 소속 거대로봇 다이가드의 조종사라는 것 뿐 입니다. 그나마 다이가드는 전투 목적이 아니라 홍보용으로 제작돼 여기저기 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나타난 미지의 괴물 헤테로다인은 다이가드를 출동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헤테로다인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됩니다. 
  덕분에 회사의 인지도가 높아져 ‘21C’社는 실적이 올라가기 시작하고 헤테로다인 저지에 대해 국가와 계약을 맺기도 합니다. 그러나 ‘괴물 출현’ 즉시 ‘다이가드 출동’은 쉽지 않습니다. 헤테로다인이 나타나면 홍보과 과장은 부리나케 결재를 받으러 다닙니다. 다이가드의 출동을 허락받기 위해서. 책임자 중 한 명이라도 결재를 받지 못하면 출동하지 못하는 다이가드와 그 조종사. 재미있지 않습니까? 지구를 지키는 ‘샐러리맨’

 
  일본식 표현으로 열혈청년인 아카키는 이런 관료주의가 못내 답답합니다. 더군다나 아카키가 다이가드를 조종한다고 해서 특별수당이나 특별대우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2명의 부조종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들의 일상은 회사에서 가정의 일상사로 가정에서 직장생활로 교차합니다. 간부들에겐 지구를 지켰다는 사실 보다 다이가드가 한번 움직일 때마다 드는 비용이 더 관심사입니다. 열심히 지구를 지켰지만 이는 회사의 이익으로 연결될 때만 의미 있는 일입니다. 한편에선 회사의 사장자리를 놓고 암투가 벌어지며, 군대는 다이가드를 소유하기 위해 안달입니다. 뿐만 아니라 괴물 헤테로다인의 정체는 모호합니다. 샐러리맨 아카키는 내부의 관료주의와 음모, 밖으로는 헤테로다인 양쪽과 싸워야 합니다.  아카키의 의협심은 회사의 관료주의와 충돌을 하면서도 동조자를 만들지만 회사의 입장에선 사소한 반항일 뿐입니다. 회사나 군대가 정한 방침은 결정된 대로 수행됩니다. 그게 샐러리맨의 숙명 아닌 숙명이기도 합니다.

  * 지구방위가족(2001, 키무라 사토루, Sunrise)

  가족이라는게 참 묘합니다. 가족만큼 서로를 잘 아는 사람은 없는 듯한데 어찌보면 가족만큼 서로를 모르는 경우도 드뭅니다. 기묘한 이중성입니다. 이런 이중성은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가족만큼 따뜻한 울타리도 없지만, 경우에 따라서 가족만큼 탈출하고 싶은 지긋지긋한 울타리도 없습니다. 가장 위로가 되는 것도 가족이고 서로를 너무 잘 아는 탓에 가장 취약한 점을 후벼 파서 상처를 주기 쉽상인 것도 가족입니다. 이렇듯 온갖 다양한 형태로 교차하는 서로간의 애증을 평생 끈적거리는 진한 ‘피의 인연’으로 엮어, 모두 감싸 안고 있는 것을 우리는 가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이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드는 가족과 혈연이라는 것이 우리 머릿속에 어떤 쟁기질을 해놨는지 꽤나 궁금해지지만 문화인류학, 사회과학, 역사학이 총동원 되어야 가능해 보이는 이 영역은 다른 분들에게 부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 한 가족이 있습니다. 가계부채는 파산 직전, 바람나기 직전의 캐리어우먼 엄마,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완전히 상실한 오따꾸 기질이 보이는 프로그래머 아빠, 사춘기 큰딸, 이 모습을 보고 자란 탓인지 버르장머리 없는 모습으로 자신의 아픔을 표현하는 둘째. 
  해체 직전의 이들 가족이 지구를 지키게 된다면?
  이 엉뚱하고 기발한 상상을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것이 <지구방위가족>입니다. 엄마 아빠가 이혼할 위기에 처한 시점에 느닷없이 외계인으로부터 팩스가 옵니다. 지구를 지키라고. 공짜는 아닙니다. 외계괴물과 한 번 싸울 때마다 보수가 지불됩니다. 빚을 갚을 수 있으리란 희망에 엄마는 계약을 맺지만 이들이 지구를 지키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 가족이 계약을 맺은 직후 개개인에게 카드가 한 장씩 지급됩니다. 괴물과 싸울 때 무장을 하는 변신의 매개체이자, 서로 연락을 할 수 있는 통신수단이기도 합니다. 특히 통신수단으로서의 역할은 단절됐던 이들에게 의사소통 수단으로 작용합니다. 뿐만 아니라 각 가족에게 지급된 장비들은 각각의 역할에 맞춘 것입니다. 아버지는 적을 비롯한 전반적인 상황분석과 전술수립, 엄마는 배후지원 및 무기조달, 큰 딸 가영이는 방어, 막내 태양이는 공격. 4명이 뭉쳐야 무지막지한 외계괴물을 상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당연지사겠죠. 하지만 매번 쉽게 4명이 보조를 맞추는 경우는 없습니다. 
  외계인이 제공한 온갖 무기로 무장했지만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도망쳐서 짐을 싸는 엄마, 엄마의 욕심에 지쳐 싸우기를 거부하는 가영, 싸우자고 엄마와 가영이를 설득하나 땅에 떨어진 권위를 새삼 절감하는 아빠, 울분을 풀듯이 혼자서 괴물에게 덤벼드는 태양이. 이들을 지켜보기 위해 파견된 엘렌은 한숨을 쉬며 말합니다.
  “왜, 이들이죠?”
  처음 이 작품을 봤을 때의 느낌은 ‘기발하다’였습니다. 하지만 계속 보다보면 은근히 기분을 끈적거리게 합니다. 특히 엄마가 자신의 생일날 술에 취한 채 직장 동료에 의지해 걷다 마주친 태양이를 모르는 아이라며 지나칠 때는 조금 잔인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 가족이 지구를 지킵니다. 가족은 매회 여차저차 하면서도 괴물을 물리칩니다. 때론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적자입니다. 괴물과 싸울 때마다 보수가 지급되지만 기본무장 외에는 각종 강력무기에 고가의 가격이 매겨져 있다보니 싸울 때마다 적자입니다. 하지만 강력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이길 수 있는 괴물은 흔치 않습니다. 이쯤 되면 해체에 직면했던 이들을 묶어주고 있는 것은 외계인과의 계약인지, 서로 지겹게 싸우면서도 외면할 수 없는 혈연인 것인지 알 수 없어져 버립니다. 외계인이 지키고자 하는 것도 지구인 것인지 가족인 것인지, 가장 큰 적이 괴물인지 가족들 자신인지, 아니면 붕괴 직전의 위기에 몰린 가족에겐 일상 자체가 괴물인 것인지 괴물의 정체조차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삶을 영위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노동과 노력이 이 사회를 아니 이 지구를 움직이지만 그들은 항상 희생해야 하고 적자를 면키 어려울 뿐입니다. 현재의 평범한 삶은 어찌보면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개개인들이 흘린 피땀 어린 노력은 어디로 다 사라졌는지 몰라 허둥대지만 TV에선 잘사는 사람 투성이 입니다. 뭔가 미몽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 위 두 작품은 그런 미몽의 단편적 표현인지도 모릅니다. 현실이야 말로 정말 괴물일지도 모르죠.
 

글_김덕영
1965년 서울 출생
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외대, 상명대, 중앙대 등에서 영상역사학 및 영상 아카이브 관련 강의를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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