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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쓰는 민주주의
한때 운동권의 각종 인쇄물을 지칭하는 은어였던 ‘피(P).’ 실로 그것은 운동의 피(血)요 무기였다. 그것은 군사정권의 감시망을 피해 점 조직으로 연결된 구성원들을 동일한 입장과 원칙으로 묶을 수 있는 용이한 도구였고, 지하 언로였으며, 정보에 굶주린 대중의 귀에 정의와 진실의 소리를 들려주는 데 없어서는 안될 선전수단이었다. 러시아의 혁명가들이 근거지를 옮길 때마다 인쇄기를 끌고 다닌 것도, 볼셰비키가 ‘이스크라’를 제작한 그 유명한 코카서스 지하 인쇄소를 손아귀에 넣기 위해 애를 쓴 것도 바로 이 인쇄의 중요성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 사회주의 운동가 이재유는 ‘편지 한 번 주고받는 데도 한 달이 걸리는’ 머나먼 땅으로 망명을 권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반문했다. “국내 상황을 전달하는 데 한..
수능입시부정에다 학부모와 교사까지 가담한 성적조작사건 그리고 ‘일진회’가 몰고 온 학원폭력사태에 이르기까지, 공교육이 무너지고 있다는 탄식이 빈번한 이즈음 전교조 위원장을 지낸 그이는 자식을 어떻게 가르쳤을까. 딸만 일곱을 둔 그이는 ‘달궈진 쇠판 위에서 튀는 콩처럼 안정되지 못한 생활’을 해왔던 터라, 아내와 자식들한테 늘 미안하다. 여느 아버지들처럼 마음먹고 용돈을 준 적이 없고 그 흔한 학원 한번 보내지 못했다. 헌데도 아이들은 스스로 공부해서 대학까지 마치고 다들 심성이 곱게 자랐다. 그이는 언제나 그 점을 고맙게 여긴다. 명색이 교육운동을 한다면서 자식들에게 소홀히 했음은 스스로 돌이켜봐도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이가 감옥에 가고 수배되었을 때, 가장의 빈 자리를 채운 건 인생의 동반자인 아내 ..
이틀째 광주에 폭설이 내리던 날, 기아자동차 노조의 부패한 행태를 바라보는 그이의 심정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 노조 간부들이 비정규직으로 입사하려는 사람들에게서 돈을 받아 챙겼다니, 도덕성이 생명인 노동운동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노조 간부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입사청탁을 한 사람들의 명단이 언론에 오르내릴 때마다 그이는 머리끝이 쭈뼛 선다. 광주의 어른으로서 사과성명을 발표하러 가면서도 발걸음을 떼기가 몹시 조심스럽다. 눈길이 미끄러워서만은 아니었다. 그이는 사위가 기아자동차에 취직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 입사원서를 낸 딸은 은근히 전화 한 통이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이는 시침을 뚝 떼고 모른 척했다. 교육운동 한답시고 수배다 감옥이다, 애비노릇도 제대로 못한 처지에..
한국의 ‘마더 존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연방군을 동원해 노동자들의 인권을 무지막지하게 짓밟았던 미국에는 검은 드레스 차림으로 파업현장을 누비며 특유의 독설로 자본가들의 비도덕성을 맹비난하고 투쟁심을 일깨웠던 마더 존스가 있었다.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예였던 그이는 1867년 남편과 자녀를 황열병으로 잃은 뒤 노동자와 미국의 현실에 눈을 떴다. 마더 존스는 ‘내 주소는 내 신발과 같아요. 어디든지 억압에 반대하는 투쟁이 전개되는 곳에 있으니까요.’라는 자신의 말대로 살았다. 그리고 한국에는 어머니 이소선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피 흘리고 끌려가고 죽임 당했던 7, 80년대 한국의 고난과 투쟁의 현장에는 반드시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 수수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 화장기 없는 민낯의 이 열혈 여..
며칠째, 전태일의 영정을 안고 몸부림치는 그이의 사진을 보고 있다. 이제 막 사십대가 된 젊은 이소선. 그는 슬퍼한다기보다는 아파하고 있다. 물리적인 통증을 거의 온몸으로 호소하고 있다. 혹시 그는 스물두 살의 전태일을 낳고 있었던 게 아닐까. ‘담대해지세요, 어머니…….’ 자기 몸에 불을 낸 아들은 그렇게 말했다. ‘오! 어머니/ 당신 속엔 우리의 적이 있습니다.’ 시인 박노해는 또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낳고, 아들은 어머니를 낳고 영별의 순간, 이소선의 내부에서는 자식과의 영별을 담대하고 의연하게 맞이하는 어머니와 자애로운 미소 속에 ‘적’을 감춘 어머니가 한판의 독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아들을 낳고 아들이 어머니를 낳(김남주, 『고난의 길』)’는 그 싸움은 가진 ..
김진균이 다시 서울대 강단에 서게 된 것은 1984년 9월. 이 무렵, 그가 학교와 학계에서 가지는 영향력은 예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과거의 ‘관운장’이 아니었다. 5·18민중항쟁 직후의 서명 투쟁으로 해직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존재에 도덕적 우위와 무게감을 더해 주었고, 당대의 내로라하는 진보 학술운동가들이 망라해 있는 산업사회연구회(산사연)가 그의 뒤를 받쳐 주고 있었다. 운동이 격화되는 85년에서 8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그는 자연스럽게 운동권 학생들의 대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산사연은 그의 사회학과 제자들이 주도적으로 만든 학회 성격의 조직으로, 사회학 외에도 역사학, 철학, 정치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진보적 연구자들이 상당한 규모로 결집해 있었다. 산사연의 등장으로 보수적인 ..
개관사정(蓋棺事定)이라 했던가. 관 뚜껑을 덮은 후에야 비로소 그 사람됨의 면모를 깨닫고 그가 떠나며 남긴 것들을 헤아리는 일은 사람살이의 쓸쓸한 이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이 부박한 세상에 살아남은 이들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염치’인지도 모른다. 지난 2월 14일 세상을 떠난 진보 사회학자 김진균. 진보운동 진영의 맏형이자 민중의 다정한 벗이었던 그는 가는 날까지 살아 있는 이들에게 ‘염치’를 가르쳤다. 그가 말하는 ‘염치’란 무엇이었을까. 노동자와 민중,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는 것, 그리고 지행합일. 2000년에 수술 받은 대장암이 재발하여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던 2003년 11월, 『희망세상』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전태일은 노동자를 위한 운동을 하고 분신하였지만, 우리에게 염치 있는..
가짐없는 큰 자유, 제정구 2 나무가 아무리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싶어도 이 세상 어딘가의 흙 위에 설 자리가 없다면 나무는 존재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이 사람 또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자기 영역, 즉 사람으로서의 제자리를 만들고 누리기 이전에 땅위에 먼저 서야 하고 설 자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주거다. …… 땅이 좁을수록 주거의 크기는 엄격히 제한되어야만 약자의 몫이 있게 된다. 요약하면 나의 몫을 누리는 것이 정의요, 그의 몫을 두는 것이 연대의식이다. 그러므로 나의 몫과 함께 그의 몫이 동시에 있는 것이 평화다. (「저소득층의 주거안정을 위한 제언」, 제정구, 1988) 사람의 자리 제정구에게 집이란 삶의 총체적인 자리요, 인간으로서 정당하게 누려야 할 ‘몫’이었다. 주거가 ‘있..
가짐없는 큰 자유, 제정구 1 88올림픽을 앞두고 이른바 ‘올림픽 철거’가 한창이던 1986년 여름, 성동경찰서 앞에서는 조금 색다른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빈민운동의 대부’ 제정구가 경찰서에 연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철거민들이 즉석에서 벌인 ‘제정구 구출 시위’였다. 당시 제정구는 하왕십리 철거민들 앞에서 반정부 연설을 했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 상계동 철거민 회장이 시위대를 향해 외쳤다. “우리 지도자 제정구 선생이 진짜 ‘전두환은 개자식’이라고 했습니까?” 시위대는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전두환은 개자식’이라고 안 했습니다.” “‘전두환은 개자식’이라고 안 했는데 왜 우리 제정구 선생을 잡아갔습니까? 혹시 ‘전두환은 개자식’이라고 한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통일의 거목, 늦봄 문익환 2 이 글은 2003년 에 실렸던 글입니다 20세기는 레닌이 예견했듯이 전쟁과 혁명의 폭력의 세기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세계는 냉정하게 두 개의 진영으로 갈라져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식민지 쟁탈전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 사이의 체제전쟁, 제국주의에 대한 식민지의 민족해방전쟁이 끊임없이 충돌했다. 미국과 소비에트연방으로 대표되는 두 진영은 막대한 힘으로 이 세기를 지배했다. 그들은 부지런히 세계를 이념에 따라 찢어 가졌고, 진영의 유지를 위해 반목과 충돌을 원격 조정하기도 하고 손수 전쟁을 이끌었다. 대한민국은 그러한 힘들이 각축한 몇 안 되는 시범 국가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20세기는 일본제국의 침탈로부터 시작되어 겨레의 분단으로 이어지는 특이한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