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함께쓰는 민주주의

겨레의 땅을 딛고선 흰 고무신 - 계훈제 1 본문

인물/열사 이야기

겨레의 땅을 딛고선 흰 고무신 - 계훈제 1

기념사업회 2003. 3. 1. 16:26
겨레의 땅을 딛고선 흰 고무신 - 계훈제 1



1921년 12월 31일에 태어난 사람이 있었다.

갓난아기의 운명은 그가 조선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심지어는 평안북도 선천군 부황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정도는 정해져 있었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앞으로 펼쳐질 갓난아기의 삶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갓난아기가 태어난 역사적 조건은 험난한 생을 예고하고 있었다.

몇 년 전 베를린 옆에 있는 작은 도시 포츠담에 간 적이 있었다. 관광안내서를 손에 쥐고 걷고 걸어 찾아간 곳은 세실리안호프 궁전이었다. 세실리안호프 궁전은 궁전이라기보다는 아담한 별장처럼 보였다. 궁전이 주는 위압적인 느낌은 전혀 없었고 아주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나무로 지어진 작은 궁전 옆에는 드넓은 호수가 있었고, 젊은이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체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젊은 백인 여성의 나체를 은근슬쩍 즐기다 세실리안호프 궁전으로 들어갔다. 정원은 손바닥처럼 작고 소박했다. 겨우 몇 걸음만 걷는 것으로 정원을 통과하면 궁전 안의 방으로 들어가는 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방을 밖에서 엿볼 수 있었다. 크고 널찍한 책상이 놓인 그 방은 아주 평범해 보였다.

그 방……. 미국의 트루먼,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모여 회담을 했던 그 방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구역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조선에 대해 미국과 소련의 공동 간섭을 논의하면서 그들은 과연 조선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에 대해 짧게나마 고민을 해보았던가? 그들은 암묵적으로 소련의 남하와 미국의 북진을 합의했다. 그 후로 호수변의 햇살을 즐겼고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사진을 찍었으리라.

1945년 8월10일이었다.

바로 닷새 전에 원자폭탄이 히로시마를 폐허로 만들자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통보해 왔다. 일제와의 전쟁을 총괄하던 미국 3성(省)조정위원회(SWNCC)의 전략정책단은 항복문서 초안을 부랴부랴 마련해야만 했다. 이날 밤 11시 30분부터 12시까지 30분 사이에 정책단이 결정해야 할 난제는 10일자로 압록강변의 웅기에 상륙하여 남하(南下)하기 시작한 소련군의 진군을 막는 것이었다.

당시 미군은 한반도로부터 무려 600마일이나 멀리 떨어진 오키나와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항복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조선을 고스란히 소련군에 넘겨주어야 할 초조한 형편이었다. 이때 전략정책단장 GA 링컨 준장이 “내일 아침 우리는 소련군이 일본해협의 쓰시마를 점령했다는 뉴스를 듣게 될지 모르겠다.”고 경악하였다. 해군제독 가드너는 “만일 소련군이 한반도의 수도를 점령했다면 미군은 한반도 최남단의 부산이라도 점령해야 할 게 아니겠느냐.”고 투덜거렸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나중에 주한 유엔군사령관이 될 서른다섯 살의 정책과장 CH 본스틸 대령이 조선 지도를 보다가 30분 만에 조선의 허리를 자르는 38선이라는 아이디어를 만들어 냈었다.

겨우 30분 만에 짜낸 아이디어의 결과로 부랴부랴 탄생한 38선.

38선은 이렇듯 우연성 속에서 부랴부랴 탄생했지만 그 결과는 실로 참혹했다. 한 개인이 아무리 자기의 생을 역사에서 분리하고자 노력해도 그러나 역사는 인간에게서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갓난아기 계훈제의 삶도 그 후로 진행된 역사의 모든 비극으로부터 비껴나질 않았다. 특히 잘못 가고 있는 역사와 정면에서 싸워온 사람들의 경우에는 비극의 정도는 더욱 컸다.

방학동 가는 길…….

계훈제의 이름 세 글자만 겨우 알고 가는 그 길의 하늘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파트의 어두침침한 거실에서 만난 계훈제 선생(이하 선생 생략)의 아내인 김진주 여사를 만나는 순간, 무척 당황해야만 했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제16대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식을 인터넷 방송인 라디오 21을 통해 듣고 있습니다.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의 이름이 들려옵니다. 눈을 감습니다. 그 이름 뒤에 감춰진 역사의 순간순간들이 뇌리에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스무 살에 최규하를 만났고 이어서 만나야 했던 전두환과 노태우의 시절은 내게 있어 불의 시대였습니다. 비로소 한 시대가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오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는지……. 잘 가거라, 어둠의 시대여. 안녕 불과 칼의 시대여.)

거동이 몹시 불편해 보이는 김진주 여사는 분노에 사로잡혀 목소리가 카랑카랑했다. 생의 전부를 민주화운동에 바친 계훈제의 삶이 함부로 폄하되는 것에 대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온통 어둠으로만 가득 찼던 시대, 그 시대에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 횃불을 들었던 사람들에 대해 예의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파트를 나와 마을버스를 타러 가는데 서서히 내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얼마나 자주 무심하게 어둠의 시대를 회고했던가? 그 시대의 거친 강물을 함께 건넜던 선후배들과 지금도 제대로 된 소통을 나누고 있는가? 어쩌면 계훈제에 대한 폄하는 바로 나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아가 삶의 섬세한 갈피를 깊이 있게 담아내지 못했던 심사위원들의 좁고 융통성 없는 소견들이 바로 문제였다.

계훈제 선생이 생전에 즐겨 신고 다니던 흰 고무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기증, 보관)

한 사람의 생을,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제단에 자신의 몸을 온전히 바친 사람의 생을 역사의식이 없는 법조항의 시선으로 보는 심사위원들의 양식이란 얼마나 보잘 것이 없는가? 심사위원들이 심사대상이 된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지금 그럴 듯한 직위와 경력을 자랑하겠지만 역사를 몸으로 살아간 사람들의 삶에 비하면 조족지혈의 생에 불과하다. 어찌 감히 심사의 소견을 함부로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역사는 항상 법률을 뛰어넘어 존재해왔다. 역사가 법률을 뛰어넘지 못했다면 인류에게 진보는 영원히 없을 터였다.

다시 계훈제의 삶으로 돌아가자.

아무 것도 모르고 태어난 계훈제는 태어나자마자 운명적으로 식민지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계훈제가 선택한 삶이 아니었다. 계훈제의 아버지 계봉집은 3대조 때부터 뿌리를 내렸던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상가도 혁명가도 독립 운동가도 아니었다. 소박한 농민이었다. 떡갈나무 밑에서 조용히 망국을 슬퍼하며 울었던 사람이다. 강가에서는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를 읊었다. 그러나 그는 저항인이었다. 일제의 쌀 공출과 전시 총동원을 거부했고, 지원병제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그리고 아들의 권유에도 아랑곳없이 남하를 거부했다. 죽지 않는 야인이다. 칼로 잘라도 잘리지 않는 물과 같은 야인이다. 말과 사상을 빼앗아도 빼앗기지 않는 지사이다. 이런 분이 진짜로 역사를 추진하는 세력인지 모른다.(계훈제 지음, <계훈제 미완의 자서전 흰 고무신>, 2002년 3월 21일 삼인출판사, 이하 약칭으로 <흰 고무신>으로 표기함)


계봉집의 특징을 아들 계훈제는 이렇게 말했다. 계훈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일제 식민지에 저항하게 되었다. 3.1운동 이후에 독립운동의 무대가 압록강과 장백산맥 주변으로 옮겨졌다. 압록강 하류에 있던 계훈제의 집에는 독립 운동가들이 어둠을 틈타 드나들기 시작했다. 계봉집은 그들에게 정세와 전황을 전해 들으며 노자와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이런 일로 계봉집은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자위하고 있었다. 어린 계훈제는 그들의 영웅적인 투쟁에 감동하여 장차 독립 운동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고향이 선천이었던 것 역시 계훈제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주민이 이만 명이 넘었던 선천골은 한국의 예루살렘이었다. 중국을 통해서 내려오는 ‘야소교’ 선교 세력과 남쪽에서 밀고 올라오는 선교세력이 이 지방에서 만났기 때문에 야소교 세력이 대단했다.”(흰 고무신 23쪽) 선천에는 대한제국의 외부주사였던 기독교인 박희병 권사가 장로회 장로교 신성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해둔 곳이었다.

105인 사건이 발생하자 신성학교 선생들과 학생들이 오랏줄에 굴비처럼 엮여서 일본 헌병한테 끌려갔다. 달려 나온 학부형들과 학생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일본헌병들과 밀고 당기고 몸부림쳤는데, 정거장까지 몰려간 인원이 수백 명이었다. 그날 밤은 예배일도 아닌데 선천 읍내 교회당이 일제히 종을 울렸다. 계훈제는 신성학교에 다니면서 1년 선배인 장준하를 만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역사의 고장에서 간헐적으로 채취한 나의 저항 의식은 심인곤 선생과 장리욱 교장의 현시적 언동이 더욱 선명하게 그리고 확고하게 부착시켜 놓았다. 나는 심선생이 착용하는 무명 두루마기와 맥고 모자, 그리고 고무신에서 역사의 덮개요 근대화의 물결, 그리고 민족의 순백성을 읽었다. 준엄으로 시대에 맞서고 묵거(黙拒)로 지배에 대항함을 보았다.

스승은 강의실에서 구약의 시편을 암송하여 조물주의 위대한 능력을 찬양하다가 밀턴의 저항시를 읊으며 신사 참배 거부로 악에 밀려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인류의 행복 존중은 모든 인간에게 새겨진 원리요, 악인에 의한 선인의 지배는 용납할 수 없으며, 최상의 군주제보다는 최악의 공화제를 택하라는 밀턴의 저항사상을 나는 그 스승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또한 나는 장교장의 몸매에서 반봉건과 개화의 열매를 읽었고, 그분의 머리에서 정의와 진리를 환하게 밝혀주는 발광체를 발견했다.

스승은 창문을 스며드는 햇살을 피해 가며 공맹(孔孟)의 인도(仁道)사상과 듀이의 교육 사상을 설강하며 텅 비어 있는 우리들의 두뇌에 차곡차곡 담아주는가 하면, “청년이 있는 이 곳에 꿈이 있고, 꿈이 있는 곳에 현실과의 투쟁이 있다. 이 꿈과 투쟁의 조화 속에 인간 승리가 깃든다.”며 사랑과 화해의 정신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러다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제의 관헌에 끌려가는 그의 모습은 우리들의 어린 가슴에 망국의 설움을 그토록 깊이 꽂아놓을 수가 없었다. (흰고무신, 29쪽)


신성학교는 계훈제에게는 영원한 학교로 남게 되었다. 아버지와 심인곤 선생과 장리욱 교장은 영원한 스승이었다. 위대한 스승이 있으니 당연히 계훈제의 삶은 일제 식민정책에 순응하는 길을 거부하게 되었다.

계훈제는 신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으로 올라가 대학을 다니게 된다. 그러던 1943년 10월 20일 육군 특별 지원병 임시 채용 규칙이 육군성령(陸軍省令)으로 발표되었다. 막상 육군성령이 발표되자 계훈제를 비롯한 학생들의 얼굴에는 “분노와 당황 등 착잡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사회 또한 경악과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들끓게 되었다.”(흰 고무신 35쪽) 채용 규칙이 발표된 다음 날부터 각 신문사들은 연이어 학도병을 위한 좌담회를 열었다. 저명인사들도 나서게 되었는데 최남선은 “일찍 신라석일(新羅昔日)의 국민 동원 강행기에 당시의 청년이 원광법사에게 이에 대한 필요를 물었을 때 법사는 세속오계를 말하고 특히 임전무퇴 일조를 강조함에 시대 청년의 심(心)이 이 일침에 탁 터져서 아무 지의(遲疑) 없이 제시광유(濟時匡維)의 대업으로 치진(馳進)하였었다.”(흰고무신 39쪽) 라고 매일신보에 기고했으며 이광수도 앞장 섰다. 하지만 계훈제는 학도병에 지원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의 학생들이 반 강제로 학도병에 지원하고 말았다.

운명의 아침은 밝았다. 아침은 유난히 찼다. 대한 추위였다. 아침부터 거리의 구석구석에는 멜빵을 어깨에 두르고 사각모를 쓴 학병들이 침울한 가족, 동무, 선배들과 섞여 이리저리 밀리고 있었다. 경성역에서는 차창으로 상반신을 내밀고 절규하는 학도병과 차체에 매달려 우는 아내, 그들의 팔목을 붙잡고 놓지 않는 아우와 친구, 모든 것을 잃어 절망에 통곡하는 노부모,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처절한 광경이 전개되었다.

이윽고 학도병들은 끝없는 민족의 원한을 가슴에 안고 철마에 실려 피안의 지평선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흰고무신 46쪽)


계훈제는 전쟁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압록강을 건너 집안(輯安)으로 갔지만 은신처를 찾지못해 유랑해야만 했었다. 아직까지 계훈제는 적극적인 저항의 길을 가지 못하고 있었다. 선천의 집으로 갔다가 농촌으로 다시 경성 돈암동의 하숙집으로 전전하며 유랑했지만 보다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결국 계훈제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그 곳에서 독립운동을 할 작정이었다.

만감이 교차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 나는 다음 날 새벽 신의주역에 내렸다. 전시의 고달픈 생활에 허덕이는 승객들은 대한의 새벽 추위에는 촉감조차 없는 듯이 각기 발걸음이 바빴다.

혼잡한 출구를 쉽게 빠진 나는 그 길로 압록강 철교로 향했다. 나는 일제의 대륙 침략의 대욕을 채워주는 거대한 악의 다리를 건너려는 것이다. 인도교의 검색은 물샐틈없는 기차 안의 그것보다 덜 엄격하다는 잠상(潛商)들의 말을 귀에 담고 있던 터라 나의 마음은 한결 가벼운 듯했다.

그러나 막상 철교 입구에 발을 딛으니 사정은 달라진다. 굽이치는 검푸른 물과 허공에 우뚝 선 철각은 많은 사연을 안고 있으련만 나의 곤두선 감각에 파고들지 못했다. 이른 아침의 선만대교에는 강을 건너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나는 큰 키에 흰 두루마기가 유난히 돋보임을 느꼈으나 그럴수록 거만스럽게 겉도는 풍채를 내밀었다.

순간 “좃도”(잠깐)하며 헌병대 완장을 찬 사나이가 나를 점찍었다. 물론 조선인이었다. 나는 나를 입증하는 증명서가 없었다. 나는 원래 신분증 같은 것을 싫어한다. (흰고무신 68, 69쪽)


조선인 형사의 직업적인 심문 앞에 걸려든 계훈제는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고 오히려 경성으로 압송되어 육군 제1훈련소에 들어가고 말았다. (계속)


** 3월 14일은 계훈제 선생님이 돌아가신 날입니다. 그 날 하루라도 계훈제 선생님을 추모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글_정도상

1960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전북대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국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7년 단편소설 <십오방 이야기>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창작집 <친구는 멀리 갔어도>, <아메리카 드림> 등이 있고 장편소설로는 <그대여 다시 만날 때까지>, <푸른 방>, <누망> 등이 있다. 현재 사단법인 통일맞이 늦봄문익환목사기념사업 사무처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라디오21(www.radio21.co.kr)의 <정도상의 문학 속으로>를 진행하고 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