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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우리 신부님, 김승훈 1 본문

인물/열사 이야기

신부님, 우리 신부님, 김승훈 1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29. 10:53


1963년 9월 25일.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궂은 날씨였다. 서울 신당동성당 보좌신부 김승훈은 이날도 많은 사람을 만나며 분주히 돌아다니다 저녁 무렵 성당으로 돌아왔다.
비를 맞은 탓인지 몸이 으슬으슬 춥고 떨려서, 그는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식사며 청소며 사제관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식복사 아주머니는 몸살기를 보이는 젊은 신부가 안쓰러워 그의 방 아궁이에 연탄불을 넣었다. 식복사 아주머니가 ‘좋은 마음’으로 넣어 준 그 연탄불이 화근이었다. 그 방은
일 년 내내 불을 넣어 본 적이 없는 온돌방이었다.
 

연탄가스 신부님


김승훈은 다음 날 아침 미사 때가 되어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교우들이 사제관으로 달려왔을 때 그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연탄가스를 마신 그의 몸에는 보라색 반점이 번져 있었고, 기역자로 굳은 다리는 뻣뻣하게 경직돼 있었다. 그는 영 깨어나질 못했고, 병원에서도 ‘못 산다’ 했다. 사제 서품을 받은지 채 1년도 안 된 젊은 신부가 사경을 헤맨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에서 제주까지 전국각지의 교회에서 그의 회복을 구하는 기도를 올렸다.

김승훈의 어머니는 매우 열정적이고 투쟁적인 여성이었다. 그이는 ‘링거나 꽂고 앉아서 가망 없다고 하는’의사들이 영 못마땅했다. 아무리 의식이 없어도 ‘사람이 먹어야 살지 링거 맞고 살겠느냐.’는 게 그이의 생각이었다. 그이는 ‘내 아들 내가 살릴 테니 다른 사람은 상관 말라.’며 의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들에게 미음을 넣어 주었다. 그리고 안마사 두 명을 고용해서 교대로 안마를 시켰다.


교회와 가족의 정성이 하늘에 통했을까. 이 젊은 사제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일까. 의학적으로 사형선고가 내려졌던 김승훈은 이십여 일 만에 깨어났다. 다들 기적이라 했다. 당시 병실에서 김승훈의 회복 과정을 지켜본 동생 김승겸은 이렇게 말했다.
“의식이 깨어나고 나서 병원 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기억이 되살아나는데, 그 과정이 어린애 짓하고 똑같아요. 걷는 것부터 말 배우는 것까지 하나씩 다 처음부터 시작했어요. 갓난애가 네 살이 되고 다섯 살, 열 살이 되고 이런 식으로 되살아나는 거예요.”
퇴원 후 김승훈은 순교복자수녀원에서 휴식을 취했다. 연탄가스에 중독되면 뇌 손상을 입기 쉬운데, 그는 온전한 정신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회복 속도도 빨랐다. 12월 초에는 미사도 집전할 수 있게 되었고, 이듬해인 1964년 정월에는 서울소신학교 라틴어 교사로 발령이 났다. 그러나 김승훈의 시련은 이제부터였다. 사람들은 그를 도무지 정상인으로 봐 주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그것은 늘 가스 중독 사건과 연결되어 이상한 방향으로 곡해되었다. ‘연탄가스 신부님’이란 별칭에 따르는 이런 야릇한 눈총과 따돌림은 3년 동안의 교사 생활 내내 아니 그 이후까지도 끈질기게 그의 뒤를 쫓아다녔다. 김승훈은 훗날 회고록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에서, 젊은 날에 겪었던 이 같은 수모를 ‘건방지게 살지 못하도록 단련을 시키려’는 하느님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사실 김승훈은 겸손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워낙 말수도 적었을 뿐만 아니라 어쩌다 한두 마디씩 던지는 이북 출신 특유의 거칠면서도 투박한 말투는 호방하면서도 따뜻한 그의 진심을 가려놓기 일쑤였다. 게다가 넉넉한 집안에서 자라나 중학교 때 영세를 받고 소신학교, 성신대학을 거쳐 23세에 최연소 신부가 된 김승훈은 이렇다 할 좌절이나 가난을 겪어 본 일이 없었다.
대학 시절 부모의 사업 실패로 차비가 없어 쩔쩔매고 방학이면 갈 데가 없어 마음고생 한 일은 있었으나, 다소 거만하고 고압적으로 느껴지는 그의 스타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김승훈의 ‘영원한 동지’이자 신학교 3년 후배인 함세웅(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제기동성당 주임신부)은 이렇게 회고했다.

“어렸을 때 3년 차이면 크잖아요. 우러러보는 선배지. 근데 너무 어른 행세를 해. 막 5년 10년 선배 행세를 하는 거야. 우리 대학생 때 소신학교 라틴어 교사로 오셨는데, 학교에서 만나면 ‘어, 자네들은 몇 학년이지?’, 엊그제 같이 학교생활 하고 한강 가서 수영하던 선밴데 아니꼽잖아. 근데 그게 신부님 스타일이야. 워낙 뚝뚝하고, 아무한테나 반말 비슷하게 해서 조금 교만하게 비쳐지는 분이에요. 그래서 처음에 만나는 사람들은 오해를 많이 해요. 정이 많은 사람의 독특한 표현인데 그걸 알기까지 시간이 걸리죠.”

 

낮은 곳에서 눈 뜨다


자기표현과 인간관계에 능하지 않은 김승훈의 반쪽에는 열정적인 외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외할아버지 이경모는 평안남도 진남포의 재력가로, 상해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하였음은 물론 항일 운동가들의 망명과 연락 업무를 주도하다가 호된 곤욕을 치렀다.


어머니 이신덕은 성격이 대범하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에는 지나칠 정도로 모든 것을 쏟아 붓는 대단한 열정가였다. 개신교 신자였던 김승훈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신학교에 들어간 것도 어머니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물려받은 열정의 피는 아직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1962년 12월, 첫 미사를 집전하고 신당동성당 보좌신부로 임명받았을 때 김승훈은 세상을 다 가진듯한 희열을 느꼈다. 젊은 나이에 뭔가 혈기왕성하게 일을 벌이고 싶어, 수단을 입고 사방천지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곧 현실의 두꺼운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신자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여기는 보수적인 교회 분위기, 가스 중독 사건 이후 그를 정신이상자로 보는 듯한 주변의 시선과 오해,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는 그의 성격과 경험 미숙 ……. 이 모든 것들은 자신만만하고 의욕이 넘쳤던 이 젊은 사제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서울 혜화동성당과 아현동성당, 경기도 동두천성당으로 부임지를 자주 옮기는 동안, 그는 점점 더 예민해지고 점점 더 과묵해졌다. 그는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했다. 마음이 아프니 몸에 병이 찾아들었다. 폐결핵이었다. 요양을 위해 찾아든 갈멜수녀원조차 그에게 호의와 안식을 베풀지 않았다. ‘이게 신부 생활인가.’ 김승훈에게 처음으로 영적 위기가 다가왔다. 병은 더욱 깊어졌고, 그는 다시 휴양 차 부산의 태종대 공소로 떠났다. 태종대는 김승훈이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사회 문제에 눈을 뜬 곳으로, 그 자신도 ‘내 인생에서 하나의 징검다리 같은 곳’이라 고백한 바 있다.


부산 바닷가 마을의 조그만 공소에는 가난한 신도들이 많았다. 김승훈은 힘겨운 생활 속에서도 인정을 잃지 않는 신도들의 모습, 때 묻지 않은 그들의 신심에 절로 마음이 이끌렸다. 그는 때로 주머니를 털어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수입을 나누기도 하고, 곤경에 처한 신도들의 삶을 함께 아파하면서 그들과 하나가 되어 갔다. 신도들은 그를 ‘우리 신부님’이라고 불렀다. 어느 곳에서도 치유 받지 못했던 그의 마음은 차츰 건강과 활기를 되찾았다.


 

하루는 태종대 공소 바로 아래 사는 할아버지가 깡패들에게 몰매를 맞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무렵 관광지로 유명해진 태종대에는 심심치 않게 깡패들이 출몰하였는데, 할머니와 함께 행락객에게 과자며 소주, 오징어 등을 팔다가 할아버지가 당한 모양이었다. 경찰은 백주대낮에 일어난 폭력 사건을 수수방관할 뿐 아니라 다친 노인을 병원에 데려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법천지였다.분개한 김승훈은 곧장 영도경찰서에 가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졌다. 그러나 경찰은 사건을 해결하기는커녕 본당 주임신부를 찾아가 ‘태종대에 새파란 놈이 하나 와 있는데 누구냐?’며 캐묻고 돌아갔다.

 

김승훈이 연일 경찰서에 문제 해결을 요구하자 깡패들이 진단서를 떼어 가지고 와서 도리어 노인을 고소하였다. 결국 구속된 것은 할아버지였다. 분노로 끓던 김승훈의 마음이 불현듯 차가워지면서 원주의 싸움을 상기해 냈다.

때마침 원주교구에서는 대대적인 부정부패 규탄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원주교구가 5·16장학회와 함께 설립한 원주 문화방송을 둘러싼 부정이 감사 과정에서 드러났는데, 5·16장학회와 원주 문화방송 측은 여러 차례의 시정 요구를 번번이 묵살하였다. 검찰 역시 사건 처리에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지학순 주교와 원주교구 성직자들은 1천여 명의 신도들과 함께 3일에 걸쳐 ‘사회정의 구현과 부정부패 규탄대회’를 열었다.


이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처음으로 주교의 지도 아래 공개적, 대중적으로 사회악과 불의에 저항하고 나선 일대 사건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이를 지지하는 성명이 잇따라 발표되었고, 기도회와 규탄시위가 이어졌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김승훈은 매일 저녁 태종대 공소에서 노인의 구속에 항의하는 기도회를 열었다.
그러나 ‘공연히 문제를 일으키는 신부’를 경찰이 구경만 하고 있을 리 없었다. 얼마 후 김승훈은 서울교구의 부름을 받았다.

묵은 길 곁에 새 길


1972년 1월, 서울 신림동성당 주임신부가 된 김승훈은 비로소 제대로 된 사제 생활을 시작하였다. 사제서품을 받은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서울교구의 느닷없는 호출에 내막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별로 분하지도 억울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태종대에서 건강을 되찾았고, 사제로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게 되었다. 묵은 길 곁에 새 길이 있었다. 그 길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도 합당한 것이었다.
1962년부터 3년간 계속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의 존재 목적이 교회 자체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천명하고, 인간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인식을 깊이 하고 사회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교회가 사회 문제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장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공의회가 끝난 이듬해인 1966년 5월 ‘바티칸공의회와 한국 교회’라는 제목의 주교단 사목교서를 통해 이를 적극 지지하고 수용할 것임을 밝혔다. 이는 박정희의 유신 철권통치를 받게 된 1970년대 한국 교회에 엄청난 메시지를 던져 주는 것이었다.
김승훈이 신림동성당에서 민주적 사목행정을 모색하고, 지역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부제 시절부터 바티칸공의회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그로서는 전혀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다. 신림동성당을 새로 짓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그는 더 크고 강력한 시대적 소명을 향해 늘 한쪽 귀를 열어 두고 있었다. 1974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사제단)의 창립은 김승훈의 생애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다. 뜻이 맞고 죽이 맞는 평생 동지들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이라는 새 길에 투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사제단 결성을 촉발한 것은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이었다. 1971년 부정부패 규탄시위를 계기로 사회적 문제로 관심을 돌린 지학순 주교는 교회 안팎을 가리지 않고 힘없고 억눌린 자의 인권 옹호에 나섰다. 지 주교는 유신 정권의 폭압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한편 가난한 민중들과 민주화 운동가, 수배자들을 감싸 안았다.
그는 결국 1974년 7월 6일 해외여행에서 돌아오던 날 중앙정보부 기관원들에 의해 공항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된 김지하에게 돈을 주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주교단의 반발로 지 주교는 곧 석방되었지만, 7월 23일 ‘유신헌법은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다시 구속되었다.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71년 10월 17일 민주 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라는 지학순 주교의 메가톤급 발언은 ‘사회정의를 가르치고 실천할 자유는 종교 자유의 본질적 요구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었다.
지 주교의 양심선언을 지지하는 젊은 사제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1975년 2월 16일 지 주교가 풀려날 때까지 명동성당에서만 20차례 가까운 시국기도회가 개최되었고, 숱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서울·인천·전주·부산 등 전국을 돌며 기도회를 열던 이들은 좀 더 체계적인 대응을 위해 교구를 초월한 전국적인 사제 모임 결성에 합의하였다. 1974년 9월 23일 마침내 사제단이 공식 출범하였다.
김승훈은 사제단이 마련하는 시국기도회에 빠짐없이 참여하면서도 주변을 맴돌 뿐 곧장 그 중심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아직 그의 마음속에는 적극적인 활동을 방해하는 어떤 기제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함세웅은 이때 김승훈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기도회 때마다 늘 신자석에 앉아서 지켜보시는 거예요. 앞으로 모시려고 해도 ‘괜찮아, 나 여기 있을 거야.’ 그러시고. 당시엔 잘 몰랐는데, 지나고 나서야 아, 신부님이 연탄가스 마신 뒤 교회에서 따돌림 당하고 손가락질 받은 일 때문에 (사제단 활동에 누가 될까 봐) 선뜻 나서지 못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75년은 너무 살벌했거든요.
월남이 멸망하고 긴급조치 9호가 발표되면서 학생들은 계속 구속되고. 그래서 뭔가 계기를 마련하려고 76년에 명동에서 구속자 석방과 3·1 정신 실현을 위한 미사를 지내기로 했죠. 그 강론을 김승훈 신부님에게 부탁했어요. 사실 나는 신부님이 좀 머뭇거리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간에도 쭉 앞에 안 나서셨으니까. 근데 기다렸다는 듯이 ‘그래? 하지 뭐.’ 하면서 너무너무 선뜻 응하시는 거예요.”

  


사진제공 / 박용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글 / 김기선
1965년 서울 출생.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대의 불꽃> 중
『전태일』·『김진수』·『최종길』 편 발표.
현재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의 기획위원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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