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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운동권의 각종 인쇄물을 지칭하는 은어였던 ‘피(P).’ 실로 그것은 운동의 피(血)요 무기였다. 그것은 군사정권의 감시망을 피해 점 조직으로 연결된 구성원들을 동일한 입장과 원칙으로 묶을 수 있는 용이한 도구였고, 지하 언로였으며, 정보에 굶주린 대중의 귀에 정의와 진실의 소리를 들려주는 데 없어서는 안될 선전수단이었다. 러시아의 혁명가들이 근거지를 옮길 때마다 인쇄기를 끌고 다닌 것도, 볼셰비키가 ‘이스크라’를 제작한 그 유명한 코카서스 지하 인쇄소를 손아귀에 넣기 위해 애를 쓴 것도 바로 이 인쇄의 중요성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 사회주의 운동가 이재유는 ‘편지 한 번 주고받는 데도 한 달이 걸리는’ 머나먼 땅으로 망명을 권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반문했다. “국내 상황을 전달하는 데 한 달 잡고, 다시 인쇄해서 들어오는 데 석 달이 걸린다는 이야기인데,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노동 현장을 넉 달 전의 지침으로 지도하란 말입니까?”(안재성, 『경성트로이카』에서)
7, 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쏟아져 나온 그 많은 인쇄물들은 누가 다 만들었을까. 돈도 없고 믿을 만한 인쇄업자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 운동권 젊은이들은 속칭 ‘가리방’을 긁어서 먹물 묻은 롤러를 얇은 청색의 스텐실 페이퍼 위에 대고 한 장 한 장 밀어 유인물을 만들었다. 등사 인쇄는 글씨도 흐리고 조악한데다가 위험 부담도 컸다. 등사기와 롤러를 옮기다가 재수 없게 걸리기라도 할 양이면 모든 것을 뒤집어써야 했다. 그렇다고 기밀 유지가 생명인 이런 문서를 아무 인쇄업자한테나 맡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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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어엿한 활판 인쇄기로 찍어 내는 인쇄물은 금세 그 제작처가 드러나기 마련이어서 중앙정보부나 경찰에 잡혀가 치도곤 당할 게 뻔한 일을 선선히 맡아서 해줄 업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위험 부담을 감수하는 조건으로 몇 곱의 급행료를 받아내기 마련이었다. 60평생을 인쇄쟁이로 살다 간 강은기의 존재는 그래서 더욱 귀하고 값지다. 2002년 11월 췌장암으로 돌연 세상을 떠난 세진인쇄 사장 강은기. ‘긴급조치 시대’로 불리던 1970년대 후반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강당에서 매주 열리던 기도회에 ‘허수룩한 점퍼 차림’으로 꼬박꼬박 참여하던 사람, 6·10항쟁의 열기가 전국을 후끈 달구던 87년 6월의 거리에서 입술 끝이 눈가에 닿게 하회탈처럼 웃던 사람. 그는 ‘운동권’에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운동권 집회나 모임에서 그를 발견하는 사람들은 ‘혹시 형사나 기관원이 아닐까.’ 하고 따가운 눈길을 보내곤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의심의 눈초리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모임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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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이 있는 곳에 그가 있다
7, 80년대 대표적인 투쟁의 현장에는 어김없이 그가 만든 유인물이 뿌려졌다. 70년대 말 신민당사를 점거했던 YH 여성노동자들의 유인물을 비롯해서 76년 3·1 민주구국선언문, 서울대 김세진 열사 자료집, 김재규의 항소이유서, 5·18민중항쟁 관련 유인물, 청계피복노조 합법화투쟁 관련 유인물, 민청련·민통련 등 발간할 때마다 경찰과 숨바꼭질을 벌여야 하는 재야단체 기관지에 이르기까지, ‘민주화운동이 있는 곳에 그가 만든 유인물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대가로 그는 수도 없이 정보기관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일선 경찰서는 말할 것도 없고 보안사, 중앙정보부에서도 툭하면 그를 잡아들였다. 모든 시국사건에는 인쇄물 문제가 걸려 있기 마련이고 그는 그때마다 끌려가서 ‘아귀’를 맞춰 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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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가 본 경찰서가 없죠. 80년대 말인가, 하루는 형이 그날따라 요래요래 손을 꼽아 보더니 ‘야, 우리가 옥인동만 안 가고 다 갔네.’ 그러더라구요. 그날 저녁에 옥인동(경찰서) 들어갔잖아요. 갔더니 ‘해방선언’이라고 우리가 찍은 것도 아냐. ‘세진’이 워낙 유명하니까 잡혀 간 아이가 우리 이름을 댄 거예요. ‘세진’이라 그러면 그냥 나갈 줄 알았대요. ‘여기(세진)를 안 거쳐 간 사람은 운동권이 아니’라는 농담을 할 정도로 운동권 소굴이었지. 운동단체뿐만 아니라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도 여기 많이 왔어요. 그 양반들 ‘언제 좋은 세상 되면 한번 웃고 살아 보자.’고 하더니만 아직 좋은 세상이 아닌가 봐….”(77년부터 세진인쇄에서 한솥밥을 먹은 동생 강은식 씨의 술회)
응암동 나 300호
조승혁 목사는 강은기를 일러 ‘업을 통해 자기의 의를 나타내고자 하는 사람’이라 했다. 실제로 강은기는 평생 ‘운동하는 마음으로’ 인쇄를 했다. 그에게 인쇄는 밥이요, 피요, 운동의 무기였다. 중학교도 채 마치지 못하고 인쇄를 배운 강은기에게 누가 그 ‘마음’을 가르쳐 주었을까. 그에게는 거창한 이름의 조직도, 생의 좌표를 제시해 줄 은사도 없었다.
그를 가르친 것은 한국전쟁 직후 농촌의 빈곤과 집안의 몰락, 지리산 빨치산이 마지막으로 토벌되던 무렵의 살벌한 시대 상황이었다. 전쟁통에 죽거나 다친 어른들, 가난 때문에 소학교도 못 들어간 벗들을 아프게 지켜보며 성장한 그는 이승만 정권 하의 부패한 정치인들이 ‘지프차를 몇 대 해 먹었네.’ 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피가 끓었다. 고향인 남원에서 2년 동안 인쇄일을 배우던 강은기는 1960년 3월 말에 ‘직감적으로 뭔가 터질 것 같은’ 느낌에 부랴부랴 단신으로 상경했다. 열아홉 살의 순진하고 내성적인 청년이었지만 저돌적인 구석도 없지 않았다.수중에 돈이 떨어지자 강은기는 충무로 입구의 한 인쇄소에 무작정 쳐들어가 취직에 성공했다. 잠자리는 공장에 다락을 만들어 해결했다. 이윽고 4·19가 터지자 그는 올 것이 왔다는 기분이었다. 이 돈키호테 같은 청년은 역사적 현장에 함께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하루 종일 시위 행렬을 좇아 서울 거리를 헤매 다녔다.
4·19혁명으로 고양된 그의 의식은 보다 수준 높은 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했다. 그는 돈이 생기는 대로 『사상계』나 『씨알의 소리』를 구독하면서 ‘지적 공허감’을 메워 나갔고, 남은 돈으로는 시골에서 올라온 친구들에게 밥과 술을 사주었다. 스스로 ‘사회적 욕구가 없다.’고 표현했듯, 그는 자기를 위해서는 참으로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청년기의 지적 갈증은 대개 ‘좀 더 공부해서 대학을 나와야겠다.’는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요, 역사와 사회문제에 대한 유다른 관심은 흔히 정치적 야망으로 변질되곤 하지 않던가. 강은기에게는 그런 잇속과 타산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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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순수하게 분노했고 순수하게 염원했다. 그 이듬해, 군인 박정희가 5·16 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하자 극도로 절망한 그는 머리를 깎고 법주사에 들어갔다. 강은기라는 ‘꿰어지지 않은 보석’을 발견해 낸 이는 이해학 목사였다. 그는 강은기의 중학 동창이었다. 이해학이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광주로 나온 뒤 그 두 사람은 서로의 소식을 전연 모르고 있었다. 두 친구가 다시 만난 것은 63년경 서울 응암동에서였다.
“우리 교회 선배들이 나보고 학교(한신대)에 다니라고 불러들인 곳이 바로 응암동이었어요. 거기는 원래 한강변 수몰지역 주민들이 집단이주해 온 곳이었죠. 그런데 박광수라는 목사님이 서울에 올라와 공부하거나 일하는 고향 사람들을 위해 그곳의 집을 한 채 빌려줬어요.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일종의 합숙소인 셈이죠. 우리끼리 ‘응암동 나 300호’라고 부르던 바로 그 집에 강은기 씨가 온 거예요.”(이해학 목사의 술회)
이해학과 같은 교회를 다닌 것은 아니지만 강은기 역시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응암동 나 300호에서의 공동생활은 강은기에게 상당히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당시 신학생이었던 이해학, 이호영, 훗날 『태양인 이제마』를 쓴 최형규(한의사) 같은 학생들과의 교유는 여러 모로 그의 지적·정치적 갈증을 채워 주었다. 이들은 경제적 자립을 위해 공동으로 세탁소를 운영했는데 경험도 없고 기술적으로 미숙하다 보니 크고 작은 실수가 끊일 날이 없었다. 하루에 국수 두 끼로 버티며 적은 수입에 매달린 입을 채우려 모두가 노력했지만 결국 오래지 않아 해체되고 말았다.
“가난의 밑바닥을 사는 그런 삶이었죠. 나도 학교에 안 갈 때는 석짐을 짊어지고 북아현동 주택가에서 축대 쌓는 일을 했는데, 그때 강은기 씨가 그 석짐 지는 일을 함께하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나하고 가까워졌는데 사실 재밌는 성격은 아니에요. 말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그냥 툭툭 이렇게 뱉는 형이죠. 얘기를 듣고 있다가 다른 사람들은 그냥 넘어가는 것을 딱 꼬집어서 한마디씩 하는 게 문제의 정곡을 찌르는 그런 역할을 했어요. 어떻게 보면 고민을 너무 많이 하는 형이랄까. 그래서 언제부턴가 우리는 강은기를 ‘도인’이라고도 부르고 가끔 불경 같은 것을 인용할 때는 ‘스님’이라고도 불렀어요.”(이해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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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해 봤자 유식한 놈밖에 더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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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은 가끔 그에게 말했다. ‘은기, 너는 왜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고 이렇게 허송세월하니.’ 그럴 때면 그는 대답하곤 했다. ‘너희들처럼 공부 열심히 해봤자 유식한 놈밖에 더 되겠냐. 나는 무식한 놈 될란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아냐. 무(無)를 아는 세계의 사람이 되겠다 이 말이야.’ 1961년 5월에 출가한 뒤 1년 넘게 행자생활을 한 그의 세계와 인생에 대한 고민은 더욱 깊어져 있었다. 법주사에서 하산한 그는 한동안 고정적인 일자리를 가지지 않고 약간의 돈만 벌리면 책을 사보았다. 『현대문학』을 구독하는 등 문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도 아마 이 시기부터였을 것이다.
黑을 만지면서 장난 한번 했더니 여자의 배가 밝아지더라 밝에서 한 아이가 생겨나더니 커서 살인자가 되더라 터덜터덜 무악재를 넘어 오는데 죽임을 당한 자들이 흩어져가더라 떨린 손을 들어 무악재를 쳤더니 손이 부러져 병신이 되더라
-'보낼 수 없어’ 전문(원문 표기 고치치 않음)
그러나 공동생활이 해체된 후 오갈 데 없는 몸으로 이해학 모자(母子)가 사는 작은 방에 기식하게 되자 강은기는 다시 인쇄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직장에 꾸준히 있지는 못했다. 그는 쥐꼬리만한 월급을 주고도 무리하게 일을 시키고 직공들을 노예 취급하는 을지로 인쇄공장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참지 못했다.
“주인이 좀 난폭한 말을 하면은 왜 그러느냐고 따지고 대들어요. 어떨 때는 두어 달, 어떨 때는 한 달도 못돼서 쫓겨날 때도 여러 번 있었죠. 하여간 한참을 전전했어요, 인쇄소를. 근데 그게 그 분의 성격이에요. 고민을 하기 때문에 문제를 봐요. 이래선 안된다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못 느끼는데 이 사람은 느끼는 거죠.”
60년대 중반 이해학이 군대를 가게 되자 두 사람은 다시 헤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1971년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을 만들기 위해 위수령을 발동하고 전국의 데모 주동자 173명을 제적시킬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그해 말, 신문을 보던 강은기는 제적자 명단에서 이해학이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이 무렵 강은기는 ‘불같은 성질’을 눅이고 몇 년 동안 열심히 일한 끝에 작은 인쇄소를 직접 운영하고 있었다.
“유신 직후에 나는 박형규 목사님이 하시는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KMCO)라는 빈민 선교단체의 실무자로 일하게 되었어요. 당시 KMCO 총무였던 권호경 목사가 선배 목사들과 함께 ‘1972년 신앙고백서’라는 선언을 발표했어요. 크리스찬으로서 이 독재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정리한 거예요. 권 목사가 이 선언을 극비리에 조그마한 소책자로 만들려 하는데 맡길 사람이 없다는 얘기를 해요. 그래서 내가 강은기를 데려온 거예요. 그 살벌한 상황에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못한다고 했을 거예요. 그런데 강은기는 대뜸 ‘내가 하겠습니다.’ 하고 원고를 받았어요. 가서는 어떻게 일을 했냐. 직원들을 다 퇴근시키고 문을 걸어 잠갔어요. 그리고 활판 인쇄로 책자를 만들기 위한 공정을 혼자서 다한 거예요. 그 추운 밤에 꽁꽁 언 손으로 혼자 활자를 뽑고 조판을 하고 교정을 보고 인쇄를 걸고, 밤새 그걸 만들어 가지고 제본까지 해서 아침에 기독교회관에다 딱 납품을 했어요. 그때부터 강은기가 민주화운동의 본산인 종로 5가와 인연을 맺게 된 거예요.”
글 / 김기선 1965년 서울 출생.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대의 불꽃> 중 『전태일』·『김진수』·『최종길』 편 발표. 현재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의 기획위원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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