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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활화산, 함석헌 1 본문

인물/열사 이야기

타오르는 활화산, 함석헌 1

기념사업회 2003. 9. 1. 13:22

타오르는 활화산, 함석헌 1



  함석헌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박정희 군사 독재정권의 막바지에 일어난 ‘3.1구국선언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받고 형 집행정지처분을 받았던 1977년 이후로 기억된다. 당시 이 사건으로 민주화운동의 불꽃이 피어올라 전국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청주도시산업선교회에서 흰 머리와 하얀 수염을 위엄 있게 휘날리며 강연을 통해 청주의 뜻있는 젊은이들의 생각을 바꾸고 있었다.
  1930년대 일제의 식민 통치가 극에 달했을 때, 민족교육의 성지인 오산학교에서 역사 선생으로서 집필한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한국인이 쓴 최초의 민중역사요, 전체 역사 속에서 민족사를 재해석한 역사서이기도 했다. 함석헌 선생은 위대한 사상가이면서 역사가요, 진리 앞에서 솔직하며 어둠 속에 사는 백성들에게는 빛이었다. 그 분의 사상 세계는 무한이 넓고 커서 동양과 서양이 따로 없었다. 어둡고 고통스러웠던 시대에 그분의 씨알 사상이라는 독특한 생명의 세계가 한국의 정신계 속에 열리게 된 것이다. 그는 강연 때마다 전태일 열사에 대한 이야기를 강조하고, 한국 민중사를 힘주어 말하기도 했다.

  한국의 간디 
  함석헌은 20세기 한국의 가장 독특한 기독교 사상가이자 재야 민주화와 인권운동의 선구자였다. 그의 생애(1901년~1989)가 20세기의 시작과 때를 같이 한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그는 확실히 20세기 한국의 지성사에서 가장 눈여겨볼 만한 인물의 한 사람이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때 그는 혁명가이기도 했고 선동자이기도 했다. 1970년대를 통해서 함석헌은 민족의 살아 있는 양심의 소리 ‘싸우는 평화주의자’로 일컬어졌다. 서구 언론은 ‘한국의 간디’로 보도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만났던 나의 스승 서남동, 안병무, 문동환, 김찬국, 송건호, 박현채, 이우정, 리영희 교수 등은 항상 장준하와 함석헌 선생을 이야기 했다. 그 분들에게 학문하는 것을 배웠던 나는 목사이지만 민중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어떤 목회를 하고 있는지 반성 할 때마다 함석헌 선생을 떠올리며 앞의 스승들을 생각하고는 했다. 함석헌 선생이 간디의 생애를 통해서 그의 무저항비폭력주의 사상을 언급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매우 큰 감동을 받았다. 대영제국의 인도 식민통치에 대한 간디의 시민불복종운동은 대단한 것이었다. 강연할 때 그는 언제나 쉽게 말했고 그래서 알아듣기가 편했다. 그는 대중의 입장에서 쉽게 ‘씨알의 소리’가 무엇인지를 말했다. 그는 씨알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씨알이라고 역설하면서 “믿을 것은 씨알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성서조선' 창간 동인들과 함께 (윗줄 오른쪽이 청년 함석헌 1927. 2)

 
  새로운 신앙에 눈 떠
  함석헌은 평안북도 용천에서 1901년에 태어났다. 1906년, 기독교계 덕일소학교에 그리고 1916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7년, 17세의 나이로 황득순과 결혼하였다. 1919년(19세)에는 3.1운동에 참가했으며, 1921년에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이승훈과 유영모 선생을 만났다. 1923년에 동경 유학생활을 시작한 그는 그 해 9월에 일어난 동경대지진의 희생물이 되어 첫 감옥생활을 경험한다.
1924년에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 그는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이자 비평가인 우찌무라를 만나게 된다. 일본 근현대의 지식인들과 작가들의 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우찌무라는 특정 교단이나 교회에 속하기를 거부하면서 성서의 믿음대로 살고자 했다.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는 우찌무라의 무교회 운동에 깊은 영향을 받은 함석헌은 신앙을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을 갖게 되었다. 1928년에 귀국하여 오산학교 역사교사가 된 그는 1930년(30세)에는 오산학교ML당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으며, 일제의 만주침략이 시작된 1932년에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의 글을 썼다. 
  1939년에 오산학교에서 추방당한 함석헌은 한동안 정주에서 농사를 짓고 과수원을 운영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이어나가는 한편 일요 공부 모임을 창설하여 오산학교 시절의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함석헌은 특히 세 분야에 노력을 기울였는데, 첫째는 교육이고 둘째는 기독교신앙, 셋째는 농사일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공산주의적 및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녔다는 혐의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1년간 또 다시 옥고를 치르는 빌미가 되었다. 이 사건의 충격으로 그의 부친이 그 해에 돌아가시기도 했다. 1942년에 창간했던 <성서조선>은 158호를 끝으로 폐간 당했고, 이 때 함석헌과 김교신을 포함하여 11명이 다시 체포, 구금된다.
  감옥에서 많은 독서를 한 함석헌은 특히 러스킨과(John Ruskin)과 톨스토이(leo Tolstoy)의 저서를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3선개헌 반대 시위 중 경찰의 제재를 받는 함석헌 (1969. 9)


  러스킨과 콜스토이 그리고 노자와 장자
  러스킨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성경 공부를 통해서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9세기 영국 사회에 비전과 희망을 제시한 사회적 비평가였다. 옥스퍼드대학 순수예술학과 교수였던 러스킨은 미술에 심취하고 예술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고자 했다. 그러나 함석헌은 러스킨의 이런 입장보다는 러스킨의 사상과 학문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톨스토이는 인도주의적 신앙에 대한 믿음을 통해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인간의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고 자연과 인간애를 깊이 느끼게 하는 <부활>이나 <전쟁과 평화> 등 톨스토이의 작품은 많은 감동을 안겨 주었다. 이 두 사람의 사상을 바탕으로 반야경, 법화경, 무량수경, 금강경등 다양한 불경과 <노자>와 <장자>도 열심히 읽었다. 기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당시 불교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같은  과정을 거치며 그는 한때 심취했던 우찌무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길을 걷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자유권은 지상의 어떤 권력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하고, 다른 인간이 제정한 어떤 입법상의 권위 아래 놓여서도 안 되며, 오직 각자의 천부적인 법에 따라야 한다. 사회 속에서 인간의 자유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진 국민의 동의에 의해 확립되어야 하고 어떤 법의 구속이나 입법상의 지배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모든 일에서 각 개인은 스스로 일을 결정할 수 있도록 자유스러워야 한다.”
<John Locke, 두 정부론(Tow Treatises on Government)> 

  함석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국의 정치사상가 로크의 말을 인용해 강연을 하면서 이 말을 강조했다.

  사상가, 문필가, 시인
  신경림 시인은 함석헌을 시인이라고 했다. “함석헌 선생의 글이 주는 감동의 원천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내용에 있다. 스스로 민초, 풀을 자초하면서 현실의 온갖 거짓과 그릇됨을 깨어 부수려는 그 치열한 역사의식과 올바른 현실 인식에 있다.” 그는 함 선생의 글 중에서 사상계에 실렸던 <할 말은 있다>라는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고, 그래서 함석헌 선생에 대해 문필가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했다. 그의 연설을 듣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글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의 글을 읽으면 그것이 바로 그의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수평선 넘어>라는 책에 ‘함석헌 시집’이라고 찍혀 있는 시집을 보았다. 그의 시중에 이런 시가 있다.

거친 들 저문 날에 저 아씨 어이 우노?
임 주신 사랑 선물 어디다 떨어친지
이름도 알 길이 없어 오도 가도 못하오.

제 목에 걸린 진주 제 모르고 찾는고나.
하늘 땅 뒤지기로 찾을 길 있사오리.
아씨여 울지 마소서 가슴 만져 보소서.

잃을까 걱정하셔 내 몸속 넣주신걸
둔한 맘 몰라 보고 멀리 찾아 있었구나
차라리 안 잃었던들 이대도록 기쁘랴.
<잃어진 진주>전문

3.1민주구국선언 당시 투표용지를 불태우고 있다.


  신경림 시인의 주석에 의하면 이 시는 한 여인이 [임 주신 사랑 선물] 진주를 잃고 울고 있는데서 시작한다. 여기서 보면 이미 잃어버린 진주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제 가슴에 있는데 찾는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 진주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선물이요, 참으로 귀중한 보배다. 곧 하나님은 내 안에 있거나 밖에도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은 구원이 교회 안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진리는 잃어버릴 것이 없는 것이다. 진주는 곧 진리요, 자유요, 정의요, 사랑이다. 교훈적인 시이지만 민중을 깨우치는 지혜가 담겨있다.
  <수평선 넘어>에 수록되어 있는 시들은 대체로 길다. 그 긴 시중에서 이 짧은 시가 많은 의미를 내포하면서 삶을 새롭게 한다. 신경림 시인은 시를 언제나 삶의 진실성에서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런 만큼 민중적 서정성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를 읽고 감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질적으로 보자면 함석헌은 가난한 사람이었다. 잃을 것도 지킬 것도 없는, 그야 말로 맨주먹밖에 가진 것이 없는 서민이었다. 언론인으로서의 함석헌을 이미 고인이 되신 송건호는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커다란 충격을 주고 저항의 글들을 수도 없이 쓰셨으며 결코 비겁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의 산문집<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을 읽으면서 참으로 많은 감동을 받았다. 함 선생은 ‘자유는 감옥에서 알을 까고 나온다.’고 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찾고 싶으면 <감옥으로 들어가라>고 가르친다. 이같은 가르침은 우리들로 하여금 선생의 명령을 따르게 했다. 수많은 지식인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위해서 민중해방을 위해서 감옥을 선택하지 않았던가.

송광사 불일암에서 법정스님과 함께(1975)

 

  이념의 혼란속에서 나온 '사상계'
  다시 1945년으로 돌아가 한반도에 해방이 찾아 왔을 때의 선생을 만나보자. 해방은 식민지 조국을 되찾게 했지만 한반도에 또 다른 이념의 장벽이 세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남한은 미군이 들어와 미군정을 실시하였고, 북한은 소련의 영향권 아래 흡수되었다. 그로부터 나라는 혼란의 시기에 접어들었고, 좌와 우의 이념적 갈등이 첨예화 되었다. 
  미국식 자본주의와 소련식 공산주의를 이식받은 남북한의 정치적, 군사적 갈등은 깊어만 갔다. 결국은 미소에 의해서 나라가 분열되었다. 이념의 갈등 때문에 원수가 되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하는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제주도에서는 4․3항쟁의 불길이 타올랐고 여수와 순천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북쪽에서는 신의주 사건이 일어났다.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대립이었다. 
  황석영의 <손님>을 보면 그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그 책을 읽어보면 함 선생의 고민도 알게 된다. 일본군이 떠난 한반도 여전히 일본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모든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남한은 친일파의 영향 아래 있었던 반면 북쪽은 친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그 때 수많은 사람들이 북을 떠나 남한으로 내려왔다. 기독교내에 친일파들이 거의 남쪽으로 내려와 종교계의 거물이 되어 보수화를 부채질하였고 독재자를 지지하는 반공의 기독교가 되어버렸다. 세상이 썩을 대로 썩어 독재자의 횡포가 극에 달했을 때 깨어 있는 사람, 함석헌은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을 하고 다녔다.


  1950년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잡지는 월간<사상계>였다. 함석헌은 1956년 <사상계>에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글을 기고했다. 이 글로 인해 <사상계>는 10만부 이상이 팔렸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승만 정권과 한국교회에 대한 풍자적 비판의 글을 발표함으로써 함석헌을 유명한 언론인으로 만들었다. 이때 그의 나이 55세였다. 그 당시에는 함석헌의 글을 읽지 않은 대학생이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반면에 보수적인 기독교인들과 자유당 인사들은 함석헌을 비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를 빨갱이 좌경 용공분자로 매도하였다. 하지만 그는 <사상계>에 줄기차게 글을 발표하였다.

“우리나라 역사는 벙어리 역사다. 무언극의 역사다. 이 민중은 입이 없다. 표정이 없다. 사람인 이상 입이 없으랴만, 있고도 말을 아니하고 자라온 민중이다. 사람인 다음에야 속이 없으랴만 그 속을 나타내지 않고 온 사람들이다. 할말이 없어서 일까? 아니 있다면 세계 어느 나라 민중보다 할말이 많을 것이다. 입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을 가슴에 사무치게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발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천년 역사라면서 민중의 글자가 생긴 것은 겨우 오백년 전이요. 순수한 민중문학이 없는 민족, 민권의 발달은 전혀 보지 못한 나라.....”
1953년 사상계 3월호 [할말이 있다]에서

  그는 이제 전국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강연을 다니면서 많은 젊은이들에게 역사를 말하고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가르치며, 독재에 저항하고 투쟁할 것을 서슴없이 주장하였다.


글 김창규

1954년 충북 보은 출생
시인 목사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시집 <푸른벌판>,<그대 진달래꽃 가슴 속 깊이 물들면>,<슬픔을 감추고>

사진도움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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