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당시 이원홍 문화공보부장관의 불순한 문화예술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는 7월 20일 경주발언 직후 종로 경찰서는 아랍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20대의 힘> 전 전시장에 난입하여 36점의 작품을 강제 철거하고 이에 항의하는 작가 19명을 연행했다. 5명의 작가를 입건한 후 의외로 이 문제가 확대되어 공안당국은 여론의 비판을 받게 된다. 이 사태 이후 미술가들은 미술운동을 위한 미술가 대중조직의 필요성을 논의하면서 1985년 11월 22일 ‘민족미술협의회’(이하 민미협)를 발족시킨다.
전승보 <20대의 힘> 전도 2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시 이 전시를 주도적으로 기획했던 분들은 이제 모두 50대의 중견작가입니다. 살펴보면 <20대의 힘> 전 사건을 계기로 민미협이라는 진보적 미술인 조직이 만들어졌으며, 또한 일반인들에게 민중미술의 존재를 알리고 민중문화운동의 거대한 조류에 미술이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예술적 상상력의 폭과 깊이를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여전히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신학철 화백의 작품 <모내기>는 여전히 이적표현물이며, 김인규 미술교사의 부부 누드사진에 대한 법원의 음란물 규정 그리고 <아방궁 종묘 프로젝트>는 여성 미술인들이 2심에서는 승소했지만 ‘방자한 여성’의 예술행위에 대해 종친회가 힘으로 저지했던 사건이기도 합니다. 또한 국가보안법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여전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군사독재의 통치시대는 끝났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예술의 표현에서조차 금기가 존재합니다. 물론 <20대의 힘> 전은 사회상황 자체가 억압된 현실에서 나온 것이라 오늘의 것들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특별히 문제가 된 작품들은 어떤 것인지요? 이런 점을 감안해서 당시와 오늘을 비교해주셨으면 합니다. 미술 전시 때문에 작품파괴와 미술가들이 구속당한 것은 제가 알기론 미술계에서는 해방이후 초유의 일로 기억합니다. 손기환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들 하지만, 요즘 젊은 작가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작품 스타일을 바꾼 작가들도 나름대로 사회와 관계를 갖고 발언한다고 봅니다. 다만 그 문제를 심미적으로 그려내는가, 아닌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는 예전과 성격은 달리하나 본질은 여전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크게 변하지도 않은 것 같고요. 박진화 전시를 주도적으로 기획했던 사람들은 저와 박불똥, 손기환입니다. 주변의 작가들이 여럿 참여해 모두 35명이 작품을 출품했는데 작품 제목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작가로선 손기환, 장명규, 박불똥 그리고 두렁그룹 등의 작품들이 문제가 된 듯합니다. 특히 두렁그룹은 이미 그 전부터 김봉준 화백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공안당국에 노출되어 있었지요. 김우선 씨는 두렁의 작가였습니다. 김우선 씨는 취조 과정에서 험한 일을 당했고 제가 알기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결국엔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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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환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문제가 크게 벌어질 줄은 몰랐죠. 단지 이런 작품들로 전시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저희들에게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민주화 운동에 예술가로서 동참한다는 의식과 청년작가로서의 아방가르드 정신이 충만했지요. 박진화 사실 사건의 발단은 전시회였지만 이미 저와 주변의 동료들은 작업실에서 많은 토론과 비평적 작업이 있었습니다. 최민화 화백의 <불법체류자> 같은 만화 작업이 불러온 신선한 기억과 홍선웅, 유연복, 이기정의 목판화 작업, 이철수의 벽화와 삽화들이 가진 진정성 그리고 선배 세대로서 ‘현실과 발언’ 같은 분들은 이미 1970년대 말부터 나름의 준비와 작업들이 있었지요. 사건이 어디서 터질지 몰랐을 뿐이지 이미 개연성은 충분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전승보 1980년대를 관통했던 민중미술 작가들은 역사적 소명의식을 가지고 활동했다고 봅니다. 흔히들 미술가는 이타적 삶을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예술의 창작세계가 내면의 깊이를 파고드는 과정이기에 그렇게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반해 민중미술 작가들은 처음부터 민주주의 운동 과정에 몸을 던진 사람들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된 오늘날의 민중미술은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손기환 민중미술의 형식적 방법이나 논리를 실험적으로 개진한 작가나 그룹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용어가 탄생한 것은 좀 다르다고 봅니다. 민중미술이란 용어에 집착하기 보다는 그 이전에 갖지 못했던 미술인의 민중에 대한 인식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아직도 유효하다고 봅니다. 박진화 ‘민중미술’이란 용어는 진즉에 박제화 되어버린 용어가 아닐까요? 실제로 민중미술이라는 용어 자체가 공안당국이 만들기도 했지만 사실 우리 현실에선 개념적인 용어 사용을 제대로 한다거나 그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걸로 압니다. 그렇다고 지금 그것을 다시 고쳐 부르자고 할 수는 없고, 저는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민중미술 전시가 있었던 이후로는 운동으로서의 민중미술은 끝났다고 봅니다. 박제화라는 의미는 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예술적인 경향으로서의 민중미술은 여전하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는 현재진행형이라는 말도 성립이 됩니다. 그런데 사실 작가들은 작업을 하면서도 ‘나의 작품은 어떠어떠한 분류 틀에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은 잘 하지 않아요. 작가들은 그렇지 않을까요? 전승보 <20대의 힘> 전 당시 출품되었던 작품들과 작가들에 대해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손기환 선생님의 경우에는 만화로 전공이 바뀌기도 했는데 다른 작가 분들의 근황을 소개해 주신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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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환 여러 사람들이 그림을 접은 것 같고 지역사회의 문화 운동, 일부는 교육 쪽으로 일부는 전업 작가하는 분들. 만화 쪽은 주완수, 장진영 그리고 저도 이 쪽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최정현 씨는 계속 만화 작업을 하다 요즘 다른 장르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고 판화는 유연복, 김종억, 김준권 그리고 그림책 작가도 있고요. 전승보 당시 민중미술 진영은 두렁이나 오윤 선생의 목판화처럼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또 대중적 집회에 쓰임새가 강조된 걸개그림과 만화 등 민주주의 운동에 기여하고자 했던 양식이 주를 이룹니다. 하지만 <20대의 힘> 전에 출품되었던 작품들은 오늘의 눈으로 보아도 실험성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조금 소개해 주신다면? 그리고 왜 이런 실험의식이 지속되지 못했을까요? 손기환 작업을 지속하기에는 삶이 좀 힘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대부분 사회적 관심이 많다 보니 형식에 안주하기보다 새로운 매체로 진화 한 경우도 있고. 예를 들면 애니메이션, 컴퓨터 그래픽 등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일부 형식은 사회적 용도나 필요성이 감소된 탓도 있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특히 걸개그림 같은 경우에. 박진화 글쎄요. 저는 그 점에 대해 별로 견해가 없습니다. 여전히 저는 회화의 문제에 들어와 앉아있기 때문인가 봅니다. 하지만 작품의 형식은 작가들의 취향과 호기심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20대의 힘> 전 작가들은 당시 천편일률적이었던 모노크롬과 추상작업에서 더 이상 호기심을 갖지 못했던 거지요. 1970년대 저항문화로서의 대학문화를 직접 겪어서 그런 것 같은데, 정치적 저항은 당연히 주류로서의 기성 화단 풍조에도 반기를 드는 것이지요. 전승보 <20대의 힘> 전을 겪으면서 미술인들은 1980년대 민주주의 운동에 동참하는 실제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1969년 현실동인 전시 이후 군사독재정권의 미술탄압은 <20대의 힘> 전 이외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기억나는 중요한 사건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박진화 정릉벽화 철거 사태라든지, 신학철 선생의 <모내기> 그림사건, 만화가 이은홍 구속과 손기환 구속사건, 전정호. 이상호 벽화의 국가보안법 위반사건, 홍성담 구속 등 ……. 제가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이 많은 것 같습니다. 손기환 대학 내에서 만화나 판화 전시는 수시로 탄압을 받았던 것 같고, 최초의 민미협 내 만화분과에서 제작했던 만화 관련 자료집이었던 <만화정신2>지 사건도 있습니다. 특히 <만화정신2>지는 원고를 경찰에 압수당해서 안타깝고, 그 이후 계속되지 못해서 아직도 아쉬운 마음입니다. 전승보 미술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던 역사가 없었음을 미술사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20대의 힘> 전 또한 우리의 미술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미술운동은 어떠해야 할까요? 박진화 제 작업실이 철책선 바로 앞입니다. 그래서인지 ‘분단’ 문제나 ‘상생’의 이념에 대한 작가로서의 열망은 여전한 저의 화두입니다. 물론 제가 일상성이나 개인의 내면을 등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여전히 우리는 분단국가에서 살아가고 있고 예술가로서의 몫 또한 남아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손기환 작가들이 끊임없이 작품을 생산한다면 미술운동의 필요조건은 갖추어집니다. 하지만 시대정신이 없다면 운동으로서는 불충분하지요. 최초의 팝아트 전시회인 <이것이 내일이다> 전을 포함해 세계미술사를 이끈 거의 모든 미술운동은 20대 청년작가들의 시대정신이었습니다. 우리들의 <20대의 힘> 전 또한 그랬고요. 20대의 힘이 미술의 힘을 끌고 간다는 것을 청년작가들이 깊이 인식했으면 합니다. 전승보 개념미술의 기념비적인 전시인 <당신의 머릿속에 In your head>가 30년 만에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다시 열려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감흥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0대의 힘> 전을 포함해 많은 민중미술 전시에 출품되었던 작품들은 그 하나하나도 재미있지만 집단적으로 전시되었을 때 그 힘이 더 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민미협 창립 30주년 즈음에 민중미술전을 다시 연다면 예전에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관람객들에게 항상 새롭게 다가오는 그런 민중미술로 ‘20대의 힘’이 계속 이어나갔으면 합니다.
글·자료사진 전승보 1963년 부산에서 태어나 런던대학교(골드스미스) 대학원 큐레이터학과를 졸업했다. <아시아의 지금-에피소드 전>, <열다섯마을 이야기 전>, <또 다른 풍경 전>, <2006 아시아미술포럼> 등을 기획했고 현재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대학에서 박물관학과 전시기획론 등을 강의하고 있다. 박진화 1957년생으로 서울민미협 대표와 민미협 상임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강화도의 작업실에서 작품에 전념하고 있다. 손기환 1956년생으로 한국애니메이션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상명대 만화애니메이션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