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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시절’에 이런 영화 한편을…비관하지 않고 평화와 희망을 노래한다 본문

문화 속 시대 읽기/영화 속 시대읽기

‘우울한 시절’에 이런 영화 한편을…비관하지 않고 평화와 희망을 노래한다

기념사업회 2003. 5. 1. 11:41

영화로 보는 세상 : ‘우울한 시절’에 이런 영화 한편을…

비관하지 않고 평화와 희망을 노래한다

곽 영진(영화평론가)

이라크사태 이후 시리아, 북한 등지로 확전의 불길이 옮겨 붙을까 예의 주시하는 가운데 전 세계 반전의 물결이 지속되는 요즘. 미국의 장편 기록영화 <볼링 포 콜럼바인 Bowling for Columbine>의 한국 개봉은 폭력을 혐오하고 평화를 갈망하는 영화 팬들에게 정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볼링…>은 지난 달 본 지면에 서술한 바바라 트렌트의 <파나마 사기극>처럼 그 자체로 전쟁영화는 아니지만 총기나 무기의 파괴성, 반사회성을 고발한 일종의 반전영화다. 지난 3월 23일 아카데미영화제 시상식장에서 “부시, 부끄러운 줄 아시오!”란 거친 멘트로 다큐멘터리 부문 작품상 수상소감을 대신하며 전 세계에 선풍을 일으킨 마이클 무어 감독. 시민운동가이기도 한 그는 대표작 <로저와 나>(1990)로 영화사에 기록되는 거물이다.

“부시, 부끄러운 줄 아시오!”

<볼링…>은 1999년 4월 20일 미국 콜로라도주에 있는 콜럼바인 고교에서 평소 ‘트렌치코트 마피아’라고 자칭하던 에릭과 딜런이 9백여 발의 총알을 날려 동료학생 열둘에 교사 한 명을 죽인 희대의 총격사건을 시작으로 하고 있다. 거의 특별한 동기를 발견할 수 없었던 이 살인행위에 부상자도 수십 명이 발생했으며 범인들은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영화는 미 공화당의 든든한 후원단체인 전국총기협회(회장 찰톤 헤스톤)와 범인들이 평소 즐겨들은 악마주의 로커 마릴린 맨슨 등을 취재하고 비판한다. 그리고 결국엔,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는 최고의 민주주의국가인 척 하지만 광기와 폭력의 역사로 얼룩진 나라 미국을, 그리고 미국인들 내면에 깔려있는 저 엄청난 ‘두려움의 문화’를 샅샅이 해부해 낸다.

역대 아카데미영화제는 자유주의 진보색이 강한 다큐멘터리 부문과 달리 주류인 극영화 ‘부문’은 대체로 보수적이다. 미국사회 이면의 어둠과 광기를 다룬 <미드나잇 카우보이><대부><플래툰> 등이 작품상과 여타의 상을 수상한 전례가 있었지만 말이다. 올해, 2차대전의 참상을 그린 <피아니스트>(국내 1월 개봉 화제작)에게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이 돌아간 사실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수상 직후 “이번 75회 영화제 위원회가 바로 반전 여론을 반영한 결과다”라는 모 일간지의 보도와 해설이 있었다. 같은 날 그 기사와 같은 취지로 TV방송국 저녁 9시뉴스에서 필자에게 인터뷰 요청이 있었는데, <피아니스트>가 반전 영화도 수준 높은 예술영화도 아니라는 판단 때문에 ‘오보’의 재발을 막은 적이 있다. 이러한 나의 판단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유대인이며 또 소녀 성추행 사건 전력이 있다는 영화 외적인 사실과는 전혀 무관하다. (미국 내 당시 사건으로 해외 도주한 폴란스키에게 아카데미는 면죄부를 준 것이나 진배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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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는 유대인 홀로코스트(대학살)를 다룬 진부한 소재의 영화다. 바르샤바의 게토(유대인 강제거주구역)에서 살아남은 폴란드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라프 스필만의 실화를 옮긴 대작 전쟁드라마다. 영화는 부드러운 심성과 상업적․예술적 재능이 많은 ‘희생양’ 유대민족에게 인류역사가 마치 큰 부채라도 진 것 같은 뉘앙스를 교묘히 풍기고 있다. 그리고 별반 개성 없는 또 하나의 ‘유대인 재난물’로서 하필이면 이 시점(팔레스타인의 참상과 이스라엘의 폭력이 극에 달한 2001-2년)에 제작되었다. <피아니스트>는 이런 점에서 정치적 공정성(political correctness)에 문제가 있으며 반전영화로 평가하는 데에도 큰 흠이 있다. 유대인들은 인류사의 단순한 희생자, 피해자이며 과거에도 현재에도 큰 반성이 필요하지 않은 것인가? <피아니스트>는 할리우드와 아카데미의 구미에 딱 들어맞는 영화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물속의 칼><차이나타운><테스> 등 예술영화 만들기에 일가견이 있는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주류 영화의 문법과 형식에 충실한 ‘낡은 영화’로 지어냈다. <소피의 선택>이나 <적 그리고 사랑이야기>와 같은 다른, 개성 넘치는 유대인 수난극(?)에 비해 수준도 재미도 크게 떨어진다.

(공교롭게도 같은 2002년에 제작되었고 국내에서도 비슷한 시기 개봉된 동명의 아트필름과 혼동하지 마실 것. 특히 비디오가게에서…. 올 깐느 심사위원대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을 휩쓸며 기염을 토한 이 또 다른 <피아니스트>는 ‘악동’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문제작이다. 아카데미가 결코 사랑할 수 없는, 매우 모던하고 또한 컬트적인 작품이며 당신의 취향이나 ‘지성’과 대립할 수도 있다. 뒤틀린 인간관계가 낳은 비극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보고서!)

두 개의 <피아니스트> 그리고 반전연대

1․2차 이라크전의 핵심 원인은, 미국민을 제외한 인류 대다수가 믿고 있듯이, 인종․종교․정치체제의 문제나 더욱이 대량살상 무기 및 테러재발 원인의 제거에 있다기보다 21C ‘국제 에너지 대전’ 시대의 바로 석유자원 확보에 있었음이 증명되었다. 더불어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통제권을 확보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미국 내의 기독교 근본주의, 광신적 애국주의, 전쟁 중독증, 친(親) 유대주의 등의 정신적․이데올로기적 동기가 미친 영향은 중요하긴 하지만 핵심권 밖의 원인에 불과한(?) 것이다.

딴따라나 일반상품으로서의 영화가 아닌, 예술과 문화상품으로서의 영화를 옹호하는 우리 영화인 그리고 영화 팬은 왜 반전연대에 열을 올리는가? 우리들에게 문화나 예술은 억압․차별․소외의 범주에 대항하는 자유정신과 평화의 지대이자 수단이며 영화는 인간의 삶을 가장 구체적이고 시각적으로 다루는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전쟁과 그 여파 그리고 경제침체로 나라 안팎이 무척 소란스럽고 부대끼는 우울한 시절. 이 ‘잔인한 4월’의 끝 무렵 좋은 영화, 재미있는 영화들이 집중적으로 쏟아져 나와 가족의 달이기도 한 5월의 극장가를 화려하게 수놓을 것 같다. 먼저 가족물로서 <동승> <선생 김봉두>에 이어 이민용 감독․차인표 주연의 <보리울의 여름>과 한국화의 이미지로 눈길을 끄는 애니메이션 <오세암>이 가능성을 엿보고 있는 가운데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초(超)대작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元靈공주)>의 파상적 공세가 예상된다. 애정물로서는 토드 헤인즈 각본․감독, 줄리언 무어(베니스 수상) 주연의 <파 프롬 헤븐>과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가 문성근, 배종옥, 박해일 주연의 <질투는 나의 힘>과 경합할 것이다. 올해 최고의 기대작으로서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봉준호 감독, 송강호․김상경 주연의 <살인의 추억>은 과연 어떤 기록을 낳을지 영화 팬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글_ 곽영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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