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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공동체의 꿈을 꾸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사무총장 이용선 본문

인물/칼럼/인터뷰/희망을 말하다

민족공동체의 꿈을 꾸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사무총장 이용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4. 27. 17:50
민족의 화해와 공존
가뭄은 지구촌의 가난한 나라들을 헐벗게 하고 지진과 홍수는 때를 가리지 않고 대륙의 곳곳을 파괴하고 있다. 북극의 만년설이 하루에 백만 톤씩 녹아내려 바닷물 수위가 높아지고 그로인해 만년 만에 깨어난 땅속의 박테리아가 살아나 내뿜는 프레온 가스는 지구의 기온을 급격히 상승시키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자연재해를 반복시켜 끝내는 지구의 위기를 가져올 것이라고 학자들은 경고한다.
얼마 전 비교적 소형 태풍인 ‘나리’가 제주와 전남 고흥 등을 빠져나가면서 우리는 많은 피해를 입었다. 연간 강수량의 삼분의 일이 단 며칠 사이에 내려 그 피해 규모도 엄청나 사망·실종자가 수십 명이며 재산 피해만도 150억원이 넘었다. 그러나 그 뒤의 수해복구 상황을 지켜보면 우리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민족임을 알 수 있다.
 

그건 우리가 어떠한 재해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고, 또 충분히 그것을 딛고 일어설 경제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달포 남짓 지난 8월에 일어난 북한의 대홍수를 기억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5일 동안 내린 비의 양이 평양 580미리, 평안남도 북창 796미리, 강원도 회양 745미리 등 강수량(북한 발표)만 보아도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희망세상』은 지난달 초에 인도적 대북지원과 남북 교류사업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민족의 화해와 공존을 이루고자 1996년에 창립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이용선(51) 사무총장을 만났다. 그는 일찍이 남과 북이 서로 바로 알아 나눔을 통해 민족공동체의 꿈을 이루고자 뛰어든 대북 민간교류의 1세대 숨은 일꾼이다.
“북한의 식량 자급률은 아직도 60%를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홍수 피해가 없더라도 외부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인데, 이번 홍수로 또 다시 농경지 20만 정보가 침수되고 600여 명의 사상자와 24만 세대의 가옥이 파손되었다고 하니,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지요.”

그는 바쁜 일정으로 피곤해 보였으나 대북관련 질문을 하자 특유의 집중력을 보였다.


민족통합의 새로운 계기가 될 2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인도적 대북지원 교류사업을 하고 있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이용선 사무총장을 만났다.

논쟁의 기억

“1994년 경실련의 통일협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을 때였습니다. 여름 내내 핵 문제와 관련한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그뿐이었지요. 무력감을 느꼈어요. 미국이 군사작전권을 쥐고 이북을 폭격하니 마니 하는, 당장 전쟁이 터질 것 같은 상황에서 도대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그때 마침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 우리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갖고 있는 남북문제와 통일 그리고 민족에 대한 인식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한 100명의 대표인사에게 묻는 일이었어요. 저는 그 작업을 하면서, 이른바 ‘백인백색통일론’이라 할 수 있는 결과물을 통해, 우리는 어느덧 남북문제에 관해서 사회의 보편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통일사회의 비전은 경향의 차이는 있으나, 전쟁이나 흡수통합의 방식이 아닌 시장경제체제로 통합해 가야하는 세계사적 흐름이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전남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이용선은 1980년 5월을 겪고 사회민주화 투쟁에 동참했다. 그 뒤 그는 노동·민족문제가 우리사회의 민주주의 대안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현장(대우자동차)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수배를 당하고 끝내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이른바 자생 꽁(코뮤니스트) 그룹(범PD-민중민주·평등파)의 일원으로 나중에 민중당과 결합한 사회주의노동당에서 활동하다가 1992년 경실련에 참여 결합하면서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의 남북관계는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대결과 반목의 시대였습니다. 세계적으로 사회주의체제 실험이 실패로 끝나 북한정권은 위기를 맞았는데, 제 1차 한반도 핵 위기와 겹쳐 미국의 경제 제재를 받는 등 북한은 국제적으로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졌습니다. 그런데다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조문 문제로 불거진 남북의 갈등은 화해의 분위기를 더욱 얼어붙게 했습니다. 저를 비롯한 여럿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의 남북 교류는 내부적 합의 없이 정권적 차원의 선언 형식의 이벤트였을 뿐, 지속성과 이행성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논쟁 끝에 비로소 이제 시민사회가 나서서 대중적 실천을 통해 구체적으로 현실을 변화시켜야 할 때라는 데에 동의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1995년)에 북한은 큰 물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때 처음 북한동포들의 처참한 생활이 공개되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범종교계와 시민사회가 나서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을 발족하게 된 것입니다.”

나눔의 실천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지만, 강릉 북한잠수함침투사건이 일어난 1997년은 남북관계가 급속하게 냉각된 공안정국이었습니다. 그 해에 우리는 깜짝 놀랄 일을 경험했습니다. 살얼음판 같은 정국에서 북한동포에게 옥수수를 보내기 위한 모금운동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대단한 호응을 얻은 것입니다. 일시에 18억원이 모였습니다. 우리 시민사회가 드디어 이념의 장벽을 돌파하고 처음으로 보여준 자랑스러운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은 그 뒤 어떤 정치적 차원의 갈등이나 교착상태도 막지 못했습니다. 그런 시민사회의 의지가 지금까지 남북교류를 계속 이어가게 하는 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진제공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은 그 이후 많은 개인과 시민단체가 동참하면서 활동의 지평을 넓혀갔다. 그리고 2000년 제 1차 남북정상회담은 남북교류의 형식이 진일보하는 계기가 된다. 이전의 대북지원사업은 식량과 약품 그리고 옷 등의 물자지원 형식이 전부였다면 그 뒤부턴 기업이 동참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민간 교류사업이 확대되었다. 단순한 물자지원에서 북한의 구조적 변화가 가능한 자립형 지원형식의, 식량+생명의 자립형 지원형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농업·보건·제약·기술·녹화·교육 등 인도적 협력분야로 범위가 넓어지고 그 규모가 커졌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은 지난 10년 동안 농업·축산, 의료·보건, 일반구호, 급식사업 분야에서 620억 원 이상의 물자와 기술을 지원했으며,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사업은 북한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동북 3성·러시아 고려인 등 해외동포사회로 확장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산하에 평화나눔센터를 두고 다른 연대 단체들과 함께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를 위한 여러 활동과 정책 포럼, 워크숍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용선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 발족될 당시 잠시 도와달라는 지인의 부탁으로 발을 들여놓은 뒤 사무총장이라는 자리에서 벌써 12년 째 활동을 하고 있다. 한때 민족을 고민하고 운동을 함께했던 일군의 동료들이 화려한 정치판이나 자본의 한가운데로 슬그머니 빠져나갔지만, 이용선은 아직 그 자리에서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교류를 넘어 평화통합의 시대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왜 우리는 남북관계가 진전할 때마다 북한의 참사를 보아야 하는가, 북한이 어려운 사정이 되어야 우리는 마음이 열리는가, 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남과 북의 신뢰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봅니다. 올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북녘동포의 겨울나기가 당장 힘겨울 것입니다. 국제식량기구나 내외의 여러 구호단체가 나서고 있으니, 어느 정도의 물자는 지원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재난의 악순환은 쉽게 고리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를 포함해서 국제사회가 발상을 전환해 그 지원의 형식을 바꿔야 합니다.



꽃샘 추위에 늙은이 얼어 죽는다고 지금까지 북한은 체제 유지를 위해 인민의 고통과 희생을 강요할 수밖에 없었던 측면이 있습니다. 전해들은 이야기이지만, 연초에 김정일 위원장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제 인민은 고난의 행군을 끝낼 때가 되었다. 앞으로는 인민경제건설에 매진할 것이다.’ 북한의 인식이 매우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남쪽의 단순한 물자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가난을 보다 구조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기술이나 기반시설의 지원을 원하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의 대북지원사업도 여러 분야에 걸쳐 그 형식을 바꿔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여러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어려움이 많습니다. 북한이 테러지원국가로 지목되어 국제적인 경제 제재를 받고 있는 것은 모두가 알 것입니다. 농업기술을 보급하기 위해 농기구 제작 공장을 지원하려 해도 규제에 걸립니다. 산업용 전략물자라는 이유로 적성 국가에 일부의 부품은 지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규제는 민간교류 전 부문에 걸쳐 적용되고 있습니다. IT(Information Technology)교육을 지원하기 위한 중고 컴퓨터에도 적용되고 농작물 재배에 필요한 비료를 지원하는 데도 해당됩니다. 우리에게 골동품으로 취급되는 486 컴퓨터는 그것을 병렬로 여럿을 연결하면 슈퍼컴퓨터가 되고, 비료에서는 질소를 뽑아 포탄의 장약을 만들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우스꽝스럽지만 그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부의 대응이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하여튼 이러한 제약과 규율을 남과 북은 국제사회와 함께 지혜롭게 벗겨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평화와 공존으로 가는 지름길이며 통합의 시작입니다.”
때마침 북핵문제가 대타협의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다. 북한이 핵불능화 처리의 의지를 진지하게 보임으로써 북한을 대하는 미국의 태도도 예전과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물론 예기치 않은 변수는 있을 수 있으나, 드디어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의 시대가 다가오는 조짐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남북의 평화와 공존·공영을 바탕 삼아 민족통합의 새로운 전환의 계기가 될, 제 2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이제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북한의 구조적 위기를 극복하고 한반도의 평화 안정을 정착시키는 데 노력을 다해야 할 때이다.
“북한개발계획을 실질적으로 운용하는 정책전략을 세워 안으로는 사회·정치권의 합의를 이끌고 밖으로는 국제사회를 설득해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정상회담을 통해 구체화되기를 기대합니다.”
이용선 사무총장은 다음 정권에 거는 기대도 짧게 언급했다. 어떤 정권이 탄생하더라도 우리가 지닌 평화와 통합의 큰 흐름을 거스르지 못할 것일 텐데, 그렇다면 다음 정권은 오히려 정치적 관점을 최소화해서 정책결정이 비교적 수월한 집권 초기에 남과 북의 상생의 기반을 만드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글 홍인기 | 1960년 출생. 1999년 『작가들』에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민족문학작가회의와 인천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 황석선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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