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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칼럼/인터뷰/희망을 말하다

대한민국의 세계인, 오재식 아시아교육연구원 원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1. 21. 14:49
세계인으로 산다는 것

“「베트남 신부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고발당한 현수막”
어느 일간 신문의 1면 머리기사 가운데 하나다.
요즘 도시를 벗어난 한적한 도로나 시골길 등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펼침막 광고내용. 선전 문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는 언제부턴가 아주 자연스럽게 외국에서 신부를 수입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있었나 보다. 수입된 신부들은 자주 도망을 갔고 그로인해 그들을 데려온 한국 신랑들이 손해를 본 모양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런 위험이 없는 믿을만한 나라의 신부를 대대적으로 소개하는 것이리라. 이 정도면 글로벌 시대의 세계시민이 가져본 퍽 인간적인 뜻풀이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때 이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6월 14일, 나는 『희망세상』의 취재를 위해 서울 세종로에 있는 「아시아교육연구원」을 찾아가 오재식(74세) 원장을 만났다. 그는 일찍이 민중이 가난과 독재의 굴레에서 고통 받을 때
농민과 도시빈민, 산업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싸웠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진보적 한국기독교운동을 이끌며 아시아기독교협의회와 세계교회협의회에서 국제적인 NGO활동을 했는데, 1990년대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WCC(세계교회협의회) 개발국장을 역임하며 제 3세계 개발원조에서 생명문화창조라는 적극적 가치형성으로 의제를 바꾸는 데 앞장을 섰고, 2000년대에 들어서서는 국제구호기구인 월드비전을 통해 대북협력사업과 대북인도지원사업을 추진했다.
그는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사무실에 들어서자 손수 음료를 권했다. 그것은 평생을 힘없고 가난한 민중을 위해 살아온 분의 격의 없는 사람사랑의 모습으로 보였다. 나는 그가 내준 음료를 마시며 작은 탁자 앞에 앉아서 더위를 식히다가 예의 신문기사의 내용을 마저 읽었다.
그것은 한국인들의 인종·인권경시의식과 성과 결혼을 상품으로 접근하는 사고방식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어서 참을 수 없이 부끄러운 일이었다. 나는 서둘러 읽던 신문을 덮었다. 그가 마침 인터뷰 준비를 마치고 다가오고 있었다.
 

 

 



"
1971년 초부터 일본에서 도시산업선교회를 지원하는 아시아연대(URM)일을 약 8년 동안 했어요.
그리고 그 뒤 약 12년을 아시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노동자와 도시빈민, 소수민족을 만났습니다."

 

원장님은 우리나라의 진보적 기독교운동의 어른으로서 오랫동안 시민사회운동을 해오셨습니다. 특히 학생시절부터 한국기독학생회협의회 일을 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으셨는지요.
“고등학교를 다닐 적에 함석헌 선생의 영향을 받았지요. 그때 선생님이 오류동에 사셨는데, 우리 형님이 그분을 좋아해서 나를 이끌고 어느 날 그 곁으로 이사를 갔어요. 그래서 선생님을 가까이서 뵐 수 있었어요. 강좌가 있는 날이면 오류동에서 종로까지 선생님과 함께 걸어서 다닌 적도 있었어요. 그분의 말씀은 참 선동적이었어요. 중국고대사상가 강좌도 그렇지만 특히 조선역사를 성서적으로 해석한 내용엔 반할 지경이었죠. ‘조선 민족은 아시아 대륙 길목에 있던 갈보였다’ 라는 대목, 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던 민족의 역사적 운명을 말씀하시며 역사가 반전하여 뒤돌아 갈 때를 준비하라는 일갈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6·25 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대학에 입학을 했는데, 그 곳에서 강원룡 목사님을 만났지요. 그분은 그 전에도 학생회 일로 만난 적이 있지만, 아무튼 그 뒤로 나와는 오래도록 함께한 스승이자 선배이며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런 영향으로 학생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사회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경제개발을 목표로 노동자의 피와 땀을 착취하던 때입니다. 그 때 원장님은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도시산업선교회의 일을 맡아 우리나라 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의 도시빈민, 농민, 산업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조직과 지원활동을 펼쳤습니다. 그 뒤 30여년이 흐른 오늘의 현실은 얼마나 달라졌는지요.
“1970년대 경제개발정책의 특징은 억압에 있습니다. 기업이 투자해서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정부(권력)가 노동운동을 억제해야 했습니다. 군사독재통치 형식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논리이지요. 아직도 아시아의 어떤 나라들은 그런 통치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보면 그동안 여러 부작용이 따랐음에도 통계적으로는 절대적 빈곤이나 노동환경, 교육환경 따위의 평가에서 많이 향상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충분하지 않아요.



아시아문화의 저력을 이해하고 지속적으로 문화 콘텐츠를 개발하는 것만이 아시아가 성장할 수 있는 힘이라고 말하는 오재식 원장
<사진제공 아시아 교육연구원>

 

여러 감회가 떠오릅니다. 제가 해외에서 이십 년 가까이 지원사업을 했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군대를 제대한 뒤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 전에 저는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레이니(전 주한 미대사)를 만나 사회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또 그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갔던 것인데, 그때 미국의 도시빈민 인권운동가이며 조직운동가이자 행동가인 S·D 알린스키(1909~1972)를 만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에게서 저는 시민운동의 기본을 배웠습니다. 지역조직을 통한 바닥의 지지를 받아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얻은 것이지요. 돌아와서 저는 곧바로 한국학생사회개발단(학사단)을 조직했습니다. 힘없고 가난한 민중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그들과 함께 살면서 주민과 더불어 조직하고 그 힘을 행사하는 데에서 희망찬 내일을 건설할 수 있는 신념이었습니다. 그래서 학사단은 학생신분을 감추고 공장과 건설현장 채석장 등지로 찾아들어 갔습니다.
전태일이 분신한 평화시장에도 학사단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저는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전태일이 실려가 사망한 성모병원에서 그때 저는 처음 서울대 법대 학생대표인 장기표, 조영래, 최종길을 만났습니다. 전태일 사건은 그렇게 기독학생회와 일반대학학생회가 만나 함께 운명의 길을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정보기관에 노출이 되어 피신할 수밖에 없었고, 그 길이 오랜 외국생활로 이어졌습니다.”

외국에선 주로 어떤 활동을 했고 귀국은 언제 하셨나요?
“1971년 초부터 일본에서 도시산업선교회를 지원하는 아시아연대(URM) 일을 약 8년 동안 했어요. 그리고 그 뒤 약 12년을 아시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노동자와 도시빈민, 소수민족을 만났습니다. 현장을 다니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일시적 구호에 그치는 도움보다 함께 연대하는 것이 진정으로 그들을 가난과 빈곤 그리고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길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러한 경험이 저를 국제구호기관에서 일을 하게 한 것이고 오늘까지도 이러한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귀국은 늘 했어요. 1980년 3·1절과 광주의 5월도 귀국해서 목격했습니다. 완전한 귀국은 199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56년 전에 한경직 목사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국제구호기구인 월드비전의 일을 맡았습니다. 특히 대북지원사업을 적극적으로 벌였습니다. 북한에 국수공장을 지어서 운영(1997)했고 수경재배농장(1999)과 씨감자생산온실(2000)을 만들어 보급하는 등 여러 사업을 시행해서 성과를 내었습니다.”

지면 관계로 원장님의 여러 발자취를 싣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원장님이 살아오신 자취는 오늘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아직도 그 무엇인가를 열망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아시아인, 나아가서 세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자세에 대하여 한 말씀 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신문에도 크게 보도가 되었지만, 우리의 의식수준은 형편없이 낮아요. 우리나라의 국제결혼 풍습이 부끄럽게도 전 세계에 알려졌잖아요? 그것이 세계에 비친, 아니 아시아에 비친 우리의 모습입니다. 3만 불 시대, 우리가 선진국에 진입하겠다고 부르짖는 구호입니다. 그것이 아시아를 젖혀두고 가능한 일일까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돈을 주고 아시아의 신부를 사와 노예취급을 하고, 노동자를 데려와서 저임금으로 부려먹다가 상해를 입히고는 무자비하게 내치는, 이런 비상식의 가치를 갖는다면 희망도 없고 오래도록 불가능할 것입니다. 반성을 해야 합니다. 21세기 경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문화와 사회적 인프라가 갖춰져야 상품의 가치가 확보됩니다. 아시아의 여러 국가와 민족의 문화를 얕보고 매춘관광이나 하는 국민, 예의 없고 거짓거리를 밥 먹듯이 하는 나라는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위기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남을 존중해야 자신도 존중받는 것입니다. 그런 사회적 상식을 만들어 가는 자세, 그것이 먼저입니다.”

화제를 바꾸어 끝으로 우리 안의 문제를 여쭤보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도전과 수난의 20세기와는 분명 다른 시대를 맞았습니다. 이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게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는 문제입니다.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요.
“공산주의가 실패를 하고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졌습니다. 중국도 공산주의 체제를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자본주의화 해야 하는가 고민하고 있잖아요? 그러나 우리에겐 냉전의 논리가 감성 안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남북의 충돌위험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논리를 극복해야 합니다. 오히려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인간 평등의 가치가 의미를 잃었습니다. 인간 평등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가치라는 도전이 사라진 이 때에 우리는 잘난 자끼리 더 몸집을 불려 살아남는 것만이 최우선인, 무한경쟁의 시대를 맞았습니다. 세계는 박수를 치고 있습니다. 자본만이 권력인 세상이 왔습니다. 위기입니다. 날이 갈수록 빈부의 격차나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경쟁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오늘, 우리는 너무 안일하게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발력이 강한 민족입니다. 그 순발력을 자본화해야 합니다. 그것은 상상력과 변신의 능력입니다. 지속적으로 문화 콘텐츠를 개발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이 아시아에 있습니다. 아시아 문화의 저력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아시아의 문화를 끊임없이 탐색하고 추적해서 창조적으로 콘텐츠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차이를 차별하지 않고 존중하며 포용해 가는 비전, 그것이 칠천만 민족이 살아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것은 또 아시아인, 세계인으로 살아가야할 우리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바깥은 바야흐로 온통 대선정국이다. 야당에서는 유력한 두 후보가 경선에서 이기기 위하여 서로 사생결단의 검증공방과 힘겨루기를 벌이고, 범여권에서는 대권에 도전하려는 후보들이 저마다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하여 당을 탈당하거나 남아서 통합과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희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뛰는 휘발유 값에 발을 구르기도 하다가 치솟는 주가지수를 바라보며 수지맞는 남들 차마 부러워하기는커녕 혹여 그나마 경기가 나아지려나, 생각하는 우리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나는 차별에 대한 각축보다 차이를 자산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오재식 원장의 말을 되새겼다. 거기에 희망이 있는 것일까.

글 · 홍인기 | icwriters@hanmir.com
1960년 출생. 1999년『작가들』에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민족문학작가회의와 인천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 · 황석선 | stonesok@kdem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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