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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 시대 읽기/노래는 멀리멀리

노동자 노래의 시작을 알린 <동지여 내가 있다>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3. 30. 20:04

노동자 노래의 시작을 알린 <동지여 내가 있다>

글 이은진/ 신나는 문화학교 대표

<노래 : 동지여 내가 있다> 


지금은 써먹을 기회가 그리 많지 않지만, 한때 ‘걸어 다니는 노래책’이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던 저는, 얼마 전에도 한 수련회에서 밤새 노래가사를 불러줘야 했습니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40대들은 7080의 노래들과 민중가요를 부르고 싶어 했고, 현실을 살아낸 시간만큼 기억이 흐릿해져버려 가사가 생각나지 않아 답답해하는 이들에게 노래방 기계대신 노래가사를 불러주는 일은 투덜거리면서도 즐거운 일입니다. 누구나 그런 시간이 되면 다시 불러보고 싶은 노래가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격동적인 한국현대사의 한복판을 살아낸 이들에게 노래는 무슨 역할을 했고, 개인의 삶에 어떻게 스며들어있을까요?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가사를 다 읊조리진 못하더라도 노래 한 두 곡쯤은 떠오르거나, 우연히 들려오는 민중가요 가락에 역사의 한 장면이 그림처럼 연상된 적이 있었다면, 자신의 인생에서 그 노래가 무엇이었는지 잠시 같이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전국을 뒤흔든 87년 민주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은 노래문화와 문화예술운동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민주주의의 확장과 대중공간이 열리면서 문화예술운동 조직들도 보다 광범위하게 결성되기 시작합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87년에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전환하였고, 민족미술협의회,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 등이 장르운동 협의체로서의 자기위상을 분명히 세우고, 이를 기반으로 88년 12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 결성되었습니다. 진보적인 예술운동의 상징적 구심으로서 민예총이 조직되자 음악, 영화, 춤 등의 장르 내에서도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각각 장르협의체들을 조직하기에 이릅니다.

또 현장을 중심으로 한 문화예술 활동도 87년 이전에는 주로 야학이나 교회 등 지역문화공간에서 소규모로 벌여왔던 것에 비해, 87년 가을 이후에는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각 사업장별로 노동조합 문화패들이 결성되었습니다.

 "서울노동조합운동연합결성식" 을 마치고 풍물패와 흥겨운 시간을 갖고 있는 노동자들 >> 

노동자대투쟁의 첫걸음에 울산을 덮은 노동자들의 노래는 대중가요 ‘아리랑 목동’의 개사곡이었다고 합니다. 1987년 8월, 현대그룹 노동자들이 ‘민주노조를 인정하라!’고 외치며 시내로 진출해 갈 때 ‘아리랑목동’과 ‘훌라송’을 불렀다는 겁니다. 또 지하철 노조를 설립하는 기지 순회 투쟁 때에는 ‘삼삼칠 박수’로 분위기를 엮어 갔고요. 1987년에 폭발된 투쟁과정에서는 대중가요와 군가를 개사하여 부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80년대에 불렸던 많은 민중가요들이 노동자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1987년 투쟁의 현장 그 중심에서 본격적인 노동자의 노래인 노동가요가 구로, 마산, 창원 지역에서 만들어 보급되기 시작합니다.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고, 단결 투쟁을 통해서 획득한 노동자의 언어와 정서가 담긴 노래입니다. <동지여 내가 있다>, <파업가>, <단결투쟁가> 등이 바로 그러한 대표적인 노래인데, 이 노래들은 88년 여름과 가을을 거쳐 들불 번지듯이 삽시간에 전국 노동자의 가슴과 가슴에 울려 퍼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대학 내 진보적 문예활동가들도 활동의 중심과 방향을 노동운동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대학 내 노래패 출신의 활동가들은 전국 각지에 노동문화단체를 만들어 노동예술가 집단을 형성했고, 이들의 활동은 전국적으로 많은 현장문화소모임(노래패) 구성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당시 노동가요를 함께 부르는 것은 노동자의 입장을 노래를 통해 하나로 묶어 내는 힘이었으며, 그동안 억눌리고 빼앗겼던 삶에 대한 분노가 승화되는 시간이었습니다. 87년 이후 민주노조 건설 투쟁과 농성 과정에서 입에서 입으로 노동가요가 보급되고 함께 불리면서 노동자의식이 성장했으며 이는 민주노조를 지켜내는 또 다른 투쟁이기도 했습니다.

노천극장에서 신명나는 풍물놀이를 즐기는 노조원들 >> 


노동운동이 확장되고,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 발전하면서 노동대중의 문화적 욕구 또한 높아져, 효과적인 노동자의식 향상을 위한 대중교육 방안으로 전문예술인들의 풍물, 노래, 연극 공연과 미술전시회들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보다 풍부한 교육적 내용을 담고 있는 슬라이드, 오디오 테이프, 비디오, 영화상영이 요청되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요구에 부응하여 만든 작품이 87년 민요연구회의 <승리하는 그날까지 전진, 전진> 여성노동자회의 <우리 승리하리라>, 민중문화운동연합의 <진짜노동자> 등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동대중의 요구에 비해 사회교육의 기능을 담보할 수 있는 진보적 예술작품들은 양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전문 인력 또한 매우 부족했고,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매일 밀어닥치는 파업지원 요구와 강습요구로 눈코 뜰 새 없었습니다. 창작집단도 문선활동에 적합한 작품을 만들면 연이은 공연 요청으로 하루에도 몇 차례씩 공연을 하였고, 문화패 강습도 전날 강사들이 배워서 다음날 가르치기도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민주노조 사업장 마다 노래패와 풍물패는 기본이고, 연극패와 미술패, 문학패들이 엄청나게 많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지역별로 문화패 연합을 조직하여 왕성한 연대활동을 펼쳐나갔습니다. 문화패들은 다른 일반 조합원들에 비해 훨씬 더 치열한 활동을 벌이며 선진노동자로, 노동조합의 간부로 성장하기도 했습니다. 주야간 교대 작업을 하면서도 틈만 나면 모였고, 옆 사업장에 가장 먼저 달려갔습니다. 정말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배우고, 연습하고, 보급하고, 노동문화의 주체로 자리매김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엇이 이들을 지치지 않고 이렇게 치열하게 활동하도록 했을까요? 그리고 그 동력이 지금은 남아있을까요? 25년이 지난 2012년, 노동자들에겐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오늘을,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작은 염원을 실현하려고 싸우는 수많은 이들이 떠올리는 희망의 노래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희망텐트가 최후의 보루가 아니라 또 다른 작은 소망의 씨앗이길 간절히 바라면서, 투박하지만 25년 전 노동자의 세상을 열어갈 희망에 가슴 뛰며 불렀던 <동지여 내가 있다>를 같이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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