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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손이 왼쪽 손을 긁어준 것의 가치 _풀뿌리 운동과 한밭레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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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손이 왼쪽 손을 긁어준 것의 가치 _풀뿌리 운동과 한밭레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0. 4. 14. 16:18

오른쪽 손이 왼쪽 손을 긁어준 것의 가치
_풀뿌리 운동과 한밭레츠



글·김성훈 tjletshanmail.net



풀뿌리 운동
<풀>이란 무엇인가? <농작물>은 특정한 식량을 재배할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심어진 풀이다. 이들은 벼, 콩, 배추 등 독립된 자기 이름으로 불려지는 상품이 되며 그 순간 풀이면서 풀이 아니게 된다. 그와달리 쑥, 명아주, 질경이, 민들레, 벌금자리 등은 상품이 아닌 한에서 풀이지만 이 또한 상품화할 목적으로 채취되거나 재배될 경우 자신의 독립된 이름을 가지며 풀이 아니게 된다. 자신의 독립된 이름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권력을 가지지 못한 것을 의미하며, 상품이 아니라는 것은 상품-화폐-자본의 질서에 편입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풀뿌리 운동이란 무엇인가? “권력을 갖지 못한 시민이 스스로의 삶의 공간에서 자신의 삶과 삶의 공간을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와 세상을 변화시켜 가려는 의식적인 활동”(하승수)이라고 한다. 이처럼 풀뿌리 운동은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의 운동이다.
자신의 노동을 팔아서 살아가는 임노동자들이 이윤추구를 지상명제로 하는 대기업 주식회사가 생산한 상품을 대형할인마트에서 매일같이 소비하며, 교육경쟁에 동참하여 학원과 과외 등의 사교육에 열을 올리고, 다국적 회사에 보험을 들어 미래를 대비하며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아파트에 갇혀 TV와 컴퓨터 게임, 인터넷에 중독되어 살아가는 우리의 하루하루를 ‘우리의 생활세계가 식민화되었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때 식민화의 실체는 자본과 권력으로부터의 소외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풀뿌리 운동은 다시 말해 식민화된 생활세계를 변혁하며 자신을 해방하고 스스로 주인되는 운동으로 가장 직접적이며 근본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해방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는 운동이란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이름을 얻기 위한 운동이 아니다. 그렇게 자신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 자체가 소유와 경쟁의 논리, 상품-화폐-자본의 세계관이다. 나와 너를, 나와 자연을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던 분리의 세계관을 넘어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여 기르고 살리는 생명의 세계관을 갖는 것이다. 분별 이전의 소식, 여기에 생명의 무한한 에너지가 있으며 여기서 깨달음과 살림살이가 만나는 것이다. 한밭레츠는 그러한 소식 가운데 하나이다.

새로운 천년, 한밭레츠의 시작
한국에서의 레츠(Local Exchange Trading System, (LETS)의 줄임말)는 1996년 녹색평론에서 처음 소개된 이후, 확산되기 시작했다. 대전에서는 1999년 당시 대전의제21추진협의회 사무처장이었던 박용남씨에 의해 시작되었다. 한밭레츠는 현재 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며 지역통화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준 단체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밭레츠는 외부에 알려진 것처럼 성공한 사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망하지 않고 조금씩 성장하는 단체라고는 말할 수 있다.
한밭레츠가 만들어지던 1999년과 2000년 즈음 20여개의 지역통화 단체가 있었지만 그 대부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밭레츠와 더불어 지역통화운동의 명맥을 유지하며 꾸준히 성장하는 단체로는 과천품앗이가 있다.
한밭레츠 역시 1997년 외환위기로부터 교훈을 얻어 시작했듯이 2008년 말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에 지역통화에 대한 관심은 다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특히 한국사회에 일고 있는 사회적 경제운동의 대유행과 맞물려 전국의 지역통화단체는 급증하고 있는 추세이다. 현재 전국의 지역통화단체는 30여개 정도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아직 전해 듣지 못한 곳까지 포함하면 더욱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의 추세를 감안한다면 2~3년 안에 100개 이상의 지역통화 공동체가 만들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90년대 말 시도되었던 지역통화운동단체 보다 현재 시도하는 공동체들은 훨씬 더 지역사회와 생활에 밀착된 활동을 전개해온 경험이 있어 예전처럼 쉽게 무너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밭레츠를 뛰어넘는 모델이 여러 곳에서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밭레츠에서 민들레의료생협까지
한밭레츠도 초기에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다른 지역통화운동단체와 마찬가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사람들은 좋은 시스템이라고 말했지만 막상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거래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협력을 통해 서로 이익이 되는 상황이 아닌 더욱 불리한 상황을 선택하는 문제가 발생되는 이른바 ‘죄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인다. 불신을 전제로 이기적으로 거래해야 이익이 되는 교환시장의 논리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신뢰를 바탕으로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호혜의 원리를 따르는 레츠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다. 2000년 한 해 동안 회원 70여 명의 총 거래건수가 287건이었다.
거래를 늘리기 위한 방향은 두 가지였다. 그중의 하나는 신뢰관계를 구축하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거래할 만한 것을 시스템 내부로 들이는 것이었다.


한밭레츠의 경우 의사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한의사가 가입하고 얼마 후 지역공동체 운동에 뜻을 둔 레스토랑이 가입했다. 연이어 친환경 농업을 하는 농부가 가입하면서 선순환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각자 준비해온 음식을 나누어 먹는 품앗이 만찬을 통해 더욱 가까워졌다. 얼마 후 의료계의 파란을 일으킨 의약분업 논란이 시작되었는데 당시 양방의사까지 가세한 의료인들과 회원들도 연일 토론이 계속되었다. 특히 새로 가입한 내과 전문의 나준식 회원은 당시 징병검사의사로 있으면서 의사로서가 아니라 아이 둘을 키우는 생활인으로서 레츠회원들과 관계하면서 회원들로부터 깊은 신망을 받았다. 회원들은 그의 건강상담을 지역화폐로 거래하지는 않았지만 그와 여러 생활재와 노동력을 주고 받으면서 일상적으로 건강상담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밤늦게 갑자기 아이가 고열에 시달린다거나 본인이나 가족 중 심각한 질환이 발생했을 경우 늘 그를 찾아 상담하곤 했다.
레츠 회원들은 믿을 수 있는 의료인들이 레츠에 존재한다는 것이 큰 자부심이 되었다. 국가의 의료제도가 부적절하다면 우리는 레츠를 통해 만들어진 공동체의 힘으로 바른 의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나준식 씨와 같은 주치의 역할을 해주던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의료생협이다.
의료생협이 만들어진 이후 거래는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한밭레츠는 2009년 현재 400여 명의 회원이 1만 5천건 이상의 지역화폐 거래를 하고 있다. 의료생협은 현재 약 1300세대의 조합원이 6억원 정도의 자산을 운용하며, 의원, 한의원, 치과, 노인복지센터, 심리상담센터, 친환경농촌마을기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17개의 조합원 건강모둠이 있다. 의료생협의 경우, 2008년 한 해 동은 2천만 두루(공동체 화폐)의 수입이 있었으며 이러한 수입은 직원의 급료와 생활재 구입, 출판물 인쇄, 조직활동비로 지출하면서 새로이 건강화폐 ‘조각’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대전에서는 마을어린이 도서관을 중심으로 동단위 품앗이 공동체가 약 5곳이 새롭게 설립되었으며 최근 지역의 사회적 경제운동 단체들과 연대해 호혜시장 네트워크를 준비 중에 있다.
2009년 11월 일본 동경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 연대경제포럼에서는 ‘지역통화와 의료생협’이란 주제로 사례발표를 했는데 참여자들의 깊은 호응과 관심을 받았다.

품앗이 놀이

2008년 1월 <품앗이 놀이>를 만들어 배포했다. 지역통화는 다양한 방식이 있지만 품앗이 놀이는 특히 시스템 설계 비용이 거의 들지 않고 어떤 공동체나 쉽게 적용할 수 있어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퍼진 지역통화 시스템중의 하나인 레츠를 모형으로 했다. 한 지역에 지역통화운동을 하고 싶은 분들이 10명 이상 모였다면 2~3시간의 공동작업(Workshop)으로 바로 이 운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그간 한밭레츠를 방문하거나 지역통화운동을 하고자 하는 공동체에 수백회 방문을 했지만 막상 시작하는 단체는 드물었다. 한밭레츠는 처음부터 이론가와 전업활동가가 있었으며 대전의제21추진협의회가 산파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사례는 한밭레츠와 같은 조건을 갖지 못한 공동체에게는 오히려 시작을 주저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레츠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전혀 색다른 시스템이 아니라, 전통사회속에서 품앗이나, 두레, 계 등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삶의 밑바탕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보살핌과 배려, 나눔과 협동으로 작동하는 사랑의 경제를 부활하는 운동인 것이다. 그동안 다양한 공동체에서 50회 이상의 품앗이 놀이를 진행해보았다. 품앗이 놀이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웃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었다. 나아가 탁월한 이론가나 전업활동가 없이도 우리도 레츠를 한번 해보자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품앗이 놀이의 설계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밭레츠의 존재 가치는 돈이 당장 없더라도 신뢰를 바탕으로 우선 쓸 수 있다는 것, 돈의 있고 없음에 이자를 붙이지 않는다는 것, 거래가 나눔이 되어 공동체가 조금씩 살아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한밭레츠 역시 가치를 매기고 서로의 나눔의 양을 기록해 손해가 없이 하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이것으로 대안이라 불리기에 충분할까? 레츠라는 시스템 자체가 풀뿌리 운동, 해방의 운동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시스템이든 그 시스템을 운용하는 사람들이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그 존재의 의미가 드러날 것이다.
여전히 다음의 물음안에 우리 운동의 생명력을 잃지 않으려 한다.

“왼쪽손이 가려워 오른쪽 손이 긁어주었다. 자, 왼쪽 손은 오른쪽 손에게 돈을 얼마나 내야 할까?”


글 김성훈 | 한밭레츠 대외협력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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