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쓰는 민주주의
따뜻하게 거침없이 신작 <아들> 내놓은 장진 감독 본문
언제부턴가 장진 감독은 ‘화해’를 말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의 옴니버스 프로젝트 <다섯 개의 시선> 중 장진 감독이 연출한 <고마운 사람>을 보자. 주인공은 고문하는 수사관과 고문당하는 학생. 그런데 이 수사관이 주말에도 일하면서 고용보장조차 안되는 비정규직이었다. 두 사람 사이엔 묘한 연대가 형성되고, 학생이 수사관에게 말한다. “곧 좋은 세상이 올 거예요.”
-감독님 유머에는 ‘진짜는 엄연히 여기에 있는데 사람들은 왜 다른 쪽만 건드릴까’ 하고 묻는 듯한 장면들에서 후련함이 나오곤 합니다. 10여년 만에 아들(류덕환)과 상봉한 무기수 아버지(차승원)도 감격스러운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녀석이 너무 어중간한 거리에 서있습니다'라는 둥, 몹시 현실적으로 상황을 표현하니까 웃음이 나와요. “맞아요. 여기서는 당연이 이게 중요한데, 왜 저걸 중요하다고 그러면서 살지? 이런 생각이 있어요. 진짜를 건드리고 싶은 경우도 있고 진짜인 것처럼 상상해볼 때도 있어요. 이 무기수가 15년 만에 밖에 나오잖아요. 교도소를 보고 ‘내가 사는 곳이 저렇게 생겼구나’ 할 때처럼, 관객들이 평소엔 인식 못하고 있다가 `아 맞다 그럴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되는 그런 거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무기수들이 뉘우치는 모습과 희망이 없다는 표정이 교차하는 프롤로그가 인상적이었어요. “앞으로 뭐 할까, 내일은 뭐 해야지, 이런 게 없는 사람들이 무기수들이죠. 기다릴 게 없다는 것이 그들에겐 가장 큰 형벌이에요. 기다림을 박탈당한 사람들의 느낌을 담고 싶었어요.” -그게 비단 무기수만을 얘기하는 건 아니겠네요. “그렇죠. 사실 이 말은 제가 군대에 있을 때 메모한 거예요.” -여러 명의 무기수들이 인터뷰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됩니다. 이 장면에서 말 잃은 무기수로 실제 아버님이 카메오 출연하셨죠. “6년 전에 뇌경색이 오셨어요. 언어도 안 되고 지능적으로도 낮아지셨죠. ‘자 아빠, 나 봐봐, 찍을 때 여기 보면 돼’ 이런 식으로 연출했죠. 정말 재미난 분이셨는데. 전엔 잘 못 느꼈는데요, 제가 결혼날짜 잡고 나니까 기분이 이상해지대요. 아버지 안 아프셨으면 신부 될 사람 참 좋아하고 잘해주셨을 텐데. 친구 한명 집에 데려와도 절대 그냥 안보내시는 분이셨거든요.” -요즘 아버지 소재 영화가 많이 나오고 있어요. 우연의 일치만은 아닌 것 같고, 대부분 ‘아버지’를 다룬다기보다 ‘아버지의 부재’를 그렸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 같은데요. <아들>에서도 하루만 왔다 갈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처지가 무엇보다 안타깝죠. “아버지의 부재는 지금 대한민국 사회에선 정말 극한에 달한 것 같아요. 이 사회는 산업사회고 자본주의 사회인데, 아버지가 산업 안에 없고 자본 안에 있지 못하게 됐을 때, ‘아버지가 사회에서 도태됐어.’가 아니라 ‘아버지가 삶에서 도태됐어.’ 이렇게 돼버려요. 기러기 아빠는 또 어떻구요. 주변에 부지기수에요. 이번 영화엔 기러기 아빠는 안나오지만 아빠 기러기는 나오죠(웃음).” (영화 속엔 하늘을 나는 아빠 기러기가 가족을 이끌고 갈팡질팡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정책을 디자인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나쁜 게 아니거든요. 다 잘 해보자고 하는 건데, 그 사람들이 고민하는 수준하고 그 수혜를 받는 사람들하고 너무 차이가 커요. 그들이 고민하는 걸 너무 몰라 우리가. 그걸 서로 교류하고 알리고 해야 하는데, 적이 분명했던 시절엔 전략전술도 분명했다구요. 지금은 전략이 없어요. 내 판(영화판)에서만 생각해보면, 스크린쿼터 문제만 해도 저는 점층적 폐지론자예요. 왜냐면 여긴 시장이니까. 문화다양성을 요구하면서 다양한 걸 쿼터로 나눠 보여준다는 것도 어폐가 있어요 어떻게 보면.” -FTA만 해도 다양한 여론이 존재하는데 스크린쿼터에 대한 여론은 너무 싸늘해요. 대중이 그러는 건 한국영화에 대한 반감이라기보다 영화인들에 대한 반감이라고 보는데요. “대중과 많은 정보를 나누는 과정을 먼저 밟아야 해요. `너희(영화인)들 출판 다 죽어갈 때 도와준 적 있냐, 공연이 건국 이래 최악이라는 데 도와준 적 있냐, 농민들 자살할 때 한마디도 안 꺼냈으면서 FTA 얘기할 때 왜 (스크린쿼터랑) 싸잡아서 얘기하냐' 이럴 때 할 말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전략이 없는 거예요. 지금 영화산업이 이렇습니다, 라고 정보 교류가 있은 다음에 쿼터 얘길 해야 하는데 이 과정도 없이 유명한 공인들이 나와서 막 (시위)하고 이러니까 얄미워진 거예요. 가장 위험한 건, 쿼터가 아니라 영화라는 게 자본이 어떻게 만들어져서 제작에 들어가는지, 그래서 그 이익을 누가 얼마만큼 먹는지, 이런 걸 대중이 너무도 모르는 폐쇄적인 상황이라는 거예요. 지금 빨리 복구하고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해지는 구조가 영화계에 정말 많은데도 쿼터만이 생명인양 포장되는 게 굉장히 안타까워요.”
-지난해 한국영화가 최대의 손실을 봤고 전체적인 제작비를 줄여야 살 수 있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아들> 제작에도 제작비 절감을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셨죠. “통상 27억원이 드는 영화인데 감독 배우 스태프 다 십시일반 해서 20억원에 만들었어요. (이번 제작진은 흥행 시 성과급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개런티를 낮춰 받았다.) 솔직히 차승원하고 내 몫이 제일 컸지만. 근데요, 이건 아주 안 좋은 사례에요. 이게 충무로에 모델로 남으면 안돼요. 그래서 촬영 중반까지 감독 계약서에 도장을 안 찍었어요 내가. 성과급 방식은 정말 낙후된 방식이고, 사장이 돈 벌었으면 기분 쓰는 게 성과급이잖아요. 각자가 덜 받은 만큼을 투자지분으로 인정해줘야 해요. 투자사나 제작사에서 ‘<아들> 사례를 봐라’ 이러면서 스태프 임금 다 깎으면 너무 안 좋은 모델이 되는 거죠. 이번에 7억을 아꼈으면 스태프가 통상적으로 받는 액수에서 적게 받은 만큼을 투자지분으로 해서 보장해줘야 한다는 거예요.” -차기작으로 알려진 SF사극 <애일리 안첨지>는 어떤 이야기인가요. “서너 개 구상중인 작품 중 하나예요. 조선 임진왜란 후 5~6년쯤 된 살기 너무 힘든 시대, 이 세상이 변하려면 어떡해야 되냐 했을 때 답이 안나오는 시대가 배경이에요. 왕에게 진상 올리는 논을 관리하는 애일리라는 마을의 안첨지가 있는데, 이 논에 비행접시가 왔다 가는 거예요. 거기에 이만한 미스테리 서클이 생기고, 그게 조선 팔도에 몇군데가 생겨요. 민초들한테는 이 서클이 하나의 구원의 상징으로 인식되면서 오해와 스캔들이 생겨나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시대에도 구원은 있 다는 얘기예요.”
사진 · 허태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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