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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사 이야기

낭송시인 성내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29. 10:18



대학에 다니다 군에 입대한 사병은 총을 난사해 동료를 무참히 살해한다, 대학입시에 내몰린 청소년들은 한 해에도 여러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들을 살려내야 할 어른들은 돈 다발을 싸들고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린다. 그야말로 돈 놓고 돈 먹는 투전판이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약육강식의 법칙을 숭배한지 오래인 사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다. 어디에서부터 어긋난 것일까.
“학교가 노예생활 못지않은 진학지옥을 방불케 한다. 우리의 교육열이란 일류학교에 진학해서 잘 사는 소수층에 끼이려는 몸부림인 것이다.(중략) 더욱더 문제인 것은 교육받는 동안에 되어가는 사람의 모양이다. 겉모양이야 학교 안 다닌 사람보다 도리어 말쑥하지만 그 속에 채워지고 있는 것은 짐승세계이다. 학교 교육은 사람됨으로 채워지지 않고 제 욕심 채우기 위해 친구까지 서슴없이 쓰러뜨리는 짐승 꼴을 취하고 있다.”
1980년대 초, 교육학자 성내운이 내린 진단을 거부할 이가 몇이나 될까. 현실의 억압과 싸워나간 민족열사와 민주투사를 민족의 스승으로 삼은 그는 ‘사람다운 삶’을 교육의 사명으로 알았다.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를 입고 제자를 맞으러 씩씩하게 걸어가는 그가 그리운 이즈음이다.

스승은 있다, 당신이 영원한 스승이다


연세대학교 학생처장으로 있던 성내운은 학생운동에 앞장선 학생을 제적시키라는 당국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10시간 넘게 회의를 하면서도 제적은 부당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여러 기관에서 협박전화를 받았으나 그는 끝내 학생처장으로서 학생을 쫓아내는 데 반대했다. 그리고 1974년에 터진 민청학련 사건으로 김찬·김동길 교수가 구속되자, 동료 교수와 구속 학생들의 석방을 기원하는 ‘교수 기도회’를 이끌었다. 양심적인 교육학자로서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그는 결국 1976년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연세대 제자인 김학민은 성내운을 순진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동료 교수들이나 민주화운동을 함께했던 이들이 구속되면 잠을 못 이뤘어요. 안타깝기보다는 그들이 대단한 일을 했다고 보는 거지요. 자신이 하지 못했음을 미안하게 여기는 겁니다. 그리고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고문으로 오적, 똥바다 등 판소리를 몰래 녹음할 때도 주저 없이 나섰지요. 자신의 체면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무조건 옳은 일이다, 옳은 사람이다 싶으면 도왔어요. 교수로서 폼 잡는 일은 전혀 없었지요. 누구보다 순수한 분이었지요.”


해직교수협의회 회장을 하면서 성내운은 이부영, 김종철 등 동아일보 해직기자와 학생운동을 하다가 쫓겨난 제자들과 어울렸다. 그것은 곧 학교와는 다른 민주화운동이라는 세계로 나아가는 지름길이었다. 그 무렵 그를 살맛 나게 한 것은 시낭송이었다. 어느 날 구속자 가족이 주최하는 모임에서 그는 양성우의 <겨울공화국>을 낭독했다. “차라리 과녁으로 나란히 서서/사나운 자의 총 끝에 쓰러지거나” 하고 성내운이 부르짖자 좌중은 신음과 흐느낌으로 넘쳐났다.
“대학에서 쫓겨났을 때는 이제 내가 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요새는 정말로 내가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오. 대학으로 돌아가는 일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아버지가 산지기를 했던 가난한 집 출신인 성내운이 학비가 싼 경성사범 예과에 들어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까까머리 학생 성내운은 그곳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일본인 스승을 만난다.
“나는 선생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자네에게 충고한다. 지금 자네는 제 나라를 힘으로 강점하고 총칼로 수탈하며 백성을 마음대로 죽이는 침략자의 나라를 찬양·존경하도록 교육받고 있다. 진정 자네가 사람답게 살고자 한다면 지금 학교를 자퇴하라. 그리고 자네의 민족을 위해 옳은 길을 찾아 그 길을 떠나라.”
장학생은 마음대로 자퇴할 수 없음을 안 청년 성내운은 고민 끝에 스스로 몸을 해치는 길을 택한다. 그리하여 큰 누이의 집 뒤란에서 숯이 둥둥 떠다니는 짜디짠 조선간장 한 바가지를 순식간에 마신다. 폐결핵에 걸린 증세와 비슷한 고열과 기침이 계속되면 진단서를 첨부해 학교를 그만두려는 속셈이었다. 신열에 들뜨고 혼수상태에 빠진 그에게 의사는 다만 ‘한 주간의 입원 안정을 요함’이라는 진단을 내릴 뿐이었다.


“성내운 선생은 머리도 기막히게 좋으려니와, 대학 다닐 때부터 자전거로 막걸리를 배달하면서 영어 단어장을 가지고 공부한 사람입니다. 미군이 군정 3년을 끝내고 돌아갈 때, 우리나라에 고문단 세 사람을 남겨요. 군사고문단, 경찰고문단, 교육고문단이지요. 그때 성 선생은 일본에서 해방된 우리한테 미국식 가치를 심어주려는 미국인들의 속셈을 알아챈 거지요.”
송기숙의 말처럼 교육학을 전공하고 영어가 능통했음에도 성내운은 미국 교육사절단의 초청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미군정 기간 동안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음을 우리 민족의 뼈저린 한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1984년 ‘민중교육지 필화사건’으로 구속된 송기원, 김진경, 윤재철의 재판에 변호인 측 증인으로 나간 성내운은 자신의 교육이념을 유감없이 펼친다.
“교육의 민주화, 민중화는 바로 우리 교육의 지표이기도 합니다. 저 선생님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정부에서 해야 할 일을 그들이 앞장서서 주장했다는 점뿐입니다. 잘했다고 상을 주어야 마땅할 일을 법정에 세우다니 말이 됩니까!”
 

우리의 교육지표


1975년 박정희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한다. 학도호국단을 결성한 전국 고교와 대학을 병영체제로 만들고, 교수재임용제를 무기로 양심적인 교수 4백여 명을 교단에서 추방한다. 유신정권 하에서 교수들은 학생을 감시하고 시위를 막는 앞잡이로 전락한다.


“교수들이 마치 강의시간표 짜듯이 누구는 도서관 앞에서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누구는 사범대학 벤치 옆에서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이런 식으로 보초를 서서 학생들을 감시해야만 했다. 이것이 과연 교수가 할 짓인가?”(송기숙, 광주지방법원 1심 공판 최후진술 중에서)
성내운은 박정희 유신정권의 폭압에 항의하자는 전남대 교수 송기숙의 뜻을 선뜻 받아들였다. 해직교수협의회 회장이었던 그에게는 무슨 낯짝으로 강단에 설 거며, 교육은 뭐가 되겠느냐는 송기숙의 항변이 구구절절이 옳았다.



진실과 인간적 품위를 존중하는 교육은 나날이 찾아보기 어려워가고 있다. (중략) 오늘날 교육의 실패는 (중략) 민주주의에 우리 교육이 뿌리박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국민교육현장은 바로 그러한 실패를 집약한 본보기인바 (중략) 이 땅에 인간다운 사회를 실현하고자 (중략) 우리의 교육지표에 합의하고 그 실천을 다짐한다. (후략)

이른바 1978년 6월에 터져 나온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은 학원의 인간화와 민주화를 바라는 교수들의 몸부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성내운은 기왕 너무 깊이 관여했으니 표면에 나서버리는 게 어떻겠냐는 송기숙의 제안을 ‘그러지요’ 하며 두말 않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선언문 발표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서울대, 한신대, 대구지역 대학과 전남대 11명을 합쳐도 고작 29명밖에 안되었다. 애초에 50명은 넘어야 움직이기로 했던 터라 성명서 발표를 자연스레 취소하기로 했다. 그러나 성내운은 생각이 달랐다. 성명서를 각 대학 교수들에게 돌리고 영어로도 번역해서 AP통신과 아사히신문에 보내버렸다. 그리고 곧장 광주로 내려가 송기숙한테 일을 터뜨렸다고, 서울 쪽 사람들이 흐지부지 된 것 같아 전남대 교수 11명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노라고, 지금쯤 전파를 타고 한참 날아가고 있을 거라고 용서를 구했다.

“50명은 돼야 한다, 요걸 전제로 해서 도장을 찍은 거란 말이에요. 자기들은 쏙 빠지고 전남대 교수 11명 이름으로 발표를 했다니 얼마나 황당하냔 말이에요. 성내운 선생이 ‘나 맞아 죽으려고 왔습니다.’ 그러더라고. 말문이 탁 막히지.

그래서 서명 교수들 다 불러서 소주 한 잔씩 먹고 ‘에이, 이런 것 각오하지 않았냐고, 내일 잡혀갈 각오하고 마누라한테 얘기나 잘하라’며 돌려보냈지요.”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으로 송기숙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 4년을 선고 받았고, 나머지 교수 10명들은 해직되었다. 성내운은 6개월 동안 수배생활을 하다가 1979년 1월 체포되어 광주교도소에 수감된다.


성내운은 왜 홀로 성명서를 발표했을까. 1973년에 중앙정보부(현재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던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고문으로 숨진 사건이 있었다. 성내운은 송기숙이 그처럼 당할까봐 선수를 친 거였다. 송기숙이 선언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중앙정보부 안테나에 잡힐 거고, 그렇게 되면 송기숙은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서 제2의 최종길 교수 꼴이 될 게 뻔했다. 그 때문에 일단 터뜨려서 공개를 하는 쪽이 송기숙을 살리는 길이라고 판단한 거였다.
성내운은 법정에서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와했다.” 하고 윤동주의 <서시>를 당당하게 낭송했고, 그를 보는 판사의 곤혹스러운 얼굴은 볼만 했다. 그때 방청석에서 누군가 “저럴 바엔 나는 피고하지 판사 않겠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남의 목소리는 수천 꿈속에 살아


“한마디로 정열 덩어리야, 나이를 먹어도. 언제 어디 가서 요구만 하면 타악 분위기를 잡아갖고 시를 외우는데 정말로 참, 시인들 시 읽으면 분위기 못 내잖아요. 말하자면 ‘여보게/우리들의 논과 밭이 갈아 앉으며/한꺼번에 한꺼번에 죽어가는 것을 보았는가/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대는/여보게/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하고 감정 잡아 읊어대면 그야말로 양성우 지음, 성내운 완성 이라고 했지요.
그 분은 감옥에서도 그랬어요. 감옥 갔다 온 학생들이 그러더구만. 첫날부터 검정고무신에 죄수복을 입은 채 감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시를 낭송했다지. 교도관이 못하게 하면 ‘가만있어’ 해놓고 시를 낭송하구.”



송기숙의 증언처럼 성내운은 바지저고리를 입고 시를 낭송하면 어느 자리에서도 돋보였다. 높낮이가 알맞게 길들여진 힘 있는 시낭송은 어디에서나 청중을 사로잡았다. 원고 없이도 글자 한 자 틀리지 않았다. 때로는 낭송하기 좋게 시를 잘라 내거나 살짝 덧붙이는데, 그렇게 고쳐 읽은 게 훨씬 생생하게 다가올 만큼 감동을 안겨주었다.
강연을 하더라도 무려 2시간을 시낭송으로 채웠다. 한용운의 <복종>, 이육사의 <광야>, 윤동주의 <서시>, 양성우의 <겨울공화국>,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문익환의 <꿈을 비는 마음>, 정희성의 <불망기> 등 40여 편의 시낭송에 곁들인 해설은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수난사였다.


미국에 가서 성내운은 교포들을 위해 60여 차례 강연을 하면서도 차편과 침식 외에는 사례를 거부했다.
“여보, 나라 안 사정을 내가 돈을 내고서라도 가서 얘기해야 할 판인데 돈을 어떻게 받겠소. 차비하고 숙식이야 내가 돈이 없으니까, 어쩔 도리 없지만.”
사람들은 성내운이 어떻게 그 많은 시를 외우고 다니는지 늘 궁금해 했다. 그리고 그의 기억력을 놀라워하기 일쑤였다.
“시를 외우는 일이 기억력만 가지고 되는 줄 아오? 시를 외려는 정성을 모르다니 섭섭하오. 하도 좋아서 읽고 또 읽다보니 어느새 외우게까지 된 것이지만, 그래서 혼자서 있게라도 되면 소리를 내어 외우고는 제 귀로 듣게 된 거지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낭송분과 위원장으로 불렸던 성내운의 시 읽기는 삶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날 버스를 탔던 그는 안내양한테서 신경림의 시 <4월 19일 고향에 와서>가 실린 주간지를 되돌려 받았다. 그 시를 읽어 보았느냐고 했더니, ‘읽다 뿐인가요, 다 외웠는걸요, 참 쉽고 좋았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 그 시를 그가 처음으로 낭송한 것은 시골 고향에서였다. 고향을 떠나던 어느 날 농사를 지으며 평생 살아온 노인들을 사랑방에 모시고 시를 들려주었다. 학교는 물론 서당 근처에도 안 간 분들인데, 그 시를 송두리째 이해했다. 다들 흐뭇해하셨고 심지어 두고두고 낭송하게끔 시를 종이 위에 적어달라는 분들도 있었다. 성내운은 단순히 남의 시를 외우는 데 그친 게 아니었다. 민족 모두의 것이 된 주옥같은 시를 그 민족의 일원으로 불렀을 따름이었다. 즉 자신의 노래를 스스로 부른 셈이었다.
시낭송은 송기숙의 말처럼 곧 인간 성내운이었다.
“성 선생은 옳은 일이다고 판단하면 주저하지 않고 결행합니다. 시를 낭송할 때의 그 시처럼 정확하고 확고하지요. 시처럼 순수한 마음의 바탕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성 내 운>

1926년 충남 공주군 신풍면 산정리에서 출생
1939년 경성사범 예과에 입학
1946년 이우영 여사와 결혼
1960년 제2공화국 정부 문교부에서 수석 장학관
1968년 연세대 교정에 윤동주 시비 추진 책임 완공
1974년 구속자 석방 위한 교수기도회 6일 동안 진행
1976년 재임용에서 탈락, 해직
1978년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으로 긴급조치 9호 위반 구속
1979년 8월 1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
1980년 연세대에서 또 다시 해직
1984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고문, 두 번째 복직
1985년 ‘민중교육지 필화사건’의 증인
1986년 민주교육실천협의회의 공동대표
1986년 회갑기념 논문집 ‘민족교육의 반성’ 헌정 받다
1989년 3월 광주 경상대학 제3대 학장으로 취임
1989년 5월 광주지역 10개 대학 총장이 참여한 영광핵발전소 11,12호기 건설반대 성명 주도
1989년 5월 조선대생 이철규 군 변사사건 진상규명촉구 성명 발표
1989년 6월 전국교원노조탄압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의장
1989년 6월 이한열추모사업회 이사장 취임
1989년 9월 조선대 이돈명 총장 해임 반대 및 학원민주화 성명 주도
1989년 12월 25일 백혈병 진단받고 입원 중 운명


사진 도움 / 박용수
글 / 윤동수
1960년생
1990년 사상문예운동 겨울호에 「새벽길」 발표
2003년 평전 『윤상원』 발간
2004년 단편 「바람 속의 거미집」을 『문학과 경계』 여름호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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