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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이야기/사료(구술) 이야기

한국의 진보적 여성운동과 여성평우회

기념사업회 2003. 9. 1. 14:03
한국의 진보적 여성운동과 여성평우회

유영산(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80년대 여성운동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경숙사건’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권신장의 필요성이나 성불평등의 심각성을 사회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80년대를 살았던 동시대인 중에서도 이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이후 세대들은 더욱 이 사건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보아 우리사회에서 이 사건은 잊혀졌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성운동단체 내에서 연대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가사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불평등의 심각성을 이슈화한 계기였다는 점에서 사회적 의미가 더욱 컸다. 그 사건의 중심에는 바로 여성평우회(이하  여평)가 있었다.

여성평우회 기관지 <여성평우>

 
이경숙 사건의 중심에는 여평이 있어 

 ‘이경숙 사건’은 1981년부터 방일물산 외무사원으로 근무하던 이경숙씨가 1983년 교통사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계속 근무할 수 없게 되자 가해자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서울민사지법은 우리나라 여성의 결혼 평균연령인 26세부터는 가사노동에 종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26세부터는 여성 회사원으로서 수입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한 사건을 말한다.
 ‘이경숙 사건’은 이후 조직정년제 철폐운동으로 이어져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평의 사회적 역할을 각인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여평은 사건화를 꺼려하는 이경숙을 찾아 항소심을 내도록 설득하여 故 조영래 변호사 등의 도움을 받아 사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되었다. 이후 여평은 <25세 조기정년제 철폐를위한 여성단체연합회>를 결성하여 여성차별 현실을 알리는 연속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민중 중심을 지향하면서도 대중여성운동단체로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조기정년제 철폐운동, 결혼퇴직제 반대운동은 모두 ‘이경숙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것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경숙을 찾아서 설득하고 지원했던 여평의 활동가들과 여평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중 삼중의 억압과 착취를 받아온 여성들에게 사건을 이슈화 하는 것 자체가 운동이었으며 변혁이었다. 하지만 ‘이경숙 사건’의 중심에 있던 여평은 출범 당시부터 ‘개량주의’ 논쟁에 휘말렸다. 일제시기와 해방시기 존재했던 근우회, 부녀총동맹 이후 처음으로 결성된 공개 여성운동단체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상황에서는 합법운동이 곧 개량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학생운동 출신의 후배들이 대거 여평으로 유입되면서 개량주의 논쟁은 이념논쟁으로 비화되었고, 여평 창립멤버들이 조직을 탈퇴하게 된다. 이후 후배들 내에서도 2차 이념논쟁이 진행되는 등 수난(?)을 겪게 된다. 하지만 여평의  출범을 계기로 '여성의 전화' , ‘기독여민회’ 등 독자적 여성단체가 생겨났고 민주화운동 세력 내에서도 여성부가 분화되어 나오는 등 여평은 여성대중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86년 부천의 성고문 사건이 폭로되면서 "성고문 대책위원회"가 결성되고 'KBS시청료거부여성연합' 등의 활동을 통해 여성운동은 국민운동의 차원으로 폭을 넓혀가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87년 2월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이 결성되었다.
 올해로 여평 창립20주년을 맞는다. 1987년 해산 성명서를 마지막으로 조직은 사라졌지만 그 정신만은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80년대를 살았던 동시대인들 중에서도 여평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여평의 활동을 기록하거나 여평에서 생산한 기록물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 것이다. 

여평 역사정리를 통해 관련 자료 기증

 20 년 전 여평을 만들고 이끌었던 사람들이 [여성평우회 창립20주년 기념 준비위원회](이하 준비위)를 구성하여 여평 역사정리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수집한 기록물과 녹취자료를 자료집으로 엮어 사료관에 기증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여성대중단체의 기록물입수는 한국여성운동 연구의 필수 자료로서 연구의 토대가 될 것이다.
 여평은 1983년 6월 18일 ‘여성의 평등, 발전, 평화’를 목표 이념으로 삼고 ‘가부장적 성차별 문화의 개혁, 남녀 모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사회 건설, 민주통일사회 건설’을 활동지침으로 삼고 창립하였다. 분단 이후 여성운동 이념을 바탕으로 운동 목적을 사회, 정치적인 문제와 결합하여 실천 지침을 제시한 최초의 단체이기도 하다.
 여평은 크게 조사연구활동 및 교육훈련, 홍보출판 및 문화사업, 지역사회 개발 및 봉사사업, 타 여성단체 및 국제간의 친선 교류사업 등을 수행하였다. 여평 활동의 내용과 방식은 현존하는 여성운동 단체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조사연구활동, 문화사업, 지역개발사업, 국제교류사업 등은 정치세력화와 더불어 여연의 핵심사업이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정리하고 알리는 것이 가장 큰 운동이라는 말처럼 여평은 80년대 중반 한국사회 여성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알리고자 노력하였다. 가족법은 왜 개정되어야 하는가, 25세 여성조기정년제 철폐를 위한 토론회 자료집, 여성연합회 활동보고서, 제3세계 여성노동 등의 자료집과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이 자료들은 당시 여성운동의 쟁점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로서 큰 의미가 있다. 지역사회개발과 봉사사업으로는 무엇보다도 인천 만석동의 큰물 공부방을 들 수 있다. 큰물 공부방 활동자료는 전무한 상태이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후원회 소식지가 전부이다. 관련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한 가족이 지역에 들어가 활동을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조직적인 지원이나 활동이 없었던 터라 한 개인, 한 가족의 헌신적인 활동에 의존했으며 큰물 공부방사업과 관련해서 영구보존할 기록물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유는 문서를 생산할 여유나 활동여건이 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오직 관련자들의 구술자료와 후원회 소식지 등을 통해서만이 당시 활동을 복원하고 재생하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여평 활동에서 주목할 점은 여성운동 이론을 주도했던 기관지 발간 사업과 의외의 성과를 보여주었던 문화사업 전개이다. 

진보적 여성운동의 대변지 <여성평우>

 1984년 6월 18일 창립1주년 기념으로 발행하기 시작한 기관지 <여성평우>의 경우는 여성운동의 유일한 매체이자 대변지로서 이론적 발전을 주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여성평우>는 4호까지 발행되었고, 앞에서 언급했던 여평 창립멤버들이 조직을 탈퇴한 이후 1986년 6월부터는 <이천만 여성>이라는 제호의 신문을 발간하게 된다. 이후 1987년 1월 <이천만 여성> 4호까지 발행하였다. <여성평우>와 <이천만 여성>은 1980년대 진보적 여성운동을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이다. 운동단체의 이념과 활동, 사상과 철학까지 기관지에 담겨진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당시 여성운동의 실태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과 여성운동의 관계파악에 필수적인 자료가 될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여성문화큰잔치>는 여성대중의 호응까지 받게 되면서 여평이 진보적인 여성운동단체로서 위상을 확고히 갖게 되는데 기여했으며, 당시 공연모습을 촬영한 영상기록물이 기증 자료에 포함되어 있어 여성문화운동을 연구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관련자들은 <여성문화큰잔치>에 큰 비중을 두거나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여평 사업 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사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창립멤버 중 한사람은 <여성문화큰잔치>를 지금 다시해도 성공을 장담할 정도로 높게 평가하고 있다. 

 
 60-70년대 급속하게 진행된 산업화, 근대화 과정은 여성을 봉건적, 전통적 역할에서 끌어내어 자본주의 사회와 공적 영역에 전면적으로 등장시켰다. 이에 따라 여성의 사회참여가 확대되는 듯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교묘히 결합한 가부장적 자본주의와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새로운 형태로 여성의 억압과 불평등을 확대․재생산하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80년대 들어 경제성장의 그늘 아래 고통 받아 오던 여성노동자, 농민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당연히 기존의 여성운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여성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 결실이 여평이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민주화는 어느 정도 진척되었을지 몰라도 여성 억압과 불평등은 썰물이 빠져나간 갯벌의 바위처럼 아직도 굳건히 한국사회에 뿌리박고 있다. 여성문제에  있어서만큼은 한국사회는 여전히 1980년대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진보여성운동 자료를 기획수집, 정리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준 준비위 관계자들과 원 사료를 기증해주신 조형, 강남식, 강정숙, 김봉률, 김애영, 박영숙, 이경숙, 이재은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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