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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항쟁 기념 만화 펴낸 삐딱이 만화가최규석 본문

인물/칼럼/인터뷰/문화초대석

1987년 6월항쟁 기념 만화 펴낸 삐딱이 만화가최규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6. 23. 17:49
 
 
마니아가 있는 신세대 대표 만화가
 
수십 년 군사독재를 끝장낸 6월항쟁, 어느덧 21년이 흘렀다. 당시 현장을 누볐던 수많은 시민들에 겐 지금도 생생한 추억이다. 이를 경험하지 않은 10~20대에게 6월항쟁은 낯선‘역사의 한 페이지’일뿐.
점차 박제되고 있는 6월항쟁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펴낸 만화 <100℃>가 잔잔한 반향을 불러모으고 있다. <100℃>는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가 1987년 6월항쟁 20돌을 기념해 만화작가 최규석(32) 씨가 제작한 만화다. 지난 3월부터 시디로 만들어 전국의 중?고등학교와 공공도서관에 배포됐고 인터넷(www.610.or.kr)으로도 볼 수 있다.
“반응이 진짜 좋은 것 맞아요? 괜히 좋아해줘야 할 것 같고 해서 다들 설레발을 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386들은 재미가 없어도 자신들 이야기니까 칭찬하는 것일 텐데, 진짜 반응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무관심한 걸까, 아니면 원래 무뚝뚝한 것일까. 칭찬에도 저렇듯 덤덤한 것을 보면. 그는 사전에 오후 2시 인터뷰 약속이 잡혀 있었음에도 인터뷰 장소에 도착해 기자가 전화를 걸었을 때야 잠에서 깼다고 했다. 낮밤이 바뀌어 사는 사람들이 예술가라지만 건강도 챙겨야 하지 않을까? 멀대 같이 키가 큰 그는 인터뷰 도중 간단한 샌드위치로 이날 첫 요기를 했다.
“평소에는 해 떨어질 때쯤 일어나는데 오늘은 인터뷰 때문에 진짜 일찍 일어났어요.”
<100℃>로 널리 회자되고 있지만 최규석 씨는 그 이전부터 두터운 팬층을 거느린 대표적인 신세대 만화가다. <바보> <순정만화> 등 마치 동화 같은 그림에 서정적인 감정 표현을 중시하는 강풀과 달리 <대한민국 원주민> <습지생태보고서>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등 지극히 사실적인 묘 사와 직설적이고 삐딱한 어투로 짜릿한 통쾌함을 선사하는 탓에 그의 팬층은 마니아들이 많다.
어떤 이들은 그의 작품을 두고 사람들의 위선을 까발린다는 점에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등 홍상수 영화와 닮았다고 한다. 그 역시 홍상수표 영화를 선호한다. 그래서 어쩌면 <100℃>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쓴 중고생 교육용 만화라는‘주문제작’시스템이어서‘담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 녹여내지 못해 조금은 괴로울 때가 있지 않았을까.
“제가 관심을 두고 작업하는 게 아니라 역사적 사건과 그 주인공을 기념하기 위해 실존 인물이 주인공인 만화를 부탁한 경우다보니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었죠. 제대로 깔 수도 없고 성격은 학습 만화이고 할 만 하다 싶어 승낙했는데 쉽지만은 않았어요. 처음부터 제가 그리고 싶어 구상한 작품이 아니어서 더욱 그랬죠. 그래도 후회는 없어요. 잘 했다는 생각입니다.”
21년 전 그때, 1987년 그는 국민학생(초등학생)이었다. 당시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음은 지극히 당연하다.“ 부산, 마산만 해도 민주항쟁 영향이 있었는데, 제가 있던 창원은 조용했어요. 당시 창원대학교가 종합대학이 아닌 탓도 있었겠지만, 노동자인 누나와 매형들도 그 사실을 잘 몰랐어요. 시위 주체인 노동자들도 몰랐다는 게 신기할 뿐이에요.”
 
 
그가 6월항쟁계승사업회로부터 이 작품의 제안을 받은 건 지난해 4월이었다. 처음부터“내 작품이될것같지않아) 꼭하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고 현대사를 좀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일단 승낙했다.
“감정적으로는 계속‘안 한다’면서도 나도 모르게 바로 사람들을 만나고, 관련 자료들을 찾아 읽고 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관련 책을 정독을 하더라고요. 필을 받은 거죠.” <100℃>는 운동의‘운’자도 모르던 그가 몇 달 동안 흘린 값진 땀방울의 산물이다. 작업기간이 촉박해 160쪽의 작화를 두 달 만에 해치웠지만, 그가 가진 열정을 다 쏟아 부었다. <100℃>에는 1980년 민중항쟁에서 시작해 민중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씨 고문치사 사건을 거쳐 1987년 6월항쟁까지의 이야기를 평범한 서민 가정‘영호네’를 중심으로 잔잔하게 풀어내고 있는 게 특징이다.
반공의식이 투철했던 영호는 누나가 번 돈으로 대학에 갔지만 고민 끝에 민주화운동에 뛰어들고, 그 아들을 뜯어말리던 엄마는 아들이 투옥된 뒤‘아들보다 더한’민주투사가 된다는 줄거리이다.
 
당시 현장을 지켰던 이들 모습 통해
진정한 민주주의 의미 알리고파
 
 
“너무 가슴 찡한 역사만 보여주는 게 맞는 건지, 반듯한 역사만 담은 것 같아 아쉬움도 있어요. 6월 항쟁이 나름 성공을 하면서 오히려 사람들한테‘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인식을 심어준 것 같아서요. 사람들이 1987년을 뿌듯해할수록 그런 의식은 더 심해질 텐데, 지금 우리 현실을 한번 보세요. 당장 이랜드나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규……. 너무 많이 썩었잖아요. 결국 6월항쟁의 결과물로 남은 게 하나도 없지 않나 싶어요.”
<100℃>는 빠르면 올해 안에 단행본으로도 출간된다. 애초 책으로는 만들지 않으려고 출판권을 자신이 갖고 사업회 쪽에 시디만 넘겼지만,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이 본 터에 무시하고 그냥 덮고 넘어가기에 힘들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 뒤늦게 마음을 고쳐먹었다.
단행본에는 <100℃>에서 다루지 못한 20년 뒤 현재 이야기가 추가된다. 당시의 누군가는 국회의원이 됐을 수도 있고 노동운동가로 변신했을 수도 있다. 평범한 소시민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386세대의 자화상쯤으로 그려 질 것이다. 그는“작품 속에서 최대한 민주주의의 의미를 전달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실력이 딸려서 못했다.”며“현재의 모습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괴리감을 보여주고 민주주의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고 싶다.”고했다.
그의 만화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 집안 6남매로 태어난 탓에 그의 재능은 하마터면 묻힐 수도 있었다. 다행히 셋째누나가 미술학원에 보내줘 조금씩‘만화가’의 꿈을 키워갈 수 있었다. 이때 만해도‘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감히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만화가가 되면 좋겠다’정도였는데 만화학과에 진학했다. 운 좋게도 대학 졸업 전부터 각종 공모전과 국제만화 페스티벌, 대한민국 만화대상 등에서 연이어 입상하며 자연스럽게 주목받는 만화가가되었다.
『습지생태보고서』는 지금까지 1만권 이상 팔렸다. 조만간 한겨레21에 연재했던‘대한민국 원주 민’도 단행본으로 출간된다. 출간된 책들은 프랑스, 스페인, 벨기에 등 유럽 시장에까지 진출했다.
“만화는 젊을 때 상을 받은 사람들이 저 말고도 많아요. 상을 받아도 유명해지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전 운이 좋게 조금 유명해진 편이죠. 그렇다고 해서 경제적으로 넉넉한 건아닙니다. 돈을 벌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던져주는 그런 만화를 그리고 싶어요.”
어릴 때부터 가난한 소시민의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일까. 그의 작품 속엔 그가 몸소 경험한 소시민에 대한 생생한 삶과 이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녹아 있다는 평을 듣는다. 또한 그의 작품은 절대 슬프지 않다. 기발하고 톡톡 튀는 상황 설정과 장면 묘사, 촌철살인의‘허를 찌르는’명대사가 있어서다. 유머러스하면서도동시에가슴‘찡한’감동도있다.“ 태생자체가 그렇다보니까, 제 눈에 다가온 사람들이 약자였어요.
마이너가 세상의 전부였으니까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사회적인시선이섞여들어가는것같아요.”
 
과감하게‘썩소’날리는
<심슨> 같은 작품 해보고 싶어
 
 

그는 앞으로“한국 사회 전반에 대해 패러디하고 딴지를 거는 <심슨>이나 일본의 의료현실을 철저하게 까는 <헬로우 블랙잭> 같은 작품을 해보고 싶다.”고 한다. 단칸 자취방에 기거하는 지방사립대 만화학과 대학생들의 리얼한 궁상생활을 그렸던 그의 역작 <습지생태보고서>를 한국사회 전체로 확장시키는 작품쯤이라고 해두자. “페미니스트도 까고 정치인도 실명으로 비판하고 싶은데 걸리는 게 많아서 갑갑해요

 

우리 사회는작품속에등장할수있는‘상식의 영역’들을 너무 만들어놓지 않았어요. 일본만 해도 전문화된 영역을 직설적으로 다룬 작품들이 많이 있는데 한국은 거칠기만 할뿐 직설이 없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죠.”
“<쩐의 전쟁>을 보면, 우리를 괴롭히는 대상이 명확하게 드러나요.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에는 다이아몬드의 생산 과정을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보여주죠. 반면 <박하사탕>에는 광주가 안보 입니다. 과연 초등학생 눈에‘광주’가 보일까요? 전 초등학생이든,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든 제 작품을 보고, 어떤 얘기를 하는지 노골적으로 알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비유와 상징, 은유없이 직설적으로 털어놓은 작품이요. 장르를 굳이 꼽자면,‘ 노골리즘’요?”
어느덧 30대 중반.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결혼에 대한 집안의 압력은 없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쿨한 분인데, 얼마 전에는 울먹거리는 말투로‘며느리는 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냐’고 하시더군요.(웃음)”

 
글/김미영 기자 한겨레 신문
사진/황석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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