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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쓰는 민주주의
노동운동의 큰 일꾼, 권종대 2 한 농민의 초상 권종대에 관한 두 번째 글을 쓰기도 전에 그의 임종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어쩌면 예견된 죽음이기도 하련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장이라도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누르면 쟁쟁하게 울려 퍼질 저 살아 펄펄 뛰는 목소리는 그럼 이제 과거에 속한 것이란 말인가. 그는 자신의 생명이 오직 산소 호흡기를 의지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자식들을 불러 모았다. “그동안 너희들 고생이 많았다. 이 세상에서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여한도 없고 마음도 편하다. 남은 일은 너희들이 다 알아서 하리라 믿는다. 그만 끝내자.” 권종대는 자기 손으로 직접 산소 호흡기를 떼어 냈다. “아버지!” 깜짝 놀란 자식들이 침상으로 달려들면서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그는 울부짖는 가족들..
노동운동의 큰 일꾼, 권종대 1 1960년대 초,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관어대 앞들에 한 떼의 청년들이 모를 심으며 뭔가를 신명나게 읊조리고 있다. 들에서 흔히 불리는 노동요나 잡가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4·19 혁명의 열기를 무력으로 잠재운 박정희 정권이 대대적으로 재건국민운동 바람을 일으키던 때였으니, 글 모르는 농촌 청년들이 ‘가 자에 기역 하면 각’하고 한글 깨치는 소린가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사상계 선언 외우며 모를 심고 자유와 평등을 근본이념으로 하는 근대적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봉건사회에서 직접 제국주의 식민지사회로 이행한 우리 역사는 세계사의 조류와 격리된 채 36년간 암흑 속에서 제자리걸음을 하였다. 그것은 자기말살의 역사요, 자기모독의 역사요, 노예적 굴종의 역사였다….’로 시작되..
직립(直立) 인간 김남주 2 어느 날 문득, 인류의 머나먼 방계조상이 벌떡 일어설 생각을 하게 된 후로, 직립은 줄곧 인간의 자존을 상징하게 되었다. 인간은 허리를 펴고 꼿꼿이 섬으로써 자신을 네발짐승과 구별했으며, 진리와 완성의 숫자 1의 형상을 닮은 수직의 자세를 취함으로써 수평의 자연에 도전했다. 끊임없는 저항과 불복종, 도전의식은 인간이 직립의 자존심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직립인간 김남주의 자존심도 바로 이 수직의 당당함에 있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무릎 꿇지 않은 자의 당당함, 그것은 처세도 기교도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단숨에 진실로 육박해 들어가고야 마는 정직한 싸움꾼의 정신이었다. 자유 좀 주세요 자유 좀 주세요 강자 앞에 허리 굽히고 애걸복걸하면서 동냥 따위는 하지 않을 것..
직립(直立) 인간 김남주 1 휘영청 밝은 달이 캄캄한 어둠을 녹이던 어느해 추석날 밤, 술 몇 잔에 얼굴이 붉어진 키작은 청년 하나가 다짜고짜 소설가 황석영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한 손에는 집에서 '아마도 새마을 도로 가에 심어 놓은 걸 꺽어 왔을 듯핑은' 코스모스 한 다발을 들고서, 집안에 들어선 청년은 코스모스 다발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시키지도 않았는대 거기 피어 있습니다" 작달만한 키에 굽 닳은 구두, 낡은 '우와기' 에 부스스한 머리. 옷을 벗을 때마다 희고 굵은 이빨이 드러나 더욱 새까매 보이는 얼굴... 검은 뿔테 안경이라도 걸치지 않았더라면 영축 없이 시골 농사꾼으로 보였을이 구닥다리 청년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피어난 것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흔하디흔한 것들에 대한 무한..
타오르는 활화산, 함석헌 2 유영모 선생의 영향을 받은 함석헌은 선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1960년대에 함석은 서구의 퀘이커, 한국의 민중신학, 그리고 를 통해 삶의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기존의 교회조직이나 제도에 회의적이었던 함석헌이 300년 역사를 가진 종교조직 퀘이커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1959년 2월 서울에서 열리고 있었던 퀘이커 예배 모임이었다. 사람이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 보다 지금 이곳 세상의 평화와 사회정의를 이루는 일에 힘이 모아져야 한다는데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인종 차별 반대 운동, 노예 제도 반대 운동, 여성 참정권 주창 등 사회 개혁을 부르짖는 무교회주의였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퀘이커를 ‘양심의 소리’, ‘속의 소리’, ‘속의 빛’ 이며..
타오르는 활화산, 함석헌 1 함석헌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박정희 군사 독재정권의 막바지에 일어난 ‘3.1구국선언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받고 형 집행정지처분을 받았던 1977년 이후로 기억된다. 당시 이 사건으로 민주화운동의 불꽃이 피어올라 전국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청주도시산업선교회에서 흰 머리와 하얀 수염을 위엄 있게 휘날리며 강연을 통해 청주의 뜻있는 젊은이들의 생각을 바꾸고 있었다. 1930년대 일제의 식민 통치가 극에 달했을 때, 민족교육의 성지인 오산학교에서 역사 선생으로서 집필한 는 한국인이 쓴 최초의 민중역사요, 전체 역사 속에서 민족사를 재해석한 역사서이기도 했다. 함석헌 선생은 위대한 사상가이면서 역사가요, 진리 앞에서 솔직하며 어둠 속에 사는 백성들에..
횃불을 든 사람들 - 영원한 자유인 조영래 3 이제 어느덧 조금씩 타성이 붙어가는 듯하다. 묶여 온 사람들을 바라보는 전율도 이젠 점차로 각질화되어 일상의 무감동에 조금씩 조금씩 압도되어간다. 나로서는 권력을 향유하는 최초의 체험이며… 어쩌면 아마도 마지막 체험이 될지도. 그러므로 이처럼 기이하게 주어진 넉 달의 기회를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가장 맑고 신선한 숨결로 부딪쳐 나아가 최선의 것을 이루어내어야 한다고 마음먹고는 있다. -1981년 12월 검찰청 사법관 시보 시절의 일기 조영래가 실정법의 사슬을 내던지고 다시 세상의 양지로 나온 것은 1980년 1월, 박정희 군사정권이 막을 내린 직후였다. 그해 2월, 수배시절을 함께 한 이옥경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그는 곧바로 사법연수원에 재입학..
횃불을 든 사람들 - 영원한 자유인 조영래 2 저 황홀한 불꽃을 보아라 저 참혹한 사랑을 보아라 저 위대한 분노를 보아라 아아 불길 속에 휩싸이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외치는 저것은 죽음이 아니다 저것은 패배가 아니다 저 피 저 눈물 저 울부짖음 속에서 싸우는 노동자의 강철 같은 심장을 보아라 -장시 「노동자의 불꽃 아아 전태일」 중에서 마치 80년대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시구를 연상시키는 이 시는 놀랍게도 1970년대 작품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이 조영래의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1977년 가을, 전태일 열사 7주기에 맞춰 발표된 이 시는 최근까지 그 필자가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안목이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끈질긴 주목을 받아왔다. 민족문학작가회의 홈페이지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문예운동사’..
횃불을 든 사람들 - 영원한 자유인 조영래 1 그립고 아쉬워도 더는 슬퍼하지 않으리다 단 한 가지 당신 마지막까지 괴로워했다는 저 이십년 세월의 저 편 불타 돌아간 전태일 씨에 대한 그 마음의 빚도 이제 숱한 노동자들 영롱한 눈빛 속에서 다 갚았으니 다 스러졌으니 오히려 고마운 새마음으로 돋아나고 있으니 안심 안심하소서 오고 감 없고 부서질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마음이시여 -1990년 12월 13일, 김지하 시인의 「조시(弔詩)」 중에서 누구일까. 죽는 날까지 전태일에 대한 마음의 빚을 떨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표표히 돌아간 그 사람은. 43년 생애보다 몇 곱절 긴 여운과 아쉬움을 남기고 떠난 그 사람은. ‘부서질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마음’을 가진 그 사람은. 한국 변혁운동사에 굵직한 자취를 남긴..
1945년 8월, 계훈제는 평안남도 강동군 승호리에서 강제노동을 하고 있었다. 돌산의 암반에 구멍을 내고 다이너마이트를 넣어 폭파한 다음, 폭파된 석회석을 작은 트럭에 실어 분쇄공장으로 나르는 일이었다. 벌써 1년이나 강제노동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동의하지 않았기에 언제나 불성실하게 일을 해왔다. 허리를 구부리고서도 쉴새없이 감시자에게 눈을 힐끔거렸다. 노동의 희열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고된 노역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령을 피웠고, 남보다 보리밥 한 덩이라도 더 먹으려고 애썼다. 계훈제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조금씩 상실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저항을 하지 않으면 인간으로서 존재가치를 상실하는 법인데…. 독립운동은커녕 강제노역장에서 하루하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