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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에서 불법으로 도청한 테이프가 날마다 우리 사회를 흔들어대고 있다. 내용이 공개된 테이프에는 어느 중앙 일간지 사주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그 사주는 대선 후보의 정치자문을 서슴지 않았다. 그뿐 아니다. 모 그룹 회장의 선거 자금 배달부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돈으로 권력을 매수하려 한 족벌언론 사주답게 그는 다른 후보에게도 선거자금을 대는 치밀함을 보였다. 특정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그는 신문을 사사로운 도구로 이용한 셈이다. 상상해 보라! 정치권력을 움켜쥐려고 음모를 꾸미는 언론사 사주의 추악한 뒷거래 풍경을!
불법 도청 테이프를 퍼뜨린 전직 기관원은 공중파 방송사와 신문사의 ‘치부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로서는 도청 테이프를 폭로한 언론사의 행태나 재벌의 하수인 노릇을 한 언론사나 역겹기는 마찬가지였을까? 자신을 잘못 건드리면 ‘언론에 재갈을 다 물려놓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리 사회에서 한다 하는 언론사들이 하나같이 퇴직 기관원에게 ‘언제 너희들이 발칵 뒤집어질 날이 올지 모른다.’고 협박을 당한 꼴이다.
그런데도 언론은 도청 테이프의 내용을 밝히라는 국민들의 요구를 들은 척도 안 한다. 기관원의 경고대로 자신들의 더러운 행태가 드러날까 봐 두려운 걸까. 오로지 불법도청에만 초점을 맞추며 여론을 거스르기에 급급하다. 어쩌다가 우리 사회의 언론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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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에서 해직되다
1974년 긴급조치 1,2호를 발표한 박정희 유신정권은 무자비한 언론탄압에 나섰다. 아침저녁으로 기관원이 신문사에 출입하며 ‘빼라’, ‘끼워라’, ‘그런 식으로 보도하지 말라’, ‘이 문제는 사설로 다루어야 한다.’ 고 간섭하는 게 그 무렵 신문 제작의 현실이었다. 대학생들의 데모기사를 빼라는 압력을 거부한 동아일보는 정권의 눈엣가시나 마찬가지였다. 독재정권은 즉시 기업주들에게 압력을 가했고, 동아일보는 주 수입원인 광고 없이 백지로 신문을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정권의 탄압에 맞선 기자들은 1974년 10월 24일, 노조를 만들고 정보기관원의 신문사 출입을 금지하라는 내용을 담은 ‘자유언론실천선언’ 성명서를 발표했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 성유보는 성명서 내용에 대해 “정부 권력이나 외부 간섭에 대해 편집권을 지킨다, 기사는 우리 판단대로 쓴다, 기사와 관련해서 그때는 연행하고 고문하고 협박하니까 정권의 탄압을 개인차원으로 내버려둬선 안 된다, 집단으로 저항한다, 기사와 관련해서 기자가 연행되면 그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전 사원이 회사에서 농성한다. 핵심은 그것이다.” 라고 잘라 말한다.
송건호는 기자수첩 맨 앞장에 ‘안중근의 유훈’인 ‘인내와 노력, 이 두 가지가 있으면 이 세상에서 못 할 것이 없다. 인내야말로 환희에 이르는 길이다.’ 라는 글귀를 써넣고 다녔다. 그는 그 수첩에 광고 파동을 생생하게 기록하기도 했다. ‘광고 탄압으로 백지가 된 지면을 국민들이 메우기 시작했다. 독자들의 격려 광고 게재는 기자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마음까지 울리고, 기자들은 제작 거부에 들어갔고, 정권의 압력에 굴복한 회사는 주동자들을 해고시키고…….’ 편집국장이었던 송건호는 ‘약 130여 명 중 거의 50여 명을 내 이름으로 해임한다는 것은 죽으면 죽었지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정권에 굴복한 사주가 150여 명이나 되는 기자와 사원들을 쫓아내자, 그는 기자들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기로 결심한다. 마침내 송건호는 1975년 3월 15일 오랜 고민 끝에 사표를 제출한다. 사장과 주필에게 “이와 같은 방법으로 문제를 수습하면 20년 후에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겁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20년이 아니라, 30년이 흘렀건만 족벌언론 사주들을 겨냥한 송건호의 예언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서 우리 사회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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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보다 더 용감하게 사표를 딱 쓴다, 이건 대단하다. 그 무렵엔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던 시대인데, 선생님은 편집국장으로서 선택을 한 거지요. 그때 운동권 노래 중에서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 원한다’ 라는 노래가 유행했어요. 말이 그렇지 쉽나요. 우리야 젊은 혈기에 그랬다지만 송건호 선생은 정말 귀한 분이고 기자들의 사표가 된 분이지요.”
언론인의 진면목을 보였다는 성유보의 회고대로 송건호가 흔들림 없이 걸어가려고 했던 길은 ‘참 언론인’이었다. 그가 폭력에 맞선 것은 투사여서가 아니라 불의와 타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직서를 쓰면서 송건호는 두 차례나 울었다. 쫓겨나는 후배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언론인으로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해직당하는 게 서럽고 다시는 언론계에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는 농성하는 기자들과 함께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송건호에게 기자란 무엇인가?
“단순한 정보 전달자가 아니라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을 이끌어가는 사람이다. 언론인은 사상가가 되어야 한다. 신문기자라고 해서 어느 때는 이런 글을 어느 때는 저런 글을 쓰는 대서소 서기와 같은 사람이 되서는 안 된다. 양심에 따라 글을 써야 한다.”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한 신문을 만들다
7,80년대 해직된 기자들과 함께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를 만든 송건호는 1985년 12월 월간 『말』지를 창간하였다. 『말』지는 제도언론에서 다루지 않았던 미문화원 점거 사건이나 비참한 노동자들의 현실을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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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지를 편집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경찰들이 편집실을 덮쳐서 인쇄하려고 만든 초본을 빼앗아갔다. 창간호를 만들 때, 여섯 차례나 편집실을 바꾸고 도망 다니다 서대문 샛길 여관에서 마지막 편집을 했다.” 최민희의 증언대로 정권의 탄압은 극심했다. 모든 언론사는 기사를 쓰고 편집하는 데 정권의 지침을 따라야 했다. 이를테면 ‘고문 관계는 오늘도 쓰지 말 것’ ‘광주사태 유가족 인터뷰는 싣지 말 것’ 따위였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보도지침’을 어기면 기자와 편집자를 연행해서 구타했다.
국회 언론청문회에서 한국일보 기자 김주언은 이렇게 증언한다. “신문사 편집국에 정보기관원이 상주하면서 편집 기사를 하나하나 간섭했고, 문공부에서 유선이나 말로 보도지침을 내리고, 보도내용을 일일이 간섭하고……. 언론 통제가 극에 달한 시기였다.” 보도지침을 낱낱이 실은 『말』지를 발행한 민언협 회원들이 구속되자, 송건호는 그 『말』지를 복간하자고 주장했다. ‘침묵의 자유조차 여의치 않은 상황의 괴로움을 많은 지식인들은 경험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선에의 의지를 버려서는 안 된다. 그것으로서도 그 지식인이나 신문은 앞날의 타락을 면할 수 있는 희망이 남는다.’
80년대를 지나며, 군사정권을 뒷받침하는 기관으로 변질하는 언론을 지켜본 송건호는 자본과 권력에서 독립한 신문을 꿈꾸었다. 1987년 6월 항쟁을 겪으면서 그의 주장은 차츰 현실로 드러난다. 1987년 10월 30일, 자본과 권력에서 독립한 신문을 만들기 위한 창간 발기인 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국민주 모금운동을 시작하였다. 목표액은 50억이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그 무렵 국민들은 대통령선거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송건호는 모금운동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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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금이 시작됐는데, 처음에는 매우 부진했어요. 선거해서 군사독재를 바꿔야 하는데 신문을 만드냐고, 신문 하나 만드는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데, 그 돈 있으면 딴 거 하지 그런 분위기였어요. 과연 잘 될까 했는데, 역설적이게도 87년 대선에서 노태우가 당선되는 바람에 6월 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이 엄청난 실망을 하고 신문모금에 뛰어들었어요.”
불가능할 것 같았던 50억 원이 모이고 드디어 창간호 준비에 들어갔다. 송건호는 편집국에서 기자들을 모아놓고 연설했다. 그는 기자의 자율성을 강조했다.
“무슨 문제든지 여러분들이 쓰고 싶은 대로 다 써라. 말하고 싶을 때 표현에 조심하라. 그러나 항상 국민의 지지를 받는 신문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한국 언론의 새 지평을 연 한겨레신문은 드디어 1988년 5월 15일 창간되었다. 그는 감격에 젖어 창간사를 써내려갔다.
‘한겨레신문의 모든 주주들은 결코 돈이 남아 투자한 것이 아니요, 신문다운 신문, 진실로 국민대중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참된 신문을 갈망한 나머지 없는 호주머니 돈을 털어 투자한 어려운 시민층이므로 이 신문은 개인 이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재래의 모든 신문과는 달리 오로지 국민대중의 이익과 주장을 대변하는 그런 뜻에서 참된 ‘국민신문’임을 자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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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에 사직서를 던진 지 14년 만에 송건호는 다시 자신의 자리인 언론인으로 돌아왔다. 그에게 신문은 역사였고 기자정신은 역사의식이었다. 송건호는 평생 실천해온 좌우명을 후배들에게 남겼다.
‘나는 글을 쓸 때마다 항상 3,40년 후에 과연 이 글이 어떤 평가를 받을까를 생각한다. 먼 훗날에도 욕을 먹지 않기로 다짐한다. 크게는 민족을 위해서 적게는 내 자식들을 위해서. 어찌 더러운 이름을 남길 수야 있겠나를 생각해 본다.’
역사 앞에 정직했고 인간에게 다정했던 대쪽 같은 선비
“전두환 정권시절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할 때 선생께서 고기 다섯 근과 돈 5만 원을 들고 직접 찾아오신 적이 있다. 당시 선생도 옥고를 치른 지 얼마 안 돼 고생하면서도 늘 남을 먼저 생각하시는 인간적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백기완은 송건호를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80년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 일요일마다 산에서 “하루 종일 떠들고 허튼소리 하다가 저녁 때 집에 돌아와 목욕을 하고 나면 그 이상 즐거움이 없었다.”는 그를 ‘거시기 산악회’ 회원인 이돈명은 요구르트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산에 가는데 요구르트를 가져와, 여러 개를 말이지. 그래서 이거 어디서 사냐고 했더니, 아침마다 모아서 가져온다고 해. 그래서 별명이 요구르트야. 순진무구한 소년 같아요.”
강직하다는 인상을 준다는 사실을 못 마땅해했던 송건호는 스스로를 어떻게 보았을까. ‘남산 지하실에 끌려갔을 때 송 아무개가 어떻게 생긴 놈이기에 악명이 높으냐고 하면서 수사관이 찾아와서 보더니, 악질이라고 해서 굉장히 험악하게 생긴 줄 알았더니 선비 같고 호인으로 생겼다고 하더군요.’ 그는 그곳에서도 수사관들이 혀를 차거나 말거나 좋아하는 우유로 천연덕스레 밥을 말아먹었다.
“우리가 송진사라고 그래요. 유생적인 데가 있어. 술 담배도 안 하고, 점잖고, 말수 적고, 조신하고, 생활이 청렴하고 결백하다 하여 송진사다. 이런 사람이 자기 비위에 어긋나면 고집을 꺾지 않아. 대쪽 같은 의미로서 투사다.” 남재희는 대쪽 같은 선비의 이미지로 송건호를 기억한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폭탄과 맞먹는다는 도청 테이프가 유령처럼 떠도는 요즘, 친일파와 해방 뒤 정치권력에 빌붙은 사람을 비교한 송건호의 분석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현대사의 변절자보다는 일제 때 매국노가 처신하기 훨씬 어려웠을 거라고 본다. 그때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민족이 영원히 독립하지 못하리라 여겼다. 태어나서부터 식민지에서 자랐기 때문에 조선 사람은 일본에 운명적으로 종속된 채 살아야하는 줄 알았다. 일제가 영원히 지배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송건호는 자유당정권과 군사정권 때보다, 일제 때 양심을 지키고 사는 게 더 어려웠으리라 판단한다.
“박정희는 언젠가는 죽고, 전두환은 오래 못 갈 것임을 안다. 따라서 일제 때 친일파보다 지금의 변절자가 더 문제다.” 도청 테이프의 어두운 구석자리에 자신의 이름이 한두 차례 오르내림직한 이들이 과연 송건호의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파리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심약한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하는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19일 동안 고문을 당하고 허위자백을 한 다음 송건호는 탄식했다. 그는 창 밖으로 삼각지를 보면서 기적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기차와 오가는 시민들을 신선처럼 부러워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단지 민주주의를 하자고 주장한 죄밖에는 달리 범법행위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 무렵의 고문 후유증은 10년 뒤에나 나타났다. 병상에 쓰러진 그는 새카맣게 죽은피를 두 사발이나 빼냈고, 이내 다리가 마비되었다. 1990년 이후, 그의 기자수첩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근육의 힘이 점점 빠지는 파킨슨씨병이었다. 그는 병석에서 8년이나 투병생활을 하다가 2001년 12월 21일 눈을 감았다.
해직교수들이 복직되는 것을 보면서도, 송건호는 언론인은 결코 권력자들이 복직을 시키지 않으리라 생각하였다.
“민주화가 되지 않으면 이대로 살다가 늙어죽는 길밖에 없다. 가진 바 능력을 살리지 못하고 몇몇 사람들의 부귀와 영화를 위해 희생당하는 불행한 시대에 태어난 운명이 서글프다. 그러나 이렇게 늙어가는 것을 슬퍼하지만은 않는다. 다시 태어나도 언론인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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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건 호>
1926년 충북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에서 출생
1940년 경성 한성사립상업학교에 입학
1948년 서울대 법대 진학
1953년 서울대 복교, 대한통신사 외신부 기자
1953년 이정순 여사와 결혼
1961년 한국일보 논설위원
1965년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취임
1972년 남북적십자사 자문위원으로 평양 방문
197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취임
1975년 언론 탄압에 항의, 편집국장 사임
1977년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출간
1978년 『씨알의 소리』편집위원
1979년 『한국현대 사론』 『현실과 이성』 출간
1980년 포고령 위반으로 체포, 서대문구치소에 수감
1982년 ‘거시기산악회’에 참가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의장에 선임
1987년 새 신문 창간발기위원장에 취임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초대 사장 및 회장 역임
1990년 파킨슨증후군 나타나기 시작
1996년 소장 도서를 한겨레신문에 기증, ‘청암문고’ 개설
1999년 ‘20세기 최고 언론인’으로 선정
1994~2001년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파킨슨증후군으로 8년
동안 투병생활
2001년 12월 21일 영면. 5.18국립묘지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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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동수
1960년생
1990년 사상문예운동 겨울호에 「새벽길」 발표
2003년 평전 『윤상원』 발간
2004년 단편 「바람 속의 거미집」을 『문학과 경계』 여름호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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