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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생명, 미래의 땅을 일구다, 한국DMZ평화생명동산추진위원회 위원장 본문

인물/칼럼/인터뷰/희망을 말하다

평화, 생명, 미래의 땅을 일구다, 한국DMZ평화생명동산추진위원회 위원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4. 29. 10:58
  2007년 늦가을 저녁

2007년 남북정상회담이 대통령의 말대로 가져간 보따리가 부족할 만큼 여러 부문에 걸쳐 성과를 냈다. 한반도 정전체제 종식과 평화체제 전환을 위해 남북한과 미국 등 3~4개국 정상들이 한반도에 모여서 종전선언을 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는 내용과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번영을 위한 경협확대 등의 10개항으로 구성된 10·4 남북정상 ‘남북관계 발전·평화번영 공동선언’은 예상을 뛰어넘는 합의 내용을 담았다. 이는 6·15 공동선언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남북공동평화번영의 실질적 협력과 실천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요즘은 어느 때보다 민족과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대선을 코앞에 두고 누구를 미래의 지도자로 결정해야 하는지 고민을 해야 하고, 또 대개는 이미 결정을 해 두고 있다.

대선 주자들의 외침만큼 지지자들의 목소리도 다양하게 엇갈리고 있어서 그것이 때론 기상천외한 색다른 내용의 정보를 덧입고 광장으로 나오기도 한다. 말의 잔치이며 광신과 불신의 불안한 날들이다.
『희망세상』은 지난달 15일(월), 한국DMZ(비무장지대)평화생명동산추진위원회 정성헌(61) 위원장을 서울 청량리에서 만났다. 경춘선을 타고 오는 그를 만나기 위해 나간 그곳은 역사를 새롭게 짓기 위해 주변이 온통 파헤쳐져 있고 소란스러웠다. 우리는 뉘엿뉘엿 기우는 해를 뒤로하고 근처 작은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땅 속 작은 미생물을 보라
“우리나라의 DMZ는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드문 평화·생명의 땅입니다. 반세기가 넘도록 민간인 출입이 제한된 대결과 분단의 비극적 상징물이지만, 그곳은 보존되고 생명에 이롭게 활용되어야 합니다.”
대학 시절 한일회담 반대집회와 관련해서 구속된 이후 가톨릭 농민운동과 우리밀 살리기 운동 등에 주도적 역할을 해온 그는 농사를 몸으로 좀 더 실천하기 위해 10년 전 강원도로 귀향했다. 땅을 개간하고 나무를 심으며 직접 노동과 사회노동을 함께했는데, 그 무렵 그는 인제군수로부터 서화면 주민의 숙원사업인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출입영농 타당성 조사를 의뢰받았다. 그는 그때 후배 기자와 함께 민통선부터 철책까지 살펴보고 바로 결론을 내렸다. 50년 넘게 보존된 이 땅을 당장의 수익을 위해 파헤쳐 내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이곳은 민족과 인류가 함께 쓸 수 있는 평화·생명의 공간, 성스러운 광장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그의 의견은 곧 권근술(남북어린이어깨동무 이사장), 김지하(시인), 이삼열(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무총장), 유재천(한림대 교수), 오정희(소설가) 등이 참여한 10명의 이름으로 제안되었고 한국DMZ평화생명동산추진사업으로 구체화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비무장지대 바깥에 생명평화동산을 만드는 것입니다. 보존과 개발의 차원에서 선택했습니다. 그곳엔 분단과 대결, 전쟁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군데군데 대전차 방어호와 탱크가 있고 수풀 속엔 아직도 제거하지 않은 지뢰가 묻혀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북쪽으로 곧바로 60킬로미터만 가면 내금강과 통하는 길목이기도 합니다. 갈등과 평화의 이중성을 지닌 땅이지요. 그곳에 최대한 생명을 파괴하지 않는 방법으로 집을 짓고 이로운 식물을 심어서 그 땅을 돈의 가치보다 생명이 우선하는 세계적인 평화생명의 성지로 만들려고 합니다.”
정성헌은 친환경이니 생태니 하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이 인간중심적 사고에 의한 이기적 욕망의 이름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발’이라는 용어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보존을 무조건 옹호하지도 않는다. 땅 속의 미생물을 보듯 아주 작은 것, 생명의 가치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장과 광장은 함께 있어야 하되 생명이 우선하는 절제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제공 인제군청

“DMZ는 말 그대로 군사비무장지대여야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침투를 견제하기 위해 남과 북은 그 안에 중무장한 군인과 무기를 들여놓고 있어요. 동식물 등 생물체의 환경도 그래요. 우리나라의 DMZ 대부분 지역이 관측경계선을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한 고엽제 살포와 방화로 황폐해져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환경도 생각하는 만큼 훌륭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물들의 이동 통로가 단절되고 식물들의 성장이 왜곡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철책부터 민간인 출입통제선까지의 제한구역과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일부 철책 안의 환경이 기적적으로 보존되어 있는 겁니다.”

대화에서 지더라도 평화에서는 패배하지 않아야
한국DMZ평화생명동산조성사업은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지난 2005년 6월 정식으로 입안되어 올봄에 착공되었다.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서화리와 가전리 일대 124,210평방미터에 들어서는 한국DMZ평화생명동산은 120여 명을 교육할 수 있는 교육관과 숙소 그리고 연구소와 생태탐방로 등 다양한 시설이 갖춰져 세계평화운동의 장이자 평화 교류의 모델지역으로 조성된다. 지금 그곳은 터파기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정성헌 위원장은 평화생명동산 조감도를 펼쳐놓고 그 안에 들어설 건물의 건축양식에서부터 심어야 할 수천 종의 식물까지 설명했다. 집은 바람 길을 살려 지으며, 정원은 태극과 인간의 오장육부 그리고 신·의·예·지 등 고유의 가치를 담아 두루 생명에 이로운 것들로 채울 것이라고 했다. 역설의 지대로써 비무장접경지대의 특성을 살려 주민과 방문객이 어울리고 세계가 교류하는 명실상부한 인류의 평화·생명·미래공간을 만든다는 의지다.
그의 평화생명의지는 남다르다. 삶 자체가 평화와 생명을 기본으로 하는 생명사회를 소망한다. 그에게는 어릴 적 끔찍한 기억이 있다. 6·25전쟁 피난 길 난민촌(강원도 원주)에서 겪은 일인데, 식량을 얻으러 나간 어머니를 마중 나갔다가 시체구덩이에서 누군가 죽지 않은 사람이 갑자기 발목을 붙잡는 바람에 까무러쳤던 기억이다. 그때가 다섯 살이었으니 그 끔찍함이 세월이 지나도 어찌 잊혀지겠는가.

“2003년 가을, 양구에서 6·25 정전 50주년 평화생명위령제가 있었습니다. 휴전 이후 50년이 넘도록 서로 헐뜯기만 했는데, 이젠 아군과 적을 떠나 전쟁에 참여해 억울하게 죽은 영혼의 넋을 달래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취지로 민간이 주도해 마련한 행사였어요. 양쪽을 합해 전쟁에 참여한 20개국 가운데 13개 나라의 참전용사가 참가했어요. 참가한 외국의 참전용사들이 모두 의미 있는 말들을 남겼어요. 남아공 연방의 인사는 이런 말을 했어요. ‘전쟁엔 승자도 패자도 없다. 모두 다 패자일 뿐이다. 남북은 대화에서는 지더라도 평화에서는 패배하지 않기를 바란다.’
북한을 도와 참전한 나라 가운데 소련은 붕괴가 되어 초청하지도 참가하지도 못했지만, 중국이 참가해 행사는 여러 면에서 의의가 있었어요. 특히 중국의 인사는 초로의 할머니였는데, 어린 소녀의 몸으로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저항하고 조선을 도움) 의용군 조종사로 참전했으나, 뒤에 너무나 많은 조선인을 죽인 사실을 깨닫고 몹시 후회했다고 고백을 했어요. 그런 까닭으로 자식의 이름을 평화를 위한다는 뜻의 ‘위평(爲平)’이라고 지었답니다. 저와 많은 것들이 통했습니다. 저도 아들의 이름을 ‘평화’로 지었으니까요. 하하하…….”

정성헌은 숙명처럼 오늘 생명평화운동과 통일운동(남북강원도협력위원회 위원장) 대열의 앞에 서있다. 그는 생명평화운동을 북쪽까지 번지게 하기 위해 여러 경로로 남쪽 정부와 북한 당국자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제의한 내용에 대한 김정일 위원장의 답변에서 보듯이 그의 염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렇다 해도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서울 청량리역에서 만난 정성헌(왼쪽) 위원장과 필자(오른쪽)


천천히 그리고 낮은 곳에서 찾는 ‘희망’
“사실, 모든 사회운동이 서두른다고 잘되진 않아요. 특히 평화생명운동은 개발논리로 성급하게 접근하면 큰 재앙을 몰고 올 수 있습니다. 아주 낮은 데에 희망이 있습니다. 적정 소량주의, 필요한 만큼만 취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점은 사회의 여러 운동에도 적용됩니다. 노동운동, 환경운동, 인권운동 등 대개가 그렇습니다. 운동가들은 지금보다 더 낮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몸이 현장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민주화운동으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의 운동은 1987년이 정점이었습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줄곧 변질되어 왔습니다. 현장이 사라지고 전문화와 분화가 되었습니다. 물론 분화와 전문화 자체를 지적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어느 때부턴가 우리 사회의 시민운동은 교수·법조인 중심의 고소·고발 형식이 전부인 것처럼 변했어요. 그건 수단이지 운동이 아닙니다. 그리고 너도나도 언론에 드러나길 바랍니다. 언론이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아요. 이러한 변질에 저는 분노합니다.”


정성헌 위원장은 뒤를 이어 우리의 운동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자성의 목소리를 섞어 고뇌어린 충언을 토해냈다.
“운동의 마음 밭이 너무 작습니다. 운동은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이지, 한쪽 길로 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은 죄다 운동이란 이름으로 체제 안에 매몰되어 있어요. 극복하려 하지 않아요. 그저 떠들썩하게 고소·고발로 현 체제의 건강성(투명성) 회복에만 매달리고 있어요. 그건 체제가 요구하는 법질서 안에 머무르기만 할뿐, 극복하려는 자세가 아닙니다.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대하는 목소리만 있을 뿐, 실천의지가 없기 때문에 반대나 찬성이나 결국은 같은 것이 됩니다. 더 치열하게 싸울 수 있는 곳으로 들어가 실천해야 합니다. 현장 중심으로 협업을 통한 협동·공동경제를 몸으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유럽의 경제가 건강한 까닭이 거기에 있지 않습니까?”
취재가 끝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국DMZ평화생명동산으로 나를 초대했다. 내년엔 그곳에 완전히 입주해 있을 것이니, 언제라도 반갑게 맞이하겠다며 따뜻하게 내 손을 잡았다. 밖은, 해가 지고 거리에 또 다른 불빛들이 환하게 태어나고 있었다.


 

글 홍인기 | 1960년 출생. 1999년 『작가들』에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민족문학작가회의와 인천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 황석선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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