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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분단으로 상처 받은 <부용산> 본문

문화 속 시대 읽기/노래는 멀리멀리

남북분단으로 상처 받은 <부용산>

기념사업회 2003. 8. 1. 14:33
남북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은, 많은 노래를 남기기도 했지만 또 많은 노래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어떤 노래는 남쪽에만 남고 또 어떤 노래는 북쪽에만 남았으며, 또 어떤 노래는 남과 북 어느 쪽에서도 불려지지 못한 채 오랫동안 파묻혀 있거나 사라졌다. <부용산>은 남과 북 어느 쪽에서도 공개적으로 불려지지 못한 노래이다. 이 난에서 여태까지 소개한 노래는 주로 197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 속에서 불려졌던 노래인데, <부용산>은 거기에서도 소외되어 있던 노래였다. 

남과 북에서 공개적으로 불려지지 못해

이 노래를 기억하고 불러온 사람들은 1960,70년대 학생운동 출신자가 아닌, 전라남도 출신의 지식인들이었다. 빨치산들이 불렀던 노래였던 까닭에 학생운동권에 마음 놓고 유포할 수 없었던 노래였고, 또 선율이나 가사에서 독특한 사회의식이 드러나 있지 않고 씩씩한 구석도 없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구태여 부를만한 매력을 갖고 있지 않은 노래였다. 나 역시 이 노래를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이 모인 술자리에서나 얻어들을 수 있었는데, 문화운동권에서는 상대적으로 연세가 많으신 문인들께서 이 노래를 기억하거나 부르실 수 있는 분이었다. 물론 이 노래를 부르게 될 때에는, 술집에서도 주위를 살펴보고 조심스럽게 부르는 분위기였다.(아마 서울이 아닌 광주․전남지역에서는 조금 더 많이 유포되어 있을 것이다.) 처음 듣기에도 낭만적이고 비애스럽고 유려한 선율이 아름다운 노래였다. 
이렇게 노래가 겨우겨우 입으로만 전파되다 보니, 원작의 형태를 알 수 없을 만큼 많이 와전되었고 창작자에 대해서도 알려진 정보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안치환의 음반 노스탤지어에 실린 노래가 ‘작자 미상’에 원작과는 매우 다른 형태로 실린 것은 그런 까닭이다. 안치환이 부른 형태는, 목포 출신 시인 김지하에서 후배인 춤꾼 이애주를 거쳐, 1980년대 노래운동의 핵심 작곡가인 문승현에게, 다시 노래모임 새벽에서 문승현과 함께 활동하던 후배 안치환으로 구전되면서 와전된 것이다. 이애주에게 노래를 배워온 문승현이 이 노래를 불렀을 때, 옆에서 듣고 있던 김종철(해직기자, 전 연합뉴스 사장)이, 자신은 악보를 통해 이 노래를 배웠는데 지금 부르고 있는 것과 많이 다르다고 지적했었다. 와전이 확실했지만, 그래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악보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노래라면 상식적인 음악적 지식으로 원작자의 의도를 추론하기 쉽지만, 이 노래는 그것이 잘 안되었다. 나중에야 구한 악보를 보면, 선율은 유려하지만 화성적 감각이나 리듬의 배치에서는 어설퍼, 박자를 맞춰 부르기가 매우 어렵다. 문승현이 이애주에게 배운 노래는 박자를 아예 무시하고 부르는 노래였고, 이것을 이리저리 재정리하면서 안치환이 부른 형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악곡의 와전에 비하면, 가사에서 ‘오리 길’과 ‘봉우리’가 ‘산허리’로 와전된 것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 편이다.


입으로만 전파되다 보니 많이 와전돼

창작자에 대한 정보도 그러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 내가 들었던 정보는, 목포 항도여중의 국어교사와 음악교사가 한 학생의 요절을 애도하며 지었는데, 나중에 빨치산들이 즐겨 부르는 통에 불온한 노래로 취급받았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나 문민시대 이후, 이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공식적 영역으로 이 노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안치환의 음반이 나왔고, 소설과 신문에서 언급하면서 창작자에 대한 정보가 널리 알려졌다. 항도여중 교사였던 시인 박기동이 누이의 요절을 애도하여 시를 지었는데, 같은 학교의 음악교사인 테너 안성현이 그 학교 제자가 죽은 것을 애도하여 그 시에 곡을 붙였다. 그 후 안성현은 월북을 했고, 그 노래는 오로지 아름답고 감동스러운 노래라는 죄 때문에 빨치산들에게 불려졌고, 그 때문에 시인 박기동은 평생을 좌익으로 몰려 탄압을 받으며 살았다는 것, 박기동은 시집만 내려고 하면 기관에서 원고를 빼앗아갔기 때문에 일흔이 넘는 나이에 호주로 이민을 가 외롭게 살고 있다는 것 등이 상세히 보도되었다. 

누이의 요절을 애도하며 시를 지어

무엇보다도 이 노래를 너무도 좋아했던 연극배우 김성옥이 호주까지 달려가 시를 지은 박기동 시인에게 직접 악보를 받아왔고, 2000년에는 시비(詩碑)가 건립되고 목포에서 ‘부용산  음악제’도 열렸으며 최근에는 한영애가 불러 음반에 실었다. 안성현은 월북한 가야금 명인인 안기옥의 아들로, 북한에서 <춘향전>, <황해의 노래> 등 여러 편의 가극과, 1990년 송년통일음악회 때 북한 공연단이 부른 <해당화>의 작곡자이기도 한 공훈예술가이다.(적어도 1999년까지는 생존해 있었다.) 시인과 작곡자 두 사람이 모두 남한 땅 아닌 곳에 생존해 있고, 노래는 별별 우여곡절을 다 겪으며 그래도 사람들 입에서 사랑을 받아 남쪽 땅에만 남았으니, 노래의 운명치고는 참으로 기구하다. 

글_이영미
1961년 서울 출생
한국종합예술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책임연구원
저서 『민족예술운동의 역사와 이론』, 『노래이야기 주머니』, 『재미있는 연극 길라잡이』 등

<2003년 08월호 희망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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