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함께쓰는 민주주의

사상(思想)의 길라잡이 리영희(李泳禧) 2 본문

인물/열사 이야기

사상(思想)의 길라잡이 리영희(李泳禧) 2

기념사업회 2002. 12. 1. 17:27

사상(思想)의 길라잡이 리영희(李泳禧) 2



<특별실로 오라는 전갈이 왔다. 다과를 차려놓은 탁자 저쪽에 신사복을 입은 쿠데타의 주인공이 앉아 있다가 일어나며 기자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이 평균적 체온보다 차가왔던 촉감이 기억에 남아 있다. 사진으로 보던 인물과의 첫 대면이다. 첫인상이 너무나 왜소하고 권위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훈장을 줄줄이 가슴에 달고, 별들을 좌우로 죽 거느렸을 때조차 나는 그 군대식의 ‘꾸며진 권위’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터이다. 군대와 군인의 허상과 진상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몸에 그 허식의 상징을 걸치지 않은 평복의 권력자는 더욱 초라해 보였다. 나는 경의가 우러나올 만한 이렇다할 근거를 찾지 못한 채 초대면의 행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생각했다. 나뽈레옹도 훈장을 안 차면 저 정도의 인물이었을까?>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3학년에 편입한 일본육사를 3등으로 졸업한 황군 소위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곧 박정희(朴正熙)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이다. 5.16 쿠데타가 일어난 해 11월,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였다. 동아일보 권오기(權五琦), 조선일보 김인호(金寅昊) 기자와 함께였는데, 이승만(李承晩)정권 때의 부패 타락한 기자는 배제한다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의 느낌을 『역정(歷程)』에서 읽어본다.
<나는 박정희 의장의 케네디 대통령 방문에 수행하면서 마치 이조왕조의 조공(朝貢)사신을 따라가는 통신원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태자책봉 때마다 ‘대국(大國)’의 승인을 얻으러 연경(燕京) 가던 사대주의 행사의 목적지가 와싱톤으로 바뀐 것뿐이 아닌가! 나는 민족의 현실에 대해서 짙은 모멸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김포공항을 떠나 특별기 안에서 처음 보는 군사권력 지도부의 강자들은 새 왕조의 승인을 받게 된다는 기대에서인지 희희낙락하였다. 만면이 희색이고 들떠 있었다. 이 여행의 결과로서 왕조의 기틀이 확고부동해 지는 것이다.>
특파원들의 도움을 받는 다른 신문․통신사들과는 달리 단기필마로 고군분투하던 합동통신 리영희 기자가 보고 들은 박정희․케네디 회담의 내용은 참혹한 것이었다. 회담의 정치적 효과를 정책적으로 과장해서 브리핑한 백악관 공보비서 존 스케일리의 미사려구에 회의를 갖고 찾아간 곳이 와싱톤포스트였다. 와싱톤포스트와는 이승만 정권 말기부터 한국의 실상을 기고하여 사설란에 6백자 칼럼으로 연재되는 관계가 있었기에 진실을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주필과 편집국장. 외신부장이 소개해준 국무성 고위관리(한․미정상회담 실무책임자)사무실에서 박․케네디회담의 ‘진짜내용’을 들을 수 있었는데, 공보비서의 브리핑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다른 수행기자들이 흥분해서 송고한 ‘뭐든지 달라는 대로 주기로 약속한다’는 기사내용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케네디가 요구한 것은 한마디로 ‘조속한 시일 내에 한일회담을 반드시 타결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민정이양 공약을 이행하라는 것이었다. 약속이행을 보고 정권을 지지하고 경제 원조를 하며 한미방위조약을 이행하겠다는 것이었으니, ‘말 잘 들으면 원조하겠다’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여기까지 와서 좋지 않은 기사를 보내는 사람은 잘 기억해 두겠습니다.”
김재춘(金在春) 군방첩대장 겸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이 하는 말이었다. 맥아더 예방을 마치고 승가기로 내려오는 자리였다. “원자탄을 쓰지 않은 것은 트루먼 대통령의 큰 실책”이라고 박정희가 맥아더한테 말했다는 것을 동석했던 최덕신(崔德新) 외무장관한테서 듣고, 박정희의 광신적 반공주의에 바탕을 둔 반민족적 본질을 보는 것 같아 섬찟했던 리영희 기자는 겁이 났다. 불안했던 예감이 적중한 것은 유엔한국대표부에 갔을 때 임병직(林炳稷) 대사가 본사에서 온 급전을 전해주는데, 딱 한 줄이었다. <취재중지즉시귀국> 당시 전국에는 25개의 신문이 있었는데 리영희 기자가 보낸 특종기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제1면 톱으로 다루었거나 중간에서 크게 취급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강제귀국을 당한 뒤였다. 김재춘씨의 협박이 현실로 드러난 것은 그 뒤 청와대에서 있었던 공식․비공식 수행원을 초대한 자축 겸 위로연에서였다. 수행기자들도 초대되었으나 리영희 기자만 제외되었던 것이다.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첫 대면했을 때 느꼈던 ‘보잘 것 없는 위인’이라는 첫 인상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박정희 의장이 케네디와 회담에 앞서 기자들을 위해 ‘포즈’를 취하던 장면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흔들의자에 두 다리를 포갠 채 누운 듯이 앉아서 흔들흔들 몸을 움직인다. 가끔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박의장을 이모저모로 관찰하고 있었다. 마치 시험관이 본 시험에 앞서 수험생의 ‘인물평가’를 하듯이 히죽히죽 웃으면서 여유 있는 태도였다. 건방지다고 생각되는 거동이었다. ‘다른 나라의 지도자에게도 저렇게 대할까?’ 나는 흥미롭기도 하고, 조금은 괘씸한 생각도 들었다. 식민지의 군인총독을 임명하려는 종주국 황제와 총독입후보자와의 대면 같다는 느낌이었다.>
고향에서는 17살까지 살았다. 태어난 곳은 평안북도 운산군(雲山郡) 북진면(北鎭面)이지만 자란 곳은 삭주군(朔州郡) 대관동(大舘洞)이다. <물로 사흘 배 사흘/ 먼 삼천리/ 더더구나 걸어 넘는 먼 삼천리/ 물 맞아 함빡이 젖은 제비도/ 가다가 비에 걸려 오노랍니다/ 들 끝에 날아가는 구름은/ 반쯤은 어디바로 가 있을 텐고>하고 소월(素月)이 노래했던 삭주읍과 구성읍(龜城邑)의 중간인 그곳은 소월의 슬픈 노래와는 다르게 가멸진 곳이었다. 1922년부터 은본위제가 금본위제로 바뀌는데, 운산에서 캐낸 금으로 그 밑절미를 삼았을 만큼 부유하며 개명(開明)된 곳이었다. 수풍댐에서 백리쯤 밑이었다. 소월의 고향인 정주(定州)에서 삭주 수풍댐까지 기차가 다녔고 면에 전깃불이 들어왔으며 30년대 말 당시 집에 전화가 있었다. 선생의 별명은 ‘말갈(靺鞨)’이다. 산행(山行)을 즐기는 동무들 사이에서 불리워지는 이름으로 ‘애빨치’ 출신 민족경제학자였던 고(故) 박현채(朴玄埰) 선생이 ‘압록강변 북쪽 산골놈’이라고 해서 붙여준 애칭인데, ‘박애빨’의 고향인 지리산 주변 마을보다 훨씬 개명한 곳이었다.
고향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다음 경성(京城)으로 유학을 간 것이 14살 때였다. 60명 졸업생 가운데 유일했을 만큼 수재소리를 들었다. 갑종(甲種) 공립중학교인 경성공립공업학교는 일본인 위주의 중등학교였다. 전기과에 다니던 4학년 때부터 미군의 B29 공습을 피하며 신축된 전시용 건물의 전기가설, 소개된 빈집의 전기용품 회수 같은 근로동원을 하다가 고향으로 간 것은 45년 7월 중순이었다. 미군의 폭격목표가 된 경성에서 근로동원에 끌려 다니기만 하다가는 부모님과 동생도 못보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집에 중대한 일이 생겼으니 속히 귀향하라는 전보를 쳐달라고 꾀를 낸 결과였다. “일본 해군이 필리핀의 가달과날에서 전멸했다. 다이홍에이 발표가 큰 전과를 올렸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미국 해군 항공모함을 두 척이나 격침 대파시켰다고? 천만의 말씀! 일본 해군이 완파됐다. 일본 해군은 이제 군함도 제대로 남지 않았다. 조선이 해방되는 날이 멀지 않았다. 미국․영국․소련이 그렇게 공약했으니까. 얄타선언이 나왔고 또 포츠담선언이 있다.” ‘경성전기’의 전기공이었던 사이상(최씨) 최×남(崔×南)의 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해방이 되고 다시 상경하여 학교에 들어갔지만 수업이래야 서너 시간을 할까말까한 혼란기였다. 학교에 가는 날보다 안가는 날이 더 많았고 동물적 생존이 더 급한 과제였다. 남대문시장에서 담배말이장사와 부평에서 받아온 성냥보따리를 들고 소매가게를 돌며 낱갑으로 쪼개 파는 일을 하며 약육강식․적자생존하는 ‘자본주의 생활의 발견’을 하다가 국립한국해양대학에 들어간 것은 순전히 ‘학비면제, 숙식․제복 국가부담’이라는 공고문 때문이었다. 병력수송용으로 징발된 실습선에서 이른바 ‘여순반란사건’의 실상을 보게 되었다. <여학교 교복을 입은 어린학생들도 많았는데 소매가 밀려 올라간 여학생들의 팔뚝에 시계를 찼던 자리라고 생각되는 새하얀 피부가 뚜렷했지만 시계는 없었다. 운동장 울타리를 둘러싸고 많은 사람들이 먼발치에서 통곡하고 있었다. 나는 동료학생들을 재촉해서 그 자리를 빨리 떠나버렸다. 멸치를 뿌려놓은 것처럼 운동장을 덮고 있는 구부러지고 찢어진 시체들을 목격한 후회와 공포감 때문이었기도 했지만, 울타리 밖에서 울부짖고 있는 남녀노소의 시선이 두려워서였다.(…) 국방경비대 내의 남로당 소속 장병의 적발과 그들에 대한 대규모 숙군과정에서 경비대 남로당 정보책이었던 박정희라는 장교가 검거되고, 그가 제공한 명단을 토대로 수많은 장교들이 희생되었으며, 그 변절의 공로로 박정희는 사형을 면하여 퇴역한 일 등도 훗날에 밝혀져서야 알았다. 그는 6.25가 발생하자 다시 현역으로 복귀되어 그 후 이 나라의 대통령까지 되었으나 여수순천 반란사건은 아직도 역사에 밝혀져야 할 많은 사실을 그 속에 지닌 채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하게 사라져 버렸다.>
안동중학교 영어선생을 하며 월남한 부모님을 모시고 살다가 ‘유엔군연락장교단’에 들어가게 된 것은 6.25의 와중이었다. 만 7년간 군대생활을 하다가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시작해서 합동통신․조선일보 외신부장까지 지냈지만, 언론재벌의 ‘지배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대학으로 옮겨 공부와 연구를 하게 된 것이 72년이다. 그리고 74년에 나온 『전환시대의 논리』를 필두로 냉전시대의 ‘도그마’를 깨뜨리는 저술들을 쏟아내니, 77년에 나온 ‘우상과 이성’은 인식의 지평을 중국문제까지 넓혀 논의를 심화시킨 것으로서 우리시대에 생각 있는 사람치고 이 두 가지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민족민주운동의 저수지 구실을 하였다. 이 중생이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은 것은 산에 있을 때였다. 바람 부는 객실 구석에서 이 책을 읽으며 받았던 감동은 참으로 가슴 두근거리던 것이었으니, 아! 속인(俗人) 가운데도 이런 선지식(善知識)이 있구나.
4번 징역을 살았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 아래서 꼭 3년 6개월 동안 살았는데, 발병의 원인은 감옥생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영하 10도 이상의 혹한에 냉방서 3개월을 지내고 보니 만성기관지염이 왔고, 겨울이면 따뜻한 곳을 찾아 일본과 태국의 시골에서 정양하기도 했는데, 부실해진 몸을 생각지 않고 급한 원고에 시달리다가 쓰러지게 된 것이었다.
고려 때 절 3군데가 있는 수리산(修理山) 밑 산본(山本)으로 이사한 것이 8년 되었다. 정년퇴임하고 나서 무엇보다도 산이 좋고 집값이 싼 곳을 찾던 끝이었는데, 기가 막힌 것은 퇴직금을 한 푼도 못 받았다는 사실이다. 대학교수 20년이면 퇴직금이 나오는데 선생이 한양대학교수로 재직한 것은 23년이다. 그런데 해직되었던 두 번 8년을 빼면 15년밖에 안된다고 퇴직금을 안주는 것이다. 늙고 병든 이 시대사상의 길라잡이한테는 무엇보다도 시급해 해결되어야 할 사안으로 보인다.
“개인적 욕망, 곧 사욕(私慾)의 무제한 허용이 생산력을 극대화시킨다고 보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자본주읜데 사욕을 제한하고 공동선을 추구해야지요.”
소비에트의 해체와 동구권의 좌절원인에 대하여 여쭈었더니, “인간 개체의 자율성 제한이 근원적인 원인 아니겠는가?” 대답하신다. 지적․정신적․사상적 반공에서 벗어나 과학적으로, 상대 처지에서 봐야한다는 기본원칙 아래 40년간 북쪽을 보아온 선생이다. 북이 어떻게 순조롭게 변화를 이끌어 나가느냐, 변화해 가는 과정에서 미국과의 관계가 풀릴까 꼬일까, 주적 1호인 중국 대상으로 전략․전술을 세우는 미국이 한국을, 북을 어떤 자세로 보느냐 하는 것이 화두(話頭)로 되는데, 평양을 선제 타격하겠다는 부시 황제이다. 98년 11월 북에 갔었는데, 누님과 형님은 돌아가시고 생질들만 만나보았다.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말을 그때 들었다.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답방 이야기인데 조선의 유교적 신의를 굳게 지키는 사람으로 본다.
“이해타산에 밝고 사람들의 그릇이 점점 작아져갑니다. 진정한 친구가 드뭅니다. 지학순․박형규 등 신부․목사 같지 않게 순박소박한 신부․목사, 무위당 같은 친구가 그립습니다.”
무위당(无爲堂)은 10~20년 대선배로 느낄 수밖에 없는 큰 인물로, 만나서 벗으로 삼고 지냈다는 게 큰 복이라고 생각한다.
“삶을 심플하게 하지 않으면 왜소해집니다. 소유에 얽매이면 물건을 부릴 수 없지요.”

가멸진 : 살림이 풍족한
밑절미 : 본디부터 있었던 부분

 

리영희(李泳禧)

언론인 겸 사회평론가. 1929년 평안북도 삭주군 대관면에서 태어났다. 1947년 경성공립공업고등학교를 거쳐 1950년 한국해양대학교 항해학과를 졸업하고 안동공업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재직 중 6.25전쟁이 일어나자 입대하여 1957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다. 1957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언론활동을 시작한 뒤 1972년까지 조선일보 및 합동통신 외신부 부장을 지냈다.
1972년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조교수 겸 중국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 교수기간재임용제도로 인해 해직되었다가 1980년 3월 복직했으나 같은 해 다시 해직된 뒤 1984년 복직하였다. 1988년 한겨레신문사 비상임이사 및 논설고문, 1993년 통일원 통일정책평가위원을 지냈다. 1995년 한양대학교에서 정년 퇴임한 뒤 현재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대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에 《전환시대의 논리》(1974) 《분단을 넘어서》(1984) 《자유인, 자유인》(1990)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1994) 《스핑크스의 코》(1998) 《반세기의 신화》(1999) 등이 있다. 단재학술상, 자유언론상(Press Freedom Award), 늦봄통일상(1999) 등을 수상했다.



글_김성동 

1947 충남 보령 출생
1965 불교 사문으로 입산수도
1975 <주간종교> 종교소설현상모집 당선
1978 <한국문학> 신인상에 중편 ‘만다라’ 당선
1979 ‘만다라’를 장편으로 개작출간
저서 창작집 ‘오막살이 집 한채’, ‘피안의 새’ ‘붉은 단추’
    장편소설 ‘길’ ‘만다라’ ‘집’ ‘국수’ ‘꿈’ 미완의‘풍적’ 우의소설‘염소’ 등
    산문집 ‘생명기행’ ‘미륵의 세상 꿈의 나라’ 등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