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인물/열사 이야기 (46)
함께쓰는 민주주의
1961년 5월 16일, 젊은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남한 내 진보세력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전쟁과 자유당 정권을 거치면서 교살 직전에 이른 진보적 논의들은 4·19혁명의 열린 공간 속에서 이제 막 기지개를 켜고 활로를 찾고 있던 참이었다. 사회당을 비롯한 혁신세력들은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과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 사회당 외곽조직), 민족통일학생연맹(민통련) 등의 연합조직인 민족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를 구성하고 진보적 통일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통민청과 민민청은‘현 단계에서 민족 문제는 전략적으로 상위에 놓인 과제’라는 데 합의하고 통합의 수순을 밟고 있었다. 양대 조직의 가장 급진적인 부분은 민민청의 서도원·도예종·하재완, 통민청의 이재문·우동읍(우홍선)·김배영 등이었다. 이들..
민족경제론 쓰러지다 뇌졸중 환자들은 별다른 계기 없이도 괜히 웃거나 우는 증세를 보인다고 한다. 감정조절 기능에 이상이 생긴 탓이다. 박현채는 우는 쪽이었다. 그가 쓰러진 1993년 여름부터 세상을 떠난 1995년까지 약 2년 동안 그가 흘린 눈물은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흘리기에도 벅찬 분량이었다. 울음은 그의 말이었고 실천이었으며, 박현채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리는 간절한 신호였다. 그는 쓰러지기 얼마 전부터, 오래전 산에서 생사를 같이 했던 ‘동지’들을 생각하며 자주 눈물을 떨궜다. 이미 언어 장애가 오고 있을 때였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알아차린 뒤에도 박현채는 종전의 생활을 바꾸지 않았다. 대학 강의도 그만두지 않았고, 친한 사이가 아니면 입 밖에도 잘 내지 않던 빨치산 시절을 회고록에 담..
1976년 3월 1일 오후 6시 명동성당에서는 3·1절 57주년 기념 미사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전국에서 올라온 20여 명의 사제단 신부들이 공동 집전한 이 날 미사의 분위기는 여느 때처럼 경건하고 장중했다. 가톨릭 신자로서 미사에 참석한 공화당 국회의장 서리 이효상은 잠시 장내를 둘러보았다. 신자석에 앉은 700여 명의 사람들 중에는 더러 개신교 신자, 비신자도 섞여 있었지만, 3·1절의 역사적 의미와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인 명동성당의 위치를 돌아볼 때 이해하지 못할 풍경은 아니었다. 김승훈의 강론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효상은 이 미사에 대해 별다른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 강론대에 선 김승훈은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를 앞둔 1975년 2월 3일 공개서한을 통해 자신과 같은 가톨릭 정치가들의 반성..
1963년 9월 25일.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궂은 날씨였다. 서울 신당동성당 보좌신부 김승훈은 이날도 많은 사람을 만나며 분주히 돌아다니다 저녁 무렵 성당으로 돌아왔다. 비를 맞은 탓인지 몸이 으슬으슬 춥고 떨려서, 그는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식사며 청소며 사제관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식복사 아주머니는 몸살기를 보이는 젊은 신부가 안쓰러워 그의 방 아궁이에 연탄불을 넣었다. 식복사 아주머니가 ‘좋은 마음’으로 넣어 준 그 연탄불이 화근이었다. 그 방은 일 년 내내 불을 넣어 본 적이 없는 온돌방이었다. 연탄가스 신부님 김승훈은 다음 날 아침 미사 때가 되어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교우들이 사제관으로 달려왔을 때 그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연탄..
‘6.25는 통일전쟁’이라는 사회학자의 기고문이 우리사회에 난데없는 체제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국가보안법을 들이댄 공권력은 글을 쓴 교수를 구속 수사하느냐, 불구속 수사하느냐를 두고 검찰총장이 물러나는 일도 생겼다. 그러자 야당대표는 “우리의 체제를 정면으로 도전하고 부정하는 사람에 대해 헌정 사상 처음으로(법무부장관이) 지휘권까지 발동해서 보호할 이유는 없다.”며 “한두 사람의 인권을 보호한다고 하는 바람에 우리 체제가 무너지고 국민 전체의 인권에 위협이 온다.”고 현 정권을 비난했다. ‘국가체제를 지키기 위해 구국운동도 불사하겠다, 보수 세력이 총집결하자.’는 야당 대표의 호소에 보수 인사들인 ‘제2시국선언 애국시민모임’은 “대한민국은 좌경화가 나라의 안방과 심장을 위협하고 있는 위험한 나라”라고..
폭력배들한테 교회에서 쫓겨난 목사와 교인들이 거리에서 예배를 본다. 그것도 경찰서 앞에서. 헌데도 교인들을 이끄는 목사는 성직자라기보다 지휘자나 무대감독에 더욱 어울린다. 그의 손짓에 따라 교인들은 더위도 추위도 잊은 채 찬송가를 부르고 신명나게 박수를 친다. 누구보다 흥을 돋우는 건 어깨춤을 추는 목사다. 그가 깡패들한테 얻어맞아서 입원까지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교인들은 목사와 한 몸이 되어 엄지손가락을 펴면서 ‘자유, 정의, 민주, 민족, 자주, 평화, 통일’을 부르짖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서 ‘통일! 통일! 통일!’을 마음껏 외친다. 교인들뿐 아니라 지나가는 행인들도 속이 다 후련하다. 군사정권의 폭압을 잠시나마 날려버리는 순간이다. 그는 어느 해, 아내와 아들..
안기부에서 불법으로 도청한 테이프가 날마다 우리 사회를 흔들어대고 있다. 내용이 공개된 테이프에는 어느 중앙 일간지 사주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그 사주는 대선 후보의 정치자문을 서슴지 않았다. 그뿐 아니다. 모 그룹 회장의 선거 자금 배달부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돈으로 권력을 매수하려 한 족벌언론 사주답게 그는 다른 후보에게도 선거자금을 대는 치밀함을 보였다. 특정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그는 신문을 사사로운 도구로 이용한 셈이다. 상상해 보라! 정치권력을 움켜쥐려고 음모를 꾸미는 언론사 사주의 추악한 뒷거래 풍경을! 불법 도청 테이프를 퍼뜨린 전직 기관원은 공중파 방송사와 신문사의 ‘치부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로서는 도청 테이프를 폭로한 언론사..
두어 달 전에 공직으로 진출한 어느 언론사 회장의 부동산 투기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이곳저곳의 땅을 사들이면서 위장전입을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명백한 불법이었다. 그런 식으로 4만 5천 평을 사들인 그는 언론인답게 기자 간담회를 열어 국민들에게 사죄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가 저지른 땅 투기 사건은 얼렁뚱땅 넘어갔다. 과연 우리 사회에 언론은 살아있는가? 3공화국에서 6공화국에 이르기까지의 언론 변천사를 송건호는 짧게 정리한다. “전두환 정권은 탄압만 한 것이 아니라 회사에서 월급을 많이 줬어요. 그때부터 기자들도 정부 편이 됐지요. 박정희 때처럼 두들겨 패지 않아도 기자들이 자진 협조를 했지요.” 몇 해 전에 그 언론사 회장은 탈세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다. 1천여 개가 넘는 차명계좌를 만들어 700..
대학에 다니다 군에 입대한 사병은 총을 난사해 동료를 무참히 살해한다, 대학입시에 내몰린 청소년들은 한 해에도 여러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들을 살려내야 할 어른들은 돈 다발을 싸들고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린다. 그야말로 돈 놓고 돈 먹는 투전판이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약육강식의 법칙을 숭배한지 오래인 사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다. 어디에서부터 어긋난 것일까. “학교가 노예생활 못지않은 진학지옥을 방불케 한다. 우리의 교육열이란 일류학교에 진학해서 잘 사는 소수층에 끼이려는 몸부림인 것이다.(중략) 더욱더 문제인 것은 교육받는 동안에 되어가는 사람의 모양이다. 겉모양이야 학교 안 다닌 사람보다 도리어 말쑥하지만 그 속에 채워지고 있는 것은 짐승세계이다...
70년대 많은 청년들의 경우처럼 강은기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인물은 ‘한국의 간디’라 불렸던 함석헌이었다. 성경과 동양철학을 독특하고 자유롭게 풀이해 내는 함석헌의 사상과 불의한 정치권력에 맞서 ‘싸우는 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는 강은기에게 어떤 ‘길’을 제시했다. 어릴 때부터 가져온 기독교 신앙과 출가의 경험, 불합리한 현실과 유신정권에 대한 저항감, 비체계적인 독서로 추상적인 고민만 불려 왔던 강은기는 함석헌과 그의 스승 유영모의 자택을 들락거리면서 비로소 자기 인생의 구체적인 목적과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인쇄 직공 할 때는 인쇄노동운동을 꿈꿨죠. 전태일의 분신자살을 보면서 열악한 상황에서 혹사당하는 인쇄노동자들이 똘똘 연대해서 노동자가 주인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게 바람직하지 않나. 근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