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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을 든 사람들 - 영원한 자유인 조영래 2 본문

인물/열사 이야기

횃불을 든 사람들 - 영원한 자유인 조영래 2

기념사업회 2003. 7. 1. 15:11
횃불을 든 사람들 - 영원한 자유인 조영래 2


저 황홀한 불꽃을 보아라
저 참혹한 사랑을 보아라
저 위대한 분노를 보아라
아아 불길 속에 휩싸이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외치는
저것은 죽음이 아니다
저것은 패배가 아니다
저 피
저 눈물
저 울부짖음 속에서
싸우는 노동자의 강철 같은
심장을 보아라
-장시 「노동자의 불꽃 아아 전태일」 중에서

마치 80년대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시구를 연상시키는 이 시는 놀랍게도 1970년대 작품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이 조영래의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1977년 가을, 전태일 열사 7주기에 맞춰 발표된 이 시는 최근까지 그 필자가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안목이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끈질긴 주목을 받아왔다. 민족문학작가회의 홈페이지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문예운동사’를 연재하고 있는 소설가 박태순은 필자 미상의 이 장시가 ‘70년대 민중문학 작품의 최고 걸작 중의 하나’라고 단언하고 있다.
1970년대 노동문학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전태일의 ‘수기’와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이 한국문학사에서 정당한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 현실을 개탄했던 박태순이 이 장시의 필자가 조영래라는 사실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전태일의 7주기가 다가오자, 조영래는 전태일이 생전에 살던 쌍문동 무허가집 뒤켠의 ‘마당극 하기에 딱 좋은’ 공터에서 노동자들에게 읽힐 생각으로 이 16쪽짜리 집체낭독시를 집필했다고 한다.


노동자의 불꽃 아아 전태일 
장시 「노동자의 불꽃 아아 전태일」은 유신 정권의 강도 높은 탄압 속에서 극한투쟁을 감행해야 했던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잠자고 있던 지식인 사회의 양심을 두드려 깨우는 북소리였다. 조영래를 알려면 『전태일 평전』을 읽으라고 장기표는 말했다. 마찬가지로, 전태일 분신 이후 가장 순수하고도 격렬하게 타올랐던 70년대 한 청년운동가의 시혼(詩魂)을 알고 싶다면 장시 「노동자의 불꽃 아아 전태일」을 읽어 보아야 하리라.
전태일이 분신한 것은 1970년 11월 13일이었다. 노동문제가 아직 심각한 사회적 화두로 부상하지 않았던 그 무렵, 전태일의 분신이 이 사회에 던진 파문은 엄청났다. 특히 그것은 조영래를 뒤흔들었다. 그때, 조영래는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법고시에 패스하여 변호사가 되겠다는 그의 생각은 기득권층에 편입해 들어가고자 하는 일반적인 신분 상승 욕구와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의 이런 결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다. 인권변호사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당시의 운동 환경에서 ‘사회활동의 기반을 가지고 영속적으로 운동을 하기 위해’ 사시를 택한 조영래의 결심은 하나의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 파격이야말로 가장 ‘조영래다운’ 것이었다. 조영래에게 있어 사법시험 합격이란 어쩌면 훗날 민청학련 사건으로 6년 동안 도피생활을 할 때 틈틈이 공부하여 따두었다는 ‘환경공해 기능사’, ‘보일러 기능사’ 자격증과 같은 의미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타인의 시선이나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웠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실제로 그는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사시 밖의 세계에 관심을 기울였고, 3선 개헌 반대운동 등 학생운동의 막후에서 각종 사건에 개입하고 투쟁을 조직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전태일 사후에 그가 보여준 활동은 눈부신 것이었다. 이 사건이 박정희 정권의 추악한 밑바닥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간파한 그는 이것을 즉각 전 사회적인 문제로 제기할 것을 제안했다.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장기표가 전태일의 시체가 안치돼 있던 명동 성모병원에 매달려 있는 동안, 조영래는 학교와 기독교 계통을 들쑤시고 다니며 각계의 논의를 모아 나갔다. 얼마 후 서울대 법대 교정에서 거행된 전태일 장례식은 이른바 ‘노학연대’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사법시험에 합격
전태일의 분신으로 불붙기 시작한 투쟁은 1971년의 부패정권 규탄운동으로 번져 순식간에 서울과 전국의 대학가, 종교계, 노동계, 일반사회단체, 야당과 언론계 전체에 무서운 불길로 확산되었다. 학생, 지식인, 노동자, 농민, 시민, 종교계가 총 연대하는 민주화운동의 새로운 기점이 된 것도 이때였고, 종교계의 사회 참여가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도 이때였다. 조영래의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조직력이 발휘된 것도 바로 이때였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제1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주위의 놀라움은 그가 사법시험을 치르겠노라 선언했을 때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대체 언제 공부했지?’ 하는 것이 공통된 반응이었다. 그러나 장기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조영래 씨가 1학년부터 했으면 아마 2학년 때 합격했을 거요. 조영래는 뭘 공부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입니다. 사법시험이란 게 법조문만 외운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거든. 사법시험도 사물의 이치를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 빨리 합격하는 겁니다.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능력,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 정의가 실현돼야 한다고 하는 깊은 욕구, 조영래가 탁월한 점이 바로 거기에 있어요.

사법연수원에 입소한 조영래에게는 이제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조영래는 그런 상식의 눈을 비웃기라도 하듯, 심재권, 장기표 등과 함께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을 조직하여 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그를 칭찬하는 이도 많았으나, 그의 운동 철학은 철저한 ‘공수신퇴(공을 이루면 몸은 물러나는 것, 功遂身退)’였다. 1990년 12월 27일 시인 김지하가 「시사저널」에 공개한 일화는 조영래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준다.

천주교 원주교구청의 한 방에서 그 무렵 이런 대화가 있었다.
 
“조형, 참 대단하오. 훌륭해!”
“안 듣겠습니다.”
“어찌어찌 일을 해나갔는지 말해주시오.”
“모르십시오.”

조영래는 민청학련 사건 주모자로 분류돼 긴 잠행생활에 들어갔다. (사진은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석방 장면)

 

유신이라는 초헌법적 장기집권 체제를 준비하던 박 정권이 조영래를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1971년은 박정희 정권의 위기의식이 70년대 말만큼이나 고조됐던 해였다. 그해 4월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총 투표수 1천2백42만 표 가운데 6백34만 표를 얻어 가까스로 김대중 후보를 앞질렀다고 발표됐으나, 부정선거의 의혹은 가시지 않았다. 10․15 학원조치로 전국 대학의 74개 서클이 해체되고, 대학생 1천8백 명이 연행돼 그 중 3백 명이 용산에서 머리를 깎여 강제입대 당했다. 조영래, 장기표, 심재권, 이신범 등 4명은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상처에 소금을 넣고 비비는 것 같’은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의 주모자로서 법정에 세워졌다.
1973년, 1년 6개월을 꼬박 감옥에서 보내고 출소한 조영래는 성치 않은 몸을 보살필 겨를도 없이 다시 반유신투쟁에 뛰어들었다. 8월의 김대중 납치사건, 12월의 장준하, 함석헌이 주축이 된 개헌청원 100만 서명운동 등 가파른 정국이 숨 돌릴 겨를 없이 이어지고 있던 때였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대학가의 조짐도 심상치 않았다. 1974년 1월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는 긴급조치 1호가 발효되면서 소위 ‘긴조시대’의 막이 열렸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잠행 
1973년 겨울부터 본격화된 학생들의 조직화작업에서 조영래가 맡은 건 자금책이었다.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분상의 불리함을 안고 있는 그에게 그 일을 권한 건 김지하였다. 위기관리 능력이나 활동의 조직성에서 조영래만한 인물이 없을 뿐더러 자금책이라는 게 ‘사이드’에서 작업하는 일이라 사고가 나더라도 쉽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해가 바뀌자 ‘3, 4월 위기설’이 나돌면서 대학가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1974년 4월 3일 각 대학에는 일제히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뿌려진 유인물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란 생소한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민청학련과 관련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되었다. 민청학련과 관련돼 구속된 인원은 1,024명, 사태는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이철, 유인태 등 학생운동 주동자와 김지하 등 7명에게 중형이 내려졌다. 그해 8월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문세광의 총에 맞아 숨지면서 긴장의 도는 더 높아졌다. 1975년 4월,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된 인혁당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이 전격 집행되었다. 이른바 ‘4월의 학살’이었다.
조영래는 민청학련 사건 주모자로 분류돼 언제 끝날지도 모를 기나긴 잠행 생활에 들어갔다. ‘안보와 성장’, ‘민주와 인권’이라는 두 가치관이 날카로운 대립 각을 이루며 많은 이들을 감옥과 형장으로 몰아세우던 죽음의 시대, 수많은 지식인의 입에 긴급조치라는 재갈이 물려진 침묵의 시대, 그러나 조영래는 침묵할 수 없었다. 훗날 조영래의 글로 밝혀진 ‘김지하의 양심선언’에서 보듯, 조영래에게 민주주의란 ‘침묵에 반대’하는 것이고, ‘자유로운 말’을 뜻하는 것이었다. 침묵에 반대한다는 것은 재갈을 거부한다는 것이고, 그 재갈을 강요하는 유신이라는 거대한 괴물과의 투쟁을 결단하는 일이었다. 그는 자포와 체념에 빠지기 쉬운 암울한 수배의 시간을 또 다른 투쟁의 기회로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조영래에게 전태일은 거대한 노동담론이자 전생을 다해 풀어야 할 화두였다.


노동자 전태일과 만나다 
그러나 수배자 신분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조영래는 자신을 불살랐던 한 청년을 떠올렸다. 살아 있는 모든 자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친 사람, 조영래에게 있어 전태일은 거대한 노동담론이자, 전 생을 다해 풀어야 할 화두였다. 조영래는 『전태일 평전』 집필에 착수했다. 집필은 치밀하고도 집요하게 이루어졌다. 기초 작업을 했던 장기표에게 자료 일체를 넘겨받았고, 수시로 이소선 어머니를 만나 구술을 받아 적었다.
그는 전태일이라는 젊은 노동자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스스로 전태일이 되어 허리를 펼 수도 없을 정도로 낮은 평화시장 다락방 작업대에 앉아 보기도 했고, 열 살을 갓 넘긴 여성 노동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전태일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노동 현실의 여전한 현장을 봤다.
활화산 같은 뜨거운 열정을 가진 청년 운동가와 몇 줌의 차디찬 재로 남은 청년 노동자는 이렇게 각각 삶의 이쪽과 저쪽에서 만나 평생을 떨어질 수 없는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개입하여 서로를 창조했고, 진화를 거듭해 나갔다. 그것은 믿기 어려운 ‘화학 작용’이었다. 3년 후, 평전을 탈고한 조영래는 그 책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전태일에게서 ‘가장 인간적일 때 가장 진보적이 된다’는 명제를 배우게 된다.”
완성된 『전태일 평전』은 몰래 일본으로 보내져 출판되었고, 국내에서는 1983년에야 비로소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노동 문제에 눈뜨고, 노동 현장에 투신하고, 투쟁의 어떤 결단을 내리는 것으로 전형화되었던 70년대 이후의 학생운동에서 『전태일 평전』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영래는 한번도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엄혹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조영래는 끝내 자신이 필자임을 밝히길 사양했고, 그의 죽음이 임박하자 출판사 쪽이 일방적으로 ‘조영래 지음’으로 고쳐 출판했다. 그러나 조영래는 자신의 생전에 이 사실이 알려지기를 거부하기라도 하듯 개정판 발간을 열흘 남짓 앞두고 훌훌 세상을 떠났다. 개정판이 세상에 나오자, 사람들은 그를 ‘법을 아는 전태일’이라 불렀다.

'김지하의 양심선언' 집필 
조영래가 수배 시절에 집필한 또 하나의 작품이 있으니, 바로 그 유명한 ‘김지하의 양심선언’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김지하 시인 스스로 조영래의 작품임을 밝힌 이 문건은 30대 김지하의 가장 빛나는 산문 가운데 하나로 꼽혀 왔던 것이다. 1976년 박정희 유신 정권은 ‘인혁당은 허위’ 발언과 옥중메모의 ‘용공성’을 이유로 김지하를 ‘빨갱이’로 몰아가고 있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감형되어 풀려나온 김지하가 재구속되어 사형될 위기에 처하자, 조영래는 민주화운동 전체를 사형선고로부터 건져 내야 한다는 위기의식으로 이 문건의 집필에 착수했다고 한다. 옥중의 김지하와 수배 중인 조영래의 깊은 교감으로 이루어진 이 문건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조영래의 생각인지를 밝히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듯싶다.
 
그 글은 조영래 씨의 손에 의해 씌어졌지만, 김지하 씨의 사상과 무관하지는 않아요. 김지하 씨의 생각도 많이 들어가 있다고 봐야죠. 그보다 내가 정말 조영래 씨를 탁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시대에 어떻게 그런 글을 기획하게 됐을까 하는 점입니다. 영문 번역판까지 국외에 배포해서 촘스키, 사르트르 같은 사람들도 관심을 가졌잖아요.
-‘김지하 양심선언’에 대한 장기표의 술회

<계속>

조영래(趙英來)

1947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1965년 서울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한일회담 반대, 삼성재벌 밀수 규탄, 6․7 부정선거 규탄, 삼성 개헌 반대, 교련 반대, 공명선거 쟁취 등을 위한 학생운동을 주도하였다. 1969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후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중에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이 발생하여 전태일 정신 계승사업에 진력하였다.
1971년 2월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그 해 10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 6월을 복역하고 만기 출소하였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로 수배되어 6년 가까이 피신 생활을 하였다. 피신 생활 중에도 민주화운동에 주력하였고, 특히 3년에 걸친 각고 끝에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였다.
1980년 수배 해제 및 복권되어 1982년에 사법연수원을 수료하였다. 1983년 변호사로 개업하여 시민 공익 법률상담소를 개설한 이래, 1984년 망원동 수재사건 변론, 1985년 대우어패럴 사건 등 각종 노동사건 변론,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이경숙 사건(여성 조기정년체 철폐 문제) 등 변론, 대한변협 인권보고서 집필, 1987년 보도지침 사건과 박길래 사건(상봉동 진폐증 보상 문제) 변론을 담당하는 등 노동․빈민․공해․학생 사건 등과 관련된 인권 변호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밖에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동아일보 객원 편집위원, 문화방송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를 역임하는 등 언론 매체 쪽에서도 활발한 문필 활동을 벌였다. 1990년 9월 초 폐암 3기 진단을 받고 투병하였으나, 그 해 12월 12월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운명하였다.



글_김기선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시립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한 뒤 평전 작가로 일하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열사전집 중 『전태일』․『김진수』․『최종길』 편을 썼으며, 현재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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