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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과 투쟁하는 낯선영화 - 과거는 낯선 나라다 본문

인물/칼럼/인터뷰/문화초대석

망각과 투쟁하는 낯선영화 - 과거는 낯선 나라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6. 18. 13:30
 
‘1980년대’하면 당신은 무엇이 떠오르는가. 투신, 분신, 최루탄, 화염병, 도로를 가득 메운 성난 물결, 펄럭이는 깃발 그리고‘님을 위한 행진곡’……. 1980년대를 다룬 무수한 기록물과 예술 작품 속에서 수없이 재생되어 이제 당신의 기억과 함께 닳아지고 늙어가는 이미지들이다. 자유연상법을 이용하여 이와 관련된 이미지를 계속 끄집어낸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의 초라하고 부끄러운 밑바닥을 직면하게 되지 않을까. 광주, 감옥, 민주화운동보상법, 어머니, 눈물, 노무현, 386, 노래방, 민주동문회, 추모제, 후일담…….
 
 
‘추모’라는 이름의 거룩한 함정
 
김응수 감독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는 후일담을 거부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는 1980년대를 다룬 종래의 영상물들이 상투적으로 걸어간 길을 거부함으로써‘추모(를 위한 추모)’라는 아무도 정면에서 통박하지 못할 우리 시대의 거룩한 함정에 빠져들지 않았다.‘ 김세진과 이재호 의 분신’이라는 1980년대 중반의 극적인 한 지점을 다루면서도 그의 관심은 감상적 회고나 단순한 추모에 닿아 있지 않다. 과거 투사들을 영웅화하고 신화화하려는 시도가 자칫 비루한 현실의 은폐와 합리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극도로 경계한 탓이다.

인터뷰로만 구성된 이 불친절한 영화는 1986년 서울 신림사거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이들을 배려하지 않는다. 그 일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조차도 편안히 옛일을 회고하거나 감상에 빠져들 수가 없다. 1980년대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사람들이 기대할 법한 익숙한 장면, 낯익은 요소들은 낱낱이 발라냈다. 나레이션도, 비장한 배경음악도, 사건을 파악하는 단서가 되는 일체의 자료화면도 제공하지 않는다. 오직 카메라 앞에‘불려나온’인터뷰이의 진술과 그를 심문하는 목소리가 있을 뿐이다.
‘1986년 4월 28일, 그 날 당신은 무엇을 했나요?’ ‘몇 시였나요?’ ? ‘날씨는 어땠나요?’

김세진/이재호의 친구 혹은 후배인 인터뷰이들은 20여 년 전에 있었던 일을 시간대별로 떠올려야 한다. 기억과 망각의 경계에서 그들의 진술은 불완전하고 종종 앞뒤가 맞지 않는다. 불에 덴 자리처럼 선명하게 각인된 기억도 있고 한밤의 꿈처럼 도무지 맥락이 닿지 않는 몽롱한 기억들도 있다. 망각과의 처절한 투쟁 속에서 그들이 재생해 내야 하는‘그날’은 열사의 ‘그날’인 동시에 인터뷰이 자신이 몸부림치며 가까스로 견뎌낸‘그날’이다. 그들은 이 지독한 심문관 앞에서 자신의 비겁, 게으름, 착각, 소극성, 죄책감까지도 몽땅 게워내야 한다.

담담하게 시작된 그들의 진술은 어느 시점부터 미세한 떨림, 불안, 동요, 침묵, 공포의 곡선을 그리며 고조되기 시작한다. 좁혀진 미간, 뒤틀린 안면 근육, 땀과 눈물, 탄식이 이어진다. 고통스런 증언으로 재구성된 과거는 손에 잡힐 것처럼 생생하고 이를 지켜보는 관객 역시 한복판에 내던져져 망각과의 싸움을 불사해야 한다. 관객들은 그만 벌떡 일어서서 극장을 빠져나가고 싶은 감정의 파국을 몇 번이고 거친 뒤에야 이 잔혹한 인터뷰는 끝이 난다.
 
이건 그냥 영화가 아니다. 망각과의 투쟁이다
 
 
이 무모하리만치 용감한 다큐멘터리를 관람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특히 20주기를 맞아 두 열사의 삶과 정신을 기리려는 소박한 생각으로 이 작업을 제안했을 김세진/이재호기념 사업회가 예상한 것은 평범한 추모용 다큐멘터리가 아니었을까.

“처음에는 저도 그렇게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려면 김세진 이재호가 반미 시위 중에 분신한 4월 28일 사건이 어떤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벌어졌는지 왜 분신에까지 이르렀는지 현장 상황은 어땠는지 사실 그걸 보여줘야 되잖아요.

그런데 찍을 자료가 없었어요. 그날 옥상에 있었던 사람도 없고 자료라고는 당시 일간지에 실린 단신‘얘들아, 이렇게 죽으면 안 되지.’하는 이상한 투의 사설, 두 사람의 어릴 때 사진, 추모제 사진, 추모문집에 실린 1980년대 이야기들이었어요.
 
제가 그랬죠. ‘이건 1980년대라는 이미지지 이들에 대한 구체성이 아니다. 1990년대에는 이런 게 유용했는지 몰라도 이제 다들 신물이 나지 않았나. 그 이미지로 과거를 학습하고 자기가 그 과거의 화신이라도 된 양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나. 이걸로는 안 된다. 게다가 이건 반미 문제고 두 사람은 민주화운동 열사 중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을 억지로 그 이미지 속에 집어넣어 사람들한테 어떤 위안을 줄 순 있겠으나 그게 정말로 이 두 사람을 복원하는 건 아니다.’”

김응수 감독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믿었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설득이 안 되는 사람들한테는 제가 그 욕을 먹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건 할 수 없는 문제다, 그 걸 원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중요하지만 이제 그런 것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중요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영화로 증명해 보이겠다.”
 
사물놀이 전용 공간 만들어 풍물 세계화 전진기지로!
 
 

2년 뒤 그가 들고 온 것은 <과거는 낯선 나라다>라는‘낯선’영화였다. 사람들의 반응은 정확
히 반으로 갈렸다. 그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김세진/이재호 열사 추모비에 고은 선생의‘반미의 화신이여!’라는 문구가 있어요. 난 이
런 대상화된 이념적 문구들이 싫거든요.

그들은 우리와 같이 호흡한 친구이자 선/후배고 꿈이 있었고 열심히 투쟁했지만 인간적으로는 서툴기도 했던 20대 초반의 청년들이었어요. 그런 게나한테는 훨씬 더 중요했어요. 그런 속에서 그들이 무엇을 이야기했고 왜 그렇게 절박했는지 그 문제의식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감독 자신은‘욕먹을 각오’를 하고 밀어 붙였다는 이 영화에 대해 어느 정도나 만족하고 있을 ? 까.‘ 최초의 의도’를 구현하는 데는 성공했다고 보는 것일까.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이 영화가 아주 좋은 작품이라는 뜻이 아니라 제 관점이 사람들한테 잘 전달되었다고 봐요. 인상 깊은 영화평을 소개하면‘이 영화는 망각과 투쟁하는 영화다. 1980 년대나 김세진 이재호의 죽음을 기억 속에서 복원하는 것은 진정 가능한가. 인간이 망각에 저항하면서 가까스로 얻어내는 기억들, 그 잉여물들이 화면 밖으로 불완전하게 흘러내리는 상태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영화다.’제가 이 영화를 만들 때 감정이 바로 그거였거든요. 뭔가 우리한테 흔적은 남아 있는데 아무리 해도 복원할 수 없는 것, 말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영화적 기록이라는 거죠.”

 
성찰이 필요한 시대
 
<과거는 낯선 나라다>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감독 자신이 인터뷰이로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그날 신림사거리 에 있었던 그는 그간 마음속으로만 간직해 왔을 내밀한 기억을 토로한다.
‘어리석게도, 얼마나 뜨거울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어렸을때 화상을 입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요…….’인터뷰어가 인터뷰이로 전환되는 이 극적인 장면은 처음부터 계산된 게 아니라 영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결정된 것이라고 했다.
 
 
그 가 이 영화를 찍는 내내 생각한 것은‘성찰’이었다. “우리 삶 또는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게‘성찰’입니다. 우리가 무엇에 대항해서 투쟁했는가는 이제 다 알아요. 불완전하지만 이 사회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고요. 그런데 자꾸 우리는 무엇에 대해 투쟁했다, 정당성을 인정해달라고 한단 말이죠. 자꾸 그러니까 정당성이 없어지는 거예요. 지금은 오히려 자신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해요. 과거가 그랬으면 현재는 어떻게 살고 있느냐?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 얼마나 노력하느냐 이 문제라는 거죠.

전부 똑같이 학원 차려서 아파트 마련하고 아들딸 좋은 교육 시키려고 대안학교 보내고 모두 그렇게 살잖아요. ? 저는 이 영화도 과거 투쟁이 현재 자신에게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더 냉정하고 가혹한 방식을 취한 거죠. 그럼 대체 이 가혹한 인터뷰어의 정체는 뭐냐? 똑같은 사람이라는 거죠. 스스로 인터뷰이가 돼서 나 또한 그런 사람이다, 그걸 그냥 보여 주고 싶었어요.” 대학 졸업 후‘앞으로 뭘 해먹고 살 것인가’를 고민한 끝에 영화계에 입문한 그는 지금까지 <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1996)>, <욕망(2002)>, <달려라 장미(2005)>, <천상고원(2006)> 등 네 편 의 극영화와 한 편의 다큐멘터리(<과거는 낯선 나라다>)를 찍었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를 경험한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인 셈이다.

“아, 좋았어요! 역시 영화의 원초적인 매력은 다큐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화를 시작했던 당시 세상과 카메라 시선에 대한 본원적 질문과 고민으로 돌아갈 수 있었거든요. 이 작업만 해도 그냥 인터뷰이가 사는 모습을 찍을 것인지, 카메라 정면에 세울 것인지 사이드로 세울 것인지, 나는 카메라 안에 있을 것인지 밖에 있을 것인지 엄청난 고민이 필요했거든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해보고 싶어요.
 
글/김기선 1965년 서울 출생. 평전 작가로 저서로는『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전태일』,
『 김진수』,『 최종길』, 『한일회담 반대운동』등이 있다.
사진/황석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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