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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 시대 읽기/노래는 멀리멀리

[노래는 멀리 멀리] 솔아 푸르른 솔아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4. 26. 10:59

[노래는 멀리 멀리] 


<솔아 푸르른 솔아> 


글 | 이은진/ 신나는 문화학교 대표 



87년 6월민주항쟁은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들끓기 시작한 각계각층의 함성이, 경찰의 살인적인 폭력에 쓰러져간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폭발하면서 엄청난 힘을 표출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열사의 죽음이 기폭제가 되긴 했어도 70년대부터 꾸준히 성장하고 준비되었던 민중운동과 폭압적인 탄압에 억눌려 왔던 민중들의 분노가 이를 계기로 터져 나온 것일 겁니다. 


87년 6월 시민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5공화국은 종말을 맞이하고, 87, 88년부터 시작하여 90, 91년에 마무리되는 이 시기에 민중가요는 두 개의 대중화를 실현합니다. 그 하나는 대학생,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던 민중가요가 노동자 대중을 비롯한 기층민중으로까지 확산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조직된 대중을 중심으로 하던 민중가요가 대중문화 공간의 미조직 중간계층으로까지 확산된 것입니다. 


또한 음악운동 집단이 수적으로 늘어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성향이 다양화되었다는 점도 이 시기의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 서울에만 해도 84년부터 활동해왔던 ‘민요연구회’와 ‘새벽’ 외에 ‘노래를찾는사람들’, ‘삶의노래예울림’, ‘노동자노래단’, 그리고 음악 전공자들 중심의 ‘민족음악연구회’ 등 여러 색깔의 노래모임이 결성되었습니다. 서울 이외에도 지역 간 편차가 있긴 했지만 성남의 ‘노래마을’, 부산의 ‘노래야 나오너라’와 ‘희망새’, 전주의 ‘선언’, 인천의 ‘노래선언’, 안양의 ‘새힘’, 광주의 ‘친구’와 ‘우리소리연구회’, 대구 ‘소리타래’, 마산의 ‘소리새벽’ 등 수많은 전문노래단체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중 가장 먼저 대중적으로 활동을 모색한 단체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하 노찾사)’입니다. 노찾사는 84년, 노래모임 새벽에 의해 민중가요의 첫 번째 음반인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발매된 것을 그 출발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노래단체의 이름이 아니라 음반 제목이었을 뿐, 실체가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즉, 새벽의 구성원들이 합법음반을 만들기 위해 붙인 이름인 셈이지요. 


그러다가 87년 민주항쟁을 거쳐 대중적인 공간이 확장되면서 합법적인 공개 공연을 열었습니다. 역시 새벽에 몸담고 있거나, 새벽 출신인 노래운동 선배들이 모여 공연을 준비했고, 이 공연의 성공을 기반으로 노래모임으로서의 노찾사가 생겨났습니다. 노찾사는 민중가요 중에서 대학가에서 이미 인기를 얻은 노래를 중심으로 선곡해서, 보다 대중적인 편곡을 가미하여 발표하였는데, 공연마다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2집 음반에 수록된 노래들은 진보적 의식을 가진 방송인들의 목적의식적인 노력과 더불어 넥타이 부대의 호응을 받으면서 엄청난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였습니다. 


초기 ‘노찾사’의 주요 레퍼토리는 창작곡 보다는 기존 민중가요 중 이미 검증이 된 노래들과 대중문화공간으로 확산이 가능한 노래들이었습니다.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잠들지 않는 남도>, <그날이 오면> <오월의 노래>, <사계>, <이 산하에>,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등 모두에게 잘 알려졌고, 귀에 익숙한 노래들이 그러합니다. 


이렇듯 ‘노찾사’는 창작집단으로서의 성격보다는 민중가요의 성과를 대중문화공간에서 발표하여 확산시키고, 또 공식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미조직 중간계층까지 민중가요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기의 ‘노찾사’에서는 이전까지 민중가요가 쌓아온 성과, 거기에 담겨있는 대학생, 노동자 등 조직대중의 진보성, 그들의 인식과 정서, 질감이 잘 담겨 있었습니다. 또한 이 노래들을 대중문화의 공간에서 미조직 중간계급 대중들이 소화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내면서도, 노찾사 자신이 그 진보성과 정서를 따라잡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부과되기도 했었습니다. 이러한 작업이 대체로 성공적이었지만 간혹 이에 미치지 못할 때에는 소시민적이라는 비판도 받았고, 또 종종 기교주의, 감상주의, 정태적이고 나른하며 소극적인 분위기 등을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90년대 들어서면서 노찾사는 이러한 감상주의적이면서 나른한 분위기를 극복하고 당당해지긴 하였으나, <그리운 이름>, <사랑노래>, <영원한 노동자> 등 이전과는 다르게 스스로 창작한 신곡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80년대 민중가요를 정리하여 보급하는 역할이나 대중문화권으로 민중가요를 확대하는 역할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노찾사는 당시 노래운동 진영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가수들이 멤버로 활동하다가, 이후 대중가요권의 솔로가수로 진출을 하는 등 대중문화권으로까지 민중가요 영역을 확장시키는데도 기여를 했는데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안치환, 권진원, 문진오 등의 솔로가수들과 고 김광석 역시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노찾사는 꾸준히 활동을 하다가 94년 10주년이 되던 해에 해산을 하였고, 다시 2004년 20주년을 맞아 재결성하여 현재까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주요 레퍼토리도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그날이 오면>, <함께가자 우리 이 길을>, <동지를 위하여> 등, 초기 노찾사의 레퍼토리가 대부분입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솔아 푸르른 솔아>는 2집 음반 작업부터 노찾사에서 활동을 했던 가수 안치환의 곡입니다. 84년 연세대학교 중앙노래패 ‘울림터’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노래모임 새벽에 합류했다가 다시 노찾사에서 창작과 연주, 노래를 했던 안치환은 이 시기부터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펼쳤고, 이후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면서 솔로가수로서 대중적 입지를 굳혔습니다. <솔아 푸르른 솔아>는 대학시절 몇 곡의 습작을 거쳐 86년 공식적으로 발표한 첫 번째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85년 가을 민정당(당시) 중앙정치연수원 점거사건으로 구속된 선배를 생각하며 만든 노래인데, 80년대 노동시인으로 활동하던 고 박영근 시인의 시를 가사로 다듬어 노래로 창작했습니다. 그 후 87년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 때 불리면서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민중가요의 대표곡으로 사랑받고 있는 노래입니다. 



<솔아 푸르른 솔아> 


고 박영근 시, 안치환 작사, 작곡 


<<노래듣기 >>


거센 바람이 불어 와서 어머님의 눈물이 

가슴 속에 사무쳐 오는 갈라진 이 세상에 

민중의 넋이 주인되는 참세상 자유 위하여 

시퍼렇게 쑥물 들어도 강물 저어 가리라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창살 아래 내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 



* 음원 출처 : 노래를찾는사람들 2집음반 중에서 

* 노동자와 함께 노동자로 살아가며 시대를 처절하게 아파하고, 온몸으로 실천한 노동시인 故 박영근의 추모시비 건립 사업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 박영근시인 추모카페 : http://cafe.daum.net/poemwindow 

| 후원계좌 : 우리은행 1002-645-531096 예금주 : 정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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