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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산업선교회에서 기증한 민주화운동 사료의 의의 본문

사료이야기/사료(구술) 이야기

영등포 산업선교회에서 기증한 민주화운동 사료의 의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22. 11:02
영등포 산업선교회에서 기증한 민주화운동 사료의 의의



 

지난 3월, 18개월간의 협의를 통하여 영등포산업선교회가 60년대부터 보존해 온 산업선교 및 노동운동 관련 사료 34,000여 건을 사업회에 기증하였다. 이로써 사업회는 ‘민주화운동자료관추진위원회’ ‘가톨릭농민회’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 이어 ‘영등포 산업선교회’로부터 사료들을 기증받음으로써 약 40여만 건의 민주화운동 사료들을 확보하여 명실상부한 민주화운동 전문 사료관으로서 그리고 민주화운동 지식정보센터로서의 위상을 동시에 확보하게 되었다. 영등포 산업선교회(이하 영등포 산선)의 역사와 주요 기증사료에 대한 소개 및 수집 사료에 대한 온-오프라인에서의 공개 및 열람 계획을 소개하고자 한다.

 

영등포 산선의 역사

영등포 산선은 한국 교회 산업선교의 모태이며 7,80년대 한국노동운동 집회의 중심지였고, 가난한 노동자들의 교회이자 학교이며 기둥이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영등포 지역에서 시작된 전통적인 목회로서의 산업 전도는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 ‘산업 선교’로 내용과 형식이 전면적으로 전환된다. 이것은 박정희 정권에 의한 경제개발정책이 노동자들의 인권을 심각하게 유린하게 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교회가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였다. 유신 이후부터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영등포 산업 선교 활동이 ‘소그룹 활동’을 통해 전개되었다. ‘소그룹 운동’은 이후 노동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 운동으로 영등포 산선은 노동자들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다.

노동자 성서연구와 예배, 노동자 그룹 활동,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활동, 노동조합운동과 의료 활동 등의 복지활동이 정부의 탄압과 방해 그리고 교회 내적인 오해와 불신 등 어려움 속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유신정권이 종말을 고하고 5공화국이 들어서는 시기에 영등포 산선 역시 여타 민주화운동세력처럼 정부와 언론의 모진 탄압과 박해를 받았으나, 산업선교신학을 정립해 나감으로써 한층 더 노동자들의 깊은 신뢰와 사랑을 받았다.

성문밖 공동체운동을 전개하고, 노동자들과 만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여 영화 상영, 헌 옷 나누어 쓰는 한울안운동, 희망의 전화를 통한 상담 활동, 야학(구연학교) 등의 활동을 하였다. 영등포 산선은 엄혹한 시절 노동자들의 집회 공간이 되었으며 수많은 노동자들이 영등포 산선의 다양한 교육, 문화 활동에 참여하였다. 이렇게 해서 성장한 노동자들은 폭압적인 탄압을 뚫고 노동운동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는 한 주체로 나서기 시작했다.

 

정부의 탄압에도 노동자 속에 뿌리내려

1978년 4월 17일 오후 6시, 박정희 유신정권이 무너져가는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여 국민을 혹독하게 억압하고 있을 때 청주시 복대동 활빈교회에서는 약 40여명의 노동자와 교인, 학생들이 모여 ‘억울한 농민을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청주지역 산업선교회는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의 인명진 목사에게 이 기도회의 설교를 부탁하였다.


 

이 자리에서 인 목사는 “감옥에 가보았더니 감옥의 죄인들이 낙서를 해 놓은 말 중에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더라. 나는 그것을 감옥에서 뿐만 아니라 밖에 나와서도(중략) 실감하게 되었다.(중략) 못 한 근을 훔쳐다가 팔아먹은 사람이 징역 8년을 받은 경우를 보았는데 참 이상한 것은 기업주들이 몇 억씩 떼어 먹는데도 이것을 잡아가지 않더라.(중략) 퇴직금을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고 잔업수당 줄 것을 주지 않는 것이 도둑질 아니냐? 그런데도 경찰들에게 ‘큰 도둑놈이 있다 잡아라’고 하면 잡지 못하고, ‘그것은 자기들이 힘이 미치지 않는다’고 그러더라.
또 살인도 마찬가지다.(중략) 지금 대한모방에서 장로들이 경영한다는 회사에서 한 남자를 950원 일당을 주어서 그것 가지고는 도저히 살 수 없는 부인이 7살, 5살, 3살 먹은 애를 데리고 자살했다 하더라.(중략) 이것이 과연 그 사람들의 자살이겠는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은 틀림없이 기업주가 노동자를 죽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왜 이런 살인자는 경찰이 처벌하지 못 하는 거냐?

이 자리에도 경찰관들이 많이 있고 한 20명가량 있는데(중략) 이런 시간 있으면 한천동 씨라든지 박천세 씨라든지 장월용 씨를 죽인 이런 사람들을 처벌하고(중략)
누명을 벗겨주는 일을 해야 할텐데, 오히려 억울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감시를 하니 세상이 정말 거꾸로 된 것 아니냐?(중략)
살인자가 정말 살인자로 도둑놈이 정말 도둑놈으로 밝혀질 그런 날이 오고 그 사람들이 심판을 받을 날이 반드시 온다.(중략) 여러분들이 지금 당장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실망하지 말고 꼭 여러분들의 진실이, 억울함이 풀릴 날이 오고 밝혀질 날이 오리라는 것을 믿고서 여러분들의 싸움을 싸워 나가야 될 줄로 믿는다.(후략)”
이 글은 인명진 목사가 청주경찰서의 출두 요구를 받고 4월 24일 출두하기 전에 구속이 될 것을 예상하고 녹음으로 남긴 말을 글로 풀어 놓은 것이다.


민주화운동사료 공개 및 열람 계획

사업회는 수집된 민주화운동 사료를 사 기록물 영역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국제표준에 의거하여 자체 개발한 ‘사료관리시스템’(2003년 12월 개발 완료)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공개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수집된 사료를 정리하고 가공하여 온-오프라인에서 빠른 시간 내에 열람케 하려면 일정 기간 내에 다수의 숙련된 인력과 엄청난 비용을 필요로 한다. 다행히도 사업회는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을 통하여 일정한 예산을 확보하게 되어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전문가들이 민주화운동 사료를 국가지식자원으로 기꺼이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사업회는 2005년 1월부터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과 ‘민주화운동자료관추진위원회’에서 기증한 민주화운동 사료 중 1차로 85,000여 건(120여 만 면)의 문서사료를 디지타이징하여 목록과 함께 원문을 일반 국민에게 웹으로 서비스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2006년 1월부터는 ‘영등포산업선교회’‘가톨릭농민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윤영규 선생님과 송건호 선생님 등 많은 개인과 단체에서 기증해 준 귀중한 민주화운동 관련 문서사료와 구술사료 를 사진과 동영상 사료들과 함께 점차적으로 서비스하게 될 것이다.
이 지면을 빌어 귀중한 사료를 사업회에 기증해준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며, 향후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부탁드리는 바이다.

 


<이인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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