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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거리 한복판에 나타난 넥타이 부대 -남을우 본문

인물/칼럼/인터뷰/희망을 말하다

그때 그 거리 한복판에 나타난 넥타이 부대 -남을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1. 20. 09:50

그때 그 거리 한복판에 나타난 넥타이 부대 - 남을우


야만의 시간

이십 년 전 오늘은 대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물고문에 의해 살해된 사건으로 국민의 분노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광주학살, 고문치사 등 살인도 서슴지 않는 야만적인 정권에 대한 분노가 국민들의 가슴속에 끝없이 들끓었다. 무자비한 탄압에 움츠러들었던 민주화 열기가 다시 고조되었고, 이번에는 너나없이 모두 하나가 되어 거리에 뛰쳐나왔다.
인도와 차도를 메운 시위대가 거대한 물결처럼 움직였다. 땅 위에서는 최루탄과 방패와 곤봉이 함성과 엉켰고, 공중에선 박수와 꽃가루와 염원이 하늘을 뒤덮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진압경찰과 체포조 백골단이 피에 굶주린 이리떼처럼 학생들을 뒤쫓았다. 그러나 시민들은 쫓기는 학생들을 피신시키거나 한꺼번에 달려들어 온몸으로 감싸 연행을 막았다. 그리고 그들은 학생들과 함께 독재타도를 외쳤다.
시민들은 이미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독재자의 서슬 퍼런 압제에 숨죽이며 살아온 그들이 아니었다.
 


명동성당에 고립된 학생들에게 라면과 빵과 먹을 물을 건네고, 점심 값을 털어 폭력정권을 반대하는 민족민주투쟁을 지지한다는 격려문과 함께 전했다.
1987년 여름, 6월항쟁은 그렇게 학생들뿐만 아니라 택시기사, 시장 상인,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이 함께 참여했다. 그것은 민정당의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가 열리는 날에 맞추어 전국에서 열린 ‘박종철 고문살인 규탄 및 호헌철폐 시민대회’(6·10대회)로부터 시작되어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가 구속자 석방과 직선제 수용 등을 내용으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기까지 20일 동안 목숨을 걸고 싸워 이룬 국민의 위대한 승리였다.
그때 그곳 거리 한가운데에, 젊은 회사원 남을우(50세, 당시 BC카드사 노조위원장)가 있었다. 이른바 그는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말끔한 양복 차림의 넥타이 부대의 일원이었다.
『희망세상』은 지난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작은 키에 알맞게 아랫배가 나오고 머리가 앞쪽으로 살짝 벗겨진 중년의 모습이었다. 오랜 직장생활에서 왔을 피로가 얼굴에 언뜻 비쳐져 주변의 동료나 선배의 모습이 눈에 겹쳐보였다. 하지만 내가 6월항쟁에 대해 묻자, 그는 금세 청년으로 돌아간 표정을 지었다.

 



그때 그 거리 한가운데에, 젊은 회사원 남을우(50세, 당시 BC카드사 노조위원장)가 있었다. 이른바 그는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말끔한 양복 차림의 넥타이 부대의 일원이었다.

 

6월항쟁이 스무 돌을 맞았습니다. 요즘 여기저기서 새롭게 6월항쟁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공중파 방송에서도 항쟁 당시에 참여한 일반 시민을 대대적으로 찾고 있더군요. 감동적이기도 하면서 또 한쪽으로는 짠한 것이 북받쳐오던데요. 선생이 참여한 6월항쟁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십년이 지났습니다. 6월항쟁은 우리 국민이 이루어낸 위대한 승리입니다. 그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국민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서 얻은 민주화의 성공한 역사현장이지요. 저도 그랬습니다. 어렵게 노조를 만들고 위원장 자리에 있었지만 모든 게 열악했어요. 사측에서 인정하려 들지 않았어요. BC카드사는 제 1금융권의 다섯 개 은행이 공동출자해서 설립한 회사여서 군사독재 아래서 관치금융의 폐해를 가장 많이 받는 위치에 있었어요. 한국노총의 전국은행노조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어요. 그러니 인사는 물론이고 노동권익을 위해 투쟁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해고의 위협이 항상 따랐어요. 그런데 그 무렵 제게 큰 변화가 닥쳐왔어요.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노동운동을 해야 하는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하하하…….”

 

웃음소리에서 아직도 어떤 비장함이 전해져옵니다. 세월이 지나면 그런 비장함은 잊거나 의미를 잃기도 하는데, 새롭게 느껴집니다.
“전두환의 4·13호헌조치에 대한 한국노총의 지지선언이 있었습니다. 각계각층이 국민의 여망을 무시한 처사라고 연일 반대성명을 낼 때였습니다. 물론 제도권 내 여러 단체가 앞 다투어 지지성명을 내기도 했지만, 그건 분명히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한국노총의 전체회원조합이나 조합원의 견해와 다른 비민주적인 의사결정에 의해 조작된 내용이었고, 스스로가 무조건 정부방침에 동조하는 거짓 단체임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제 2금융권 노조의 몇몇 조합을 중심으로 한국노총의 4·13 호헌조치 지지선언을 반대하기 위하여 뜻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4·13 호헌조치 직후부터 호헌반대성명을 내야 한다고 주장한 범한화재노조의 이상재와 한일투자금융노조 정일영 그리고 대한보증의 김국진 등이 나서서 은밀히 세를 모았습니다. 숱한 어려움과 협박이 있었지만 우리는 드디어 5월 8일, 신동아화재, 한일투자금융, 범한화재, 대한보증보험 등 금융노련 산하 13개 노동조합이 참여하여 반대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참 쉽지 않은 일을 결행하셨네요. 그 뒤에 겪어야 할 수난들, 감히 상상할 만합니다. 이야기를 끊어서 죄송합니다만, 그 내용이 언론에 보도가 되었나요?
“동아·조선·중앙·한국일보, 그렇게 네 언론사에 협조요청을 했는데, 두 곳에서 아주 짤막하게 보도가 되었어요. 그것도 어떤 신문의 지방판에서는 삭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기사가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어요. 재야단체나 종교계 그리고 학생조직이 발표한 반대성명과는 성격이 사뭇 달랐던 겁니다. 한국노총에 소속된 노동조합, 그것도 안정 희구세력이며 중산층의 핵심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금융권의 노동조합에서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성명이 나왔다는 것이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던 겁니다. 그 뒤, 조영래 변호사가 동아일보 칼럼에 이렇게 쓴 걸 보았습니다. 부제목이 ‘민주역량은 물처럼 스미는 것’이라고 붙은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라는 글이었어요.
금융노조 산하 몇몇 조합이 한국노총의 호헌지지 성명을 자기들의 뜻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나선 것은 충격적인 일이라고 하면서, 봉급생활자인 보통사람들의 이 같은 시민적 용기는 우리국민의 높은 정치 수준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했어요. 이렇게 박해를 각오하고 말할 수 있는 국민은 민주주의를 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놀라기도 했고 힘이 절로 솟구쳤습니다.”

 



"그 6월의 날들을 잊을 수 없어요. 명동 부근 빌딩에서 축포처럼 던져지는 화장지 세리모니와 오색종이 꽃가루의 장관을 기억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져 와요. 우리는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를 이용해서 명동을 나갔어요.

그곳에서 시위대와 함께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습니다."

 


그랬지요. 저도 그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사실 그때 만해도 동아일보는 우리에게 작은 희망이기도 했어요.(웃음) 1987년은 거의 30년을 지속해온 군사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쟁취하려는 각계각층의 민주화운동이 줄기차게 전개되었던 해였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왜곡사건과 4·13호헌조치 그리고 이한열 최루탄 피격사건 등을 보듯이 독재의 말기적 징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선생은 나이 서른의 젊은 직장인이어서 어느 정도 장래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을 텐데요.
“한국노총의 4·13호헌조치 지지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뒤 겪은 고통을 말하면 지금도 편하지 않아요. 회사로부터는 연일 해고 협박이 왔어요. 회사는 그때를 해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어요. 그러지 않아도 인정하지 않던 노조가 현행법으로 금지된 정치 문제에 개입을 했으니 안성맞춤이었지요. 노조는 노조대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성명서 동의서명에 개인적으로 참여하기로 하고 왜 회사노조 이름을 표기해 전체가 불이익을 당하게 하는가, 라며 노조 간부들이 저를 공격 했어요. 저는 피신할 수밖에 없었어요. 제주도에 얼마 동안 가 있기도 했어요. 그러나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오기가 생겼어요. 그때 저는, 상황에 따라 사람은 부조리에 독하고 무섭게 맞설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달았어요. 돌아와서 그때부터는 죽기 살기로 싸웠어요. 자르려면 잘라라. 나는 내 길을 간다, 라는 각오로 저항했습니다. 그리고 주저했던 사회 민주화 대열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참여하기 시작했어요.

정권의 경제 꼭두각시 은행의 재투자기관인 카드사이기에 더없이 무시당하고 초라한 대접을 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노동권익과 사회 민주화를 위해 나섰습니다. 노총의 4·13호헌조치 지지선언을 반대한 5·8선언 참여 단체를 중심으로 자연스레 결집했어요. 그 분들과는 ‘5·8동지회’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모임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6·10 항쟁 때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셨군요.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듣고 싶습니다.
“적극적이라고 하니까 부끄럽네요. 어디 저희들이 한 일인가요.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던 수많은 열사와 어른, 선후배를 포함한 온 국민이 싸워 이룬 승리이지요. 저희야 책상머리에 붙어사는 사람들이니 어떻게 적극적으로 함께 할 수 있었나요? 하지만 그 6월의 날들을 잊을 수 없어요. 명동 부근 빌딩에서 축포처럼 던져지는 화장지 세리모니와 오색종이 꽃가루의 장관을 기억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져 와요. 우리는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를 이용해서 명동을 나갔어요. 그곳에서 시위대와 함께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습니다. 끝내 우리는 6·29 선언이라는 항복을 얻었잖아요. 그 이후 노조환경이 달라졌어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사측이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요. 조합원끼리 부둥켜안고 승리감에 도취했어요.”

 
명동 부근 빌딩세 6월 항쟁에 참여한 넥타이부대(자료사진)

 

끝으로, 6월 항쟁의 의미를 오늘 어떻게 다시 정의하고 새롭게 인식해야할 지에 대해 평소 생각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요즘 와서 느끼는 건 우리가 그 소중한 기억을 너무 쉽게 망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겁니다. 아마 이즘에 나타나고 있는 상서롭지 못한 여러 징후들 때문이겠지요. 돌아보면 어디 제대로 민주화가 이루어진 곳이 있나요? 경제, 사회, 정치, 문화. 어디를 보아도 민주화가 완성된 데가 없어요. 거의 형식적인 것에 안도하고 안주하려고 합니다. 개인이나 집단이 전부 극단적인 이기에 빠져 있어요. 서로 민주화의 열매를 독차지하려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주변을 살피지 않아요. 성공한 역사의 반은 죽음을 각오하고 이룬 것이고 실패한 역사의 반은 살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토인비의 말이 있습니다. 6월항쟁은 우리 시민 대중이 죽음을 각오하고 저항했기에 이룬 승리, 성공한 역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소중한 교훈을 망각한다면, 거꾸로 실패할 역사를 다시 잉태하게 되고 말겁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지만 사회는 언제든 다시 비민주로 회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취재가 끝나자, 남을우 씨는 한동안 소리 없이 침묵을 지켰다. 그날의 일들이 다시 살아나는지 그는 숨을 참고 격정을 눌렀다. 우리는 잠시 뒤 차 한 잔을 더 마시고 밖으로 나왔다. 사업회 사무실에서 시청 앞 서울광장을 돌아 그가 근무하는 소공로까지 같이 걸었다. 그가 이십 년 전에 근무하던 금정빌딩을 손으로 가리켰다. 서울광장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 위치한 빌딩이었다. 하늘에선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글 · 홍인기 icwriters@hanmir.com 

1960년 출생. 1999년『작가들』에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민족문학작가회의와 인천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 · 황석선 | stonesok@kdem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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