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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칼럼/인터뷰/문화초대석

하고 싶은 음악만 지켜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6. 19. 11:46
 
1967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난 그의 어릴 적 꿈은 화가였다. 수차례의 도전 끝에 1989년 꿈에 그리던 홍익대 미술대학 조소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정작 그는 미술보다는‘아스팔트 위의 학생’의 길을 택했다. 2008년 현재, 그는 무대가 아닌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되었다.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15만 원 짜리 옥탑방에 살면서도 그의 꿈은 여전히 삶을 노래하는 가수다. 조각도 출신이면서 그 흔한 조각도 한 벌 갖고 있지 않은 화가가 바로 그다.
 
 
솔아솔아 푸른솔아’듣고 난 뒤 인생행로‘역전’
 
연영석(42)은 가수다. 무대에서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른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집회가 열리는 곳에는 항상 그가 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여느 가수와는 다르다. 홍대 인근에 있는 값싼 옥탑방이 거 처다. 살림은 빈한하다. 그래서일까. 그의 인터뷰는 그의 친구 작업실에서 이뤄졌다. 뒤늦게 알고 보니 집이 너무 형편없어서 차마 모시고(?) 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형편이 많이 나아졌어요. 초창기에는 1년에 번 돈이 200만원이 채 안됐는데 지금은 700 만~800만원 수준은 됩니다. 월세 내고 교통비 쓰고 밥 사먹고 담배 피고……. 제가 그냥저냥 살아 가는 데 문제없어요.”그의 수입은 외부 행사 공연비, 음반 판매와 후원비와 아르바이트로 이뤄진다.. 현재 그는 오른 집값을 감당하기 버거워 새 집을 구하고 있다.
화가에서가수로, 그의삶을바꿔놓은건대동제때후배들이ROTC(학생군사교육단)한테맞고온 것을 본 뒤였다. 주체 할 수 없는 의협심에 패싸움을 벌였다. 이때 구치소에서 우연히 <솔아솔아 푸른아>를 들었다.“ 나도 모르게 울컥 울음이 나오더라고요. 1980년대 끝물 학번인데, 그냥‘나도 뭔가를 해야겠다’고 맘먹게 되더라고요. 2학년 1학기 때부터 학회도 만들고 사람들만나면서사회에대한관심을키워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세상의중심이‘노동자’라는 것을 깨닫게됐습니다.”
 
‘천지인’콘서트에 윤도현 대신 무대 올라 데뷔
 
 
1992년 대학을 졸업했지만 양심상 남들처럼 취직해서 평범하게 살 수 없었다. 그는 노동미술 운동에 뜻을 품은 미술인들과 진보 미술동인‘현실감각’을 창립한다. 그리고 현장을 중심으로 전시활동과 무대미술 제작 등 대중적인 미술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노동문화 운동을 꿈꾸는 젊은이들과 함께‘문화예술생산자연합’을 만들어 활동범위를 미술뿐 아니라 음악, 글, 영상까지 넓혔다. 흔히 말해, 데모하는 것 좋아하고 사회에 나와서 나만 잘 먹고 잘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한데 모인 조직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멤버들이 취업과 결혼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해산하고 만다.
몇 년 뒤‘문화예술생산자연합’은 없어졌지만 그가 가수가 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회원단체인 록그룹‘메이데이’에 가사를 써주기 시작하면서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것.“ ‘문화예술생 산자연합’이 해산되고 그 충격으로 고뇌의 시간을 보내던 중 최초의 자작곡 <라면>을 만들었습니 다. 이후 8곡 정도를 더 만들어 아예 제가 가수로 나선 겁니다.”
 
가수 데뷔는 1998년. 이때 그는 남한 최초의 1인 조직‘문화노동자모임’과 문화노동자의 독립 레이블인‘맘대로 레이블’을 결성했다. 구조조정의 반 민중성과 대중의 경제적 빈곤을 노래한 1집 ‘돼지다이어트’를 발매했다. 그의 나이 서른두 살 때였다. 성공을 장담하기 쉽지 않은 나이였다.
운 좋게‘천지인’의 콘서트 공연 중 게스트인 윤도현의 펑크로 얼떨결에 무대에 서고 성공적인 데뷔를 하게 된다. 그리고 10년째 가수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문화가 아닌‘노동자’의 삶과 조건으로 관심이 옮겨가면서 미술.음악에 이어 연극까지 관심 분야가 넓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웠다. 연극에 대한 관심은 1999년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99 노래판 굿 꽃다지’에서 퇴출당한 가수‘마이콜’역에 첫 출연한 것이 계기였다. 이어‘극단 한강’의 객원배우로 참여, 2000년 전태일 열사 분신 30주년 기념‘연극 전태일’에도 출연했다.
“어눌한 연기의 진수를 보여준 거죠.(웃음)”
그의 일주일은 여전히 바쁘다. 평균 4~5일 집회에 나가고 또 노래를 부른다. 매달 1번 홍대 앞 ‘빵’이라는 클럽 무대에 선다. 삼성 특검 관련 집회,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 시위현장 등 그의 무대는 매번 바뀐다. 여기에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매주 월요일이면, 어김없이 명동성당 앞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그의 이름을 알리기 위한 공연이 아니라 나눔을 실천하기 위함이다. 그의 삶은 빈한 하지만 그래도 그는 그보다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 열심이다.
“음악을 하는 박준 선배가 예전부터 심장병 어린이를 위한 모금을 계속 해왔는데 여기에서 그치 지 말고 장애인.이주노동자.가정파탄 가정의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자는 뜻에서 들풀장학회를 만들게 됐어요. 한 달에 몇 명을 추려서 20만원씩 보태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 음악에 좀 더 관심을 가져줬으면 합니다
 
 

지금껏 그에겐 가수보다는 문화활동가라는 꼬리표가 더 자주 따라붙었다. 가수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은 없을까.“ 때로는 아쉽거나 서운할 때가 있어요. 제 음악에 좀 더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섭섭한 것은 이른바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내가 부정하든 부정하지 않던) 깊이 있게 바라봐지지 못하는 게 섭섭합니다.” 음악을 한 지 10년. 이제 그도 집회 때불러지는 가수보다 음악으로, 음악 하는 사람들로 평가받는 가수로 인정받고 싶은 듯했다.

 

다들 알고 계실까? 그는 지난 2006년 제 3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적이 있다. 가수로, 그의 노래로 세상의 사람들과 만나고 있지만 조각 작품으로 만날 생각은 없을까. 요즘은 종종 다시 조각도를 갖고 싶을 때가 있다고 한다. 음악보다 더 좋은 게 있다면 음악을 포기하고 다른 것을 택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지만, 지금은 그에게‘음악’이 전부다. 다만 이제는‘투쟁가’가 아닌 서정적인 음악을 해보고 싶다고 한다.“ 어깨와 손목이 아파요. 파장을 일으키고 싶어서 냇가에 돌을 던지는데, 지금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노력을 몰라주는 것 같아요. 돌을 막 던지고 싶은데 이제는 마음의 어깨가 아파요. 힘 있게 안 던지고 다르게 던지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어요.”그는 하루 2~3갑의 담배를 핀다.
그의 음반 발매 주기는 대체로 3~4년이다. 1집 <돼지다이어트>가 1998년에 나왔고, 2집 <공장> 은 2001년에 나왔다. 3집 <숨>이 2005년 나왔으니, 시기상으로 보면 4집 음반이 나올 때쯤이다.
“지금 음반 작업을 하고 있긴 해요. 새 음반에 실릴 곡 중에‘허우적거리다’란 제목의 노래가 있어요. 한 사람이 술에 취해 휘청거리며 걸어가면서 자신의 꿈과 삶을 되돌아보는 내용입니다.‘ 거울’ 이란 곡도 있어요. 사람들 누구에게나 상처가 있어요. 특히 운동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는데 나도 상처가 있으니 서로 보듬어주자. 뭐, 그런 내용입니다. 지하철 창문을 볼때 비친 제 모습을 보고 난 뒤 떠오른 생각을 담았습니다.”
지금 그의 관심사는 음반 내는 것. 아니, 가능하면 당분간 다른 계획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제가 하고 싶은 음악만 꿋꿋하게 지켜나가는 것만 해도 절반의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는 현장에서의 공연이 참 좋습니다.”
그의 4집은, 독립영화 <필승 연영석 ver2.0>을 만들고 있는 태준식 감독이 한 언론에 밝힌 인터 뷰처럼 기존 노동가요와는 다른 음반이 될 것 같다.“ 영석이 형의 음악은 단결, 투쟁, 연대 이런 걸 강조하기보다 사회 속에서 소외받고 위로받아야 할 사람들이 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성찰을 형식적 완결성으로 담아냅니다.”(태준식) 올해로 데뷔 10년. 이를 기념해 별도로 기획하는 행사나 콘서트 소식이 있는지 물었다.“ 콘서트는 해야 하는데……,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없습니다.”

 
글/김미영 기자 한겨레 신문 kimmy@hani.co,kr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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