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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쓰는 민주주의

풋풋한 삶의 향기가 베인 곳 실상사 작은 학교 본문

희망이야기/풀뿌리 운동 현장을 가다

풋풋한 삶의 향기가 베인 곳 실상사 작은 학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1. 19. 17:23

 

실상사에 도착한 건 점심 무렵이었다. 첫 만남에 염치없이 밥부터 얻어먹었다. 공양간. 식사시간이 끝날 무렵이어서인지 열개 남짓한 식탁은 거의 비어 있다. 공양간 한 켠에 마련된 개수대에서는 아이들이 늘어서서 왁자지껄 설거지가 한창이다. 자기가 먹은 그릇은 자기가 씻는 게 원칙인가 보다. 지리산 봄나물에 쓱쓱 비빈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는 나도 따라 설거지를 한다. 이곳엔 남은 반찬을 버리는 잔반 그릇이 없다. 개수대에도 밥알 한 톨 없이 깨끗하다.
실상사 작은 학교는 정말 작다. 평평한 터에 컨테이너 교실이 서너 개, 교무실, 별실, 원두막, 그리고 자그마한 운동장이 전부다. 멀리 보이는 지리산의 웅장한 산맥과 널찍하게 펼쳐진 텃밭들, 교실 옆 푸르른 대나무 숲이 아니었다면 너무 초라해 보일 터였다.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 간간히 들려오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정겹다.

 

작으니까요

왜 작은 학교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작으니까요” 장일안 교사는 이렇게 말하며 수줍게 웃는다. “학교가 정말 작아요. 그리고 작은 학교를 지향하구요. 교육은 학생과 학생, 학생과 교사, 학부모 이렇게 사람과 사람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교육 자체가 형식적이 되는 것 같아요.” 중등과정을 운영하고 있는 작은 학교는 한 학년에 15명씩이다. 전체 학생 수는 46명, 교사는 10명이다.
생명 살림, 생태적, 공동체적 가치들을 실천하기 위해 작은 학교는 학생들이 함께 생활하는 작은 가정을 운영하고 있다. 학생들 대여섯 명과 교사 한 명이 한 가정을 이루어 생활하는 집이다. 지금 작은 가정은 ‘꽃다지’, ‘웃고가’, ‘동물원’, ‘언덕배기’ 등 모두 7곳이다. 이 중 3곳은 학부모들이 일주일씩 돌아가면서 생활관 교사를 맡고 있다. “아이들이 직접 빨래도 하고 밥도 하고 청소도 해요. 규칙도 스스로 정하구요. 아이들이 반찬 한 가지를 만들고 밥을 하고 국을 끓이는데, 1학년 때는 많이 힘들어해요. 놀다가도 밥하러 들어가야 되니까 귀찮아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내가 밥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뿌듯해 하고 자기가 한 밥을 다른 사람이 맛있게 먹는 즐거움을 알아요. 공들여 요리를 하고 싶다는 마음도 갖게 되고요.” 생활 속에서 익혀야 할 것들, 생태적이고 자립적인 삶을 익힐 수 있는 중요한 교육의 장이 바로 작은 가정이다.
작은 가정은 학부모들이 학교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학부모들이 일주일마다 돌아가면서 생활관 교사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의 가정생활, 학교생활을 바로 옆에서 함께 하며 학교를 이해하게 되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직접 보고 느끼는 계기가 된다.
작은 가정 내 규율, 규칙은 각 가정 내에서 정해진다. 학기 초에 확대가족회의를 해서 가풍을 정하고 기본규칙을 정한다. 일어나는 시간, 식사시간, 귀가시간, 식단, 식사 당번 등 자잘한 규칙들은 집집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묵학(혼자서 공부하는 시간)을 해야 하고 속옷과 양말은 손빨래를 해야 되고, 합성세제를 사용하면 안 되는, 또 인스턴트식품은 먹지 않는다는 등의 몇 가지 생태적인 생활 규칙이 있다.

 

 

지리산 자락, 모든 곳이 교실

“어, 거기 밟으면 안돼요!” 무심코 밟은 흙 두덩. 아이들이 가꾸는 텃밭이란다. 농사꾼들이 보기에는 소꿉장난 수준의 규모이지만 작은 학교에서는 학생들과 교사들이 함께 밭을 갈아 씨를 뿌리고 풀을 뽑고, 가을걷이를 한다. 작은 학교 수업 중 하나인 ‘자치살림’은 일주일에 한번 두 시간 남짓 이루어진다. 텃밭을 가꾸는 일, 모내기 등 농사가 위주가 되는데 생태뒷간을 치운다거나 울타리를 만든다거나, 김장하기, 곶감 만들기 등 모두 다 같이 힘을 모아서 해야 되는 일들은 자치살림 시간에 이루어진다.
상추, 고추, 대파, 쑥갖, 청경채, 감자와 고구마 등 공동텃밭에 울력을 나가서 가꾼 것들은 공양간에서도 쓰고 작은 가정에서 갖다 먹기도 한다. 풀 한포기, 흙 한 줌도 이들에겐 학습의 소재가 된다. 지리산 자락에 펼쳐진 들녘 모든 곳이 공부하는 교실인 셈이다.
국어, 영어, 수학, 역사문화, 과학사, 철학 등의 지식공부는 일주일에 한 시간씩 이루어진다. 일반 중학교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수업 시간이다. “무엇이 더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수업 시수가 적기 때문에 학습량 자체가 객관적으로 적지만 지식 교과를 등한시 하는 것은 아니에요. 다른 것들도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무엇보다 학생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식공부 외에 자치살림, 기능 익히기, 세상보기, 명상 등 다양한 체험공부, 생활 공부가 이루어진다.
동아리 활동은 아이들이 작은 학교의 자랑으로 손꼽는 부분이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동아리를 만들 수 있고 한 번에 여러 개의 동아리에 가입할 수도 있다. 재형이는 자전거를 수리하는 동아리와 아기북(아프리카에서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과 북한의 굶주린 동포를 돕는 모임)에 들었다. 토요일마다 동아리 활동을 하는데 일반학교에서는 경험해 볼 수 없는 작은 학교 생활의 큰 즐거움이다. 재우는 밴드부다. 지금까지는 가장 인기 있는 동아리였는데 요즘에는 춤 동아리에 순위가 밀려났다고 한다. 점심시간 내내 들리던 기타소리와 드럼 소리, 중학교 학생들 치고는 꽤 수준이 높다. 여기저기서 공연요청이 쇄도한다고 한다.

 

절집문화가 담긴 학교

“실상사와는 한 식구예요. 점심도 같이 먹고 공간도 같이 사용하고, 가끔 스님들이랑 축구도 하고 내기를 해서 자장면을 얻어먹기도 하죠.” 실상사와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고 처음 설립부터 불교철학, 연기법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특별히 불교수업을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절집의 문화는 학교 생활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아침마다 명상을 하는 것, 자기 돌아보기가 필요할 때 오백 배, 천배를 하는 것. 이런 부분들은 종교를 떠나 자기 성찰의 좋은 방식이기 때문에 교육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명상은 교과과정에 수업으로 있어요. 그 수업은 스님이 오셔서 진행을 해요. 한문 수업도 스님이 맡아주시고요. 직접적인 교류는 많지만 종교 수업은 없어요. 예불을 강요하지도 않고요.”
월요일에는 발우공양을 한다. 큰방에 모여 앉아, 자기가 필요한 만큼 음식을 덜어 남기지 않고 먹고 물로 그릇을 씻고, 씻은 물을 마신다. 발우공양을 할 때에는 말을 해서도 그릇 소리를 내서도 안 된다. 발우공양을 통해 음식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배우는 것이다.




불교의 연기법이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 세상 모든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조건지어준다고 보는 세계관에 바탕을 둔 생태적인 삶, 공동체적인 삶, 생명과 평화에 대한 생각들이 절집문화를 익히면서 절로 몸에 젖어 드는 듯싶다.

졸업논문, 학교생활의 총화

3년 동안의 작은 학교 생활은 졸업논문을 쓰는 것으로 마무리 한다. 올해는 가을쯤에 졸업논문 작품 발표회를 가질 예정이다. 3학년 아이들은 졸업논문 주제를 정하고 1년 동안 논문 쓰는 작업에 집중을 한다. 깊이 있는 학문적인 내용, 전문적인 작품들은 아니어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살아왔던 과정을 돌아보는 시간이 된다. “자신의 성장과정에 대해서 쓰는 아이들도 있고, 민주적인 회의방식은 무엇일까에 대해 쓰는 아이도 있고, 작품을 만드는 아이도 있어요. 어떤 것이든 자신의 총력을 기울여서 하지요. 졸업논문은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실현하는 기회가 되요. 3년간의 작은 학교 생활의 총화이지요.”
윤이는 졸업 논문으로 소설을 준비 중이다. 선택수업으로 일주일에 한번 시문학 수업을 듣고 있다. 어떤 소설이 나올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재우는 ‘돈’에 대해 쓰고 싶다고 한다. ‘돈의 역사’와 ‘작은 학교에서의 돈의 활용법’ 등에 관심이 있다. 자신의 생각과 관심분야에 대해 또렷이 얘기하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작은 학교는 비인가 학교여서 졸업 후 고등학교에 가려면 고입검정고시를 봐야 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검정고시를 보지만, 학교에서 따로 검정고시를 위한 교육을 하지는 않는다. 졸업 후에는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아이들도 있고, 다른 대안고등학교에 들어가는 아이도 있고 유학을 가거나 아예 학교를 가지 않는 아이들도 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은 오롯이 아이들의 몫이 되지만 그만큼 자신의 삶에 주체적인 결정자가 된다.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는 책제목처럼 공룡처럼 거대해져 버린 학교에는 아이들이 없다. 꽉 짜인 일주일 수업 시간표와, 수많은 규제, 규율들 속에서 사람과 사람간의 만남과 소통은 또 하나의 구속과 얽매임이 되어 버리곤 한다.
학교생활이 재미있다는 아이들, 학교가 자랑스럽다는 아이들. 실상사 작은 학교엔 아이들이 있고 그들의 목소리가 있고 웃음이 있었다.

 

실상사 작은학교 www.jakeun.org

 

글 · 양지연 yangji@hanmail.net | 사진 · 황석선 stonesok@kdem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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