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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섬, 윤한봉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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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섬, 윤한봉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1. 19. 16:50
 

‘오디세우스’의 귀환

1993년 5월, 윤한봉이 귀국했을 때 공항에 몰려든 기자들은 일제히 그를 향해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렸다. 5·18민중항쟁의 마지막 수배자, 35일 동안의 밀항, 한국인 정치 망명객 1호, 재미동포를 대상으로 한 ‘민족학교’와 ‘재미한국청년연합’ 활동…….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그의 인생역정은 실로 <인간극장> 같은 데서나 소개될 법한 것이었고, 거기에 그의 망명과 미국 생활에 얽힌 전설 같은 일화들이 보태지면서 사람들의 눈과 귀는 12년 만에 귀환한 이 ‘오디세우스’에게 쏠렸다.
다른 많은 운동권 인사들처럼, 이후 그의 행보가 5·18민중항쟁기념 행사장의 상석을 차지하고, 정치권을 기웃거리며 악수 퍼레이드를 벌이고, 대화와 타협과 상생의 21세기를 강조하는 강연으로 이어졌다면 어쩌면 그를 향한 세상의 시선은 지금보다 훨씬 더 우호적이고 따뜻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한봉은 오직 자신의 식대로 사는 법 밖에는 몰랐다. 그는 5월항쟁이란 이름에 단 어떠한 명예도 보상금도 원치 않았다.


그에게 광주는 살아 있는 한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거대한 짐이요 형벌일 뿐이었다. 윤한봉이 광주 무등산 자락에 자리를 잡자 그의 반골 기질을 잘 아는 옛 동지들이 그의 집을 찾아왔다. 부탁이 있다는 것이었다.
“광주에 3대 파워가 있는데 그쪽하고 절대 싸우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첫째 DJ 지지 세력, 둘째 5·18 관련 세력, 셋째 통일운동 세력. 이들하고만 부딪치지 않으면 최고 대우를 받을 것이니까 가만히만 있으라고 그러더라구요. 웃어넘겼지요. 아니 내가 최고 대우 받으려고 한국에 왔는가, 비판할 게 있으면 비판하고 잘하는 게 있으면 함께 하고 그러는 거지.”
그러나 그는 5·18기념재단을 창립시키는 과정에서 그 ‘3대 파워’와 숙명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알고 보니 DJ 지지 세력은 유신시대의 총리 김종필과 손잡아도 DJ에 대한 지지를 절대 철회하지 않는 맹종세력이었고, 5·18 관련세력은 ‘5월’이 마치 자기 개인의 명예와 채권과 이권인 양 행세하는 사람들이었으며, 통일운동 세력은 거의 맹목적으로 북한을 옹호·지지하는 이들이었다. 맹종과 맹목을 일삼는 이들일수록 자기 성찰과 반성이 없는 법이다.
“한국 운동권의 단점이 자기성찰과 반성이 없다는 거예요. 항상 자신의 문제는 빠져 있어요. 객관적 조건이 어떠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늘 이런 식이지. 1987년 대선 때 4자 필승론이라고 말도 안 되는 주장했던 사람들 있잖아요. 결국 자신들의 주장이 오류로 드러났는데 대선 끝나고 누가 책임지는 사람 있어요? 그런 점에서 난 조영래 변호사를 참 높이 평가합니다. 그 양반이 양김 단일화 운동을 하면서 마음고생이 많았어요. 결국 암에 걸려서 태안사 내려갔잖아요. 그때 뭐라 그러냐면 죽기 전에 자기가 쓴 전태일 평전을 읽고 운동에 투신하고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을 위해 천도제를 지내고 싶다……. 정말 대단한 자기성찰 아닙니까?”




광주, 제 2의 망명지

광주에 돌아왔으나, 그것은 그가 오매불망 잊지 못하던 그 광주가 아니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찬연히 타올랐던 항쟁의 정신과 대동 정신은 실종된 지 오래였고, 5월 단체 간부들처럼 5월을 ‘생업화’ 하거나 5월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곳곳에 넘쳐났다. 그는 지독한 환멸과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일부 5월 관련자들과 광주 운동권 내부를 향해 거침없이 독설을 뿜어 대기 시작했다.
“광주의 진보성? 밖에서 많이 착각들을 하는데 이제 그런 거 없어요. 진보정당 후보 한 명 못 내는 도시를 어찌 진보 도시라 할 수 있으며 혁명의 성지라 자랑할 수 있습니까? 광주가 평화와 인권의 도시, 민주의 도시를 내세울 자격이나 있어요? 지금 광주는 전국을 통틀어 가장 보수적인 도시예요. 여론조사만 보더라도 1997년 대선 때 광주에서 권영길 지지도가 0.2% 나왔어요. 전국 평균 1.2%에 턱없이 못 미치잖아요? 2002년에는 1.2% 나왔어요. 그때 전국 평균은 4.3%였어요. 민주노동당 지지율이 전국에서 제일 낮은 곳이 바로 광주예요. 그 다음이 전남이고. 역사적으로나 사회·경제적으로나 진보의 온상이요 고향인 광주가 진보성을 잃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죠.”
윤한봉은 DJ 지지 세력과 호남지역주의를 동시에 비판했다. 반DJ노선과 호남지역주의론……. 그는 광주에서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다. 그의 이름자 앞에 ‘광주의 이단아’, ‘광주 반역자’ 같은 별칭이 붙기 시작하면서, 그는 노골적으로 따돌림을 당했다. ‘국내운동을 깨기 위해 들어온 미국 CIA의 간첩’이라는 식의 모함과 중상도 잇따랐다. 미국에서보다 더 외롭고 더 고통스러운 ‘제 2의 망명생활’이 바로 그의 정치적 고향인 광주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런 불화와 갈등 속에서도 그는 1994년에 기어이 5·18기념재단을 설립하였다. 항쟁 주체세력의 시각에서 5·18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는 사업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운동을 사업과 활동으로 구분한다고 했다.
“활동은 단기적이고 일회적인 것들이죠. 어떤 쟁점을 가지고 시위나 집회를 조직한다든가……. 반면에 사업은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운동을 위해 토대를 갖춰가는 거예요. 노동운동을 예를 들면 노동법 해설집을 만드는 거예요.

 

그 과정은 상당히 힘들고 여러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만들어놓으면 활동이 훨씬 활발해지고 지속성이 생겨요. 5·18기념재단도 만들어놓으니까 기념사업 등 활동이 엄청 활발해지잖아요? 내가 미국에서 민족학교나 커뮤니티센터 만든 게 다 그런 건데, 국내에서도 1990년대부터 환경재단이니 여성재단, 아름다운 재단 같은 사업 성격의 운동이 나오기 시작했죠.”
“산파 역할만 하겠다.”고 공언한 대로 그는 5·18기념재단에서 어떠한 직책도 지위도 갖지 않았다. 대신 사람과 돈을 끌어 들였고, 5월 정신을 타락시키는 자들과 가차 없이 투쟁도 했다. 창립선언문도 썼다. 쓱 한 번 읽어 봐도 능히 그 필자를 짐작할 수 있는 5·18기념재단의 창립선언문은 이렇게 끝난다.

‘5월이 다시 섰습니다. 구속자, 부상자, 유가족들이 5월을 더럽히고, 가신 님들을 욕되게 하고, 광주를 부끄럽게 하고, 시민들을 분노케 한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1980년 5월의 정신과 자세로 되돌아 갈 것을 다짐하며 가신 님들과 7천만 겨레 앞에 옷깃을 여미고 섰습니다. 시민들 앞에 고개 숙이고 나란히 섰습니다. 「5·18기념재단」이 창립되었습니다. 가신 님들이 환하게 웃고 계십니다.’

 


  희망과 상처

항쟁 이후의 ‘폐허’를 국내에서 함께 견디지 않은 윤한봉을 ‘상처 받지 않은 사람’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그래서 그가 상대적으로 쉽게 광주를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은 그에게 기존 정치구도에 휩쓸리지 않고 독자적인 활동을 펼칠 수 있는 안목과 자유로움을 주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이해관계도 없이 윤한봉의 삶을 들여다보는 게 가능하다면 술 한 잔 마실 줄도 모르고 하소연할 친구 하나 없이 광주 바깥으로 내던져진 자의 깊은 상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981년 4월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11개월 동안 그는 무려 십 수 군데나 거처를 옮겼고, 비상시에 대비해 항상 옷을 입은 채 잠을 청했다.
죽음의 현장에서 도망한 자의 부끄러움, 죄책감, 절망감이 밀려들 때마다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처박고 수없이 울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체포의 위험이 닥치면 몇 놈 죽이고 자살할 각오로, 면도칼과 날카로운 과도를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 심지어 목욕할 때도 입에 물고했다.

미국 생활은 어땠을까. 12년 동안 그는 세 가지 원칙을 지키는 것으로 그 자신을 벌주었다. 첫째,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않는다. 둘째, 조국의 가난한 동포들과 감옥에서 고생하는 동지들을 생각해서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셋째, 도피 생활 할 때처럼 허리띠를 풀고 자지 않는다.
미국에서 12년, 귀국 후 13년……. 그가 광주항쟁이란 거대한 등짐을 지고 살아낸 25년은 말 그대로 총성 없는 전투였다. 그 전투의 승리자도, 희생자도 그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는 망명객의 한이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 운운하며 불필요하게 우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비판과 실천으로 광주가 조금씩 바뀌어 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는 1994년 5·18기념재단 설립 과정에서 폐기종 발병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5·18기념재단 창립은 그가 한국에서 계획한 일들의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2004년에 광주항쟁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들불야학 출신 7열사의 삶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사단법인 들불열사기념사업회를 설립했어요. 7열사란 박기순·윤상원·박용준·박관현·신영일·김영철·박효선 열사를 말합니다.

 

 

초대 이사장을 제가 맡았는데, 작년에 들불열사추모비를 광주5·18자유공원에 세웠어요. 굉장히 큰데 이게 아주 광주의 명물이 됐어요. 다른 지역에서도 일부러 와서 구경하고 가고 그래요. 지금, 들불상 1단계 모금으로 한 2억 2천 모았는데, 원금은 예치하고 이자로만 상이 나가고 있어요. 작년에 익산컨츄리클럽하고 기륭전자가 박기순 열사 상을 공동수상했어요. 2단계 모금이 진행 되서 5억 정도 되면 우리나라와 제 3세계 쪽 두 팀을 선정해서 상을 줄 수가 있어요.”
그는 지금 공기 좋은 목포의 한 아파트에서 요양 중이다. 호흡량이 정상인의 11%밖에 안 되는 탓에 하루 15시간씩 산소 호흡기를 끼고 살아야 한다. 그는 지금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오로지 건강 회복에만 집중하고 있다. 서울 영동 세브란스병원에 폐이식 수술도 신청해 놓았다. 다시 운동 일선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안타까움이 일 때마다, 집 앞에서 150미터만 나가면 보이는 바다를 산책하고 돌아온다. 바다를 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리움으로 몸부림치던 망명지의 바닷가를 떠올리는 것은 아닐까.


 

김기선 ningirsu@naver.com

1965년 서울 출생. 평전 작가로 저서로는 『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전태일』, 『김진수』, 『최종길』, 『한일회담반대운동』 등이 있다.

사진 황석선 stonesok@kdem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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