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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화가 홍성담과 민족해방운동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1. 19. 17:32


<대동 세상> 목판화, 1984년

 

1989년 7월 평양에서 제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렸다.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소속의 여대생 임수경의 방북으로 떠들썩했던 당시에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의 슬라이드가 북한으로 들어 간 것이다. 지금이야 그림 내용에 문제될 것이 없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사건의 중심에는 홍성담이 있었다. 광주 5·18 당시 시민군의 일원으로 금남로를 뛰어다녔고, 광주시내버스에 페인트로 일련번호를 매기며 5·18에 미술로 '복무'했던 화가이다. 공안당국의 요주의 인물이었던 그는 이제 반국가단체인 북한에 '이적표현물'을 제작 배포한 불순분자가 된 것이다.

 

5월의 아들, 홍성담

홍성담은 대학을 졸업하던 해(1977년) 결핵으로 무안 요양소에 들어갔다. 각종 시국사건으로 지명수배를 받던 윤한봉, 김남주를 그때 그 곳에서 만난다. 홍 화백은 요양원을 나오자마자 동료들과 '광주자유미술인협회'를 결성한다. 이 조직은 대학 내 운동권 세력과 깊은 관련을 맺으며 유인물 제작·배포 등을 맡았고, 광주항쟁 때는 '문화선전대' 로 앞장서게 된다. 홍성담의 의식화는 이렇게 그의 그림보다 먼저 있었다.
"1980년 5월 21일 오전 10시 경. 금남로에 시위대가 빡빡하게 들어 차 있었다. 계엄령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을 때 갑자기 아득한 곳에서 총성이 들렸다. 연발 사격이 짧은 간격으로, 그러나 작게 들렸다. 얼마 후 사람들이 밀물처럼 도망갔다. 나는 금남로의 광주은행 구 본점이 있었던 골목 뒤 어디엔가 시민들과 함께 숨었다. 내가 숨은 곳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총 맞은 사람이 있었다. 꿈틀거리고 있어 계엄군에 빼앗기기 전에 데려가려고 두 사람이 낮은 포복으로 그를 데려 왔다. 뻘건 핏덩어리가 함께 끌려오고 있었다. 와서 몸을 바로 눕히니 배에서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관통을 한 것이다. 끌려오던 것은 창자였다. 목의 동맥을 만져보니 뛰지가 않았다. 절명을 했던 것이다. 그 전에 비가 온 후였기 때문에 유난히 햇빛이 찬란했다. 나는 작렬하는 태양 빛 속에서 반짝거리는 물체를 발견했다. 아직 삭지 않은 보리알이었다."
홍 화백은 광주 항쟁하면 아직도 그 보리 밥알만 생각난다고 한다. 보석처럼 빛나던 그때의 보리 밥알. 홍성담의 판화와 그림들은 그 핏덩어리 속에 채 삭지 않고 보석처럼 빛나던 그 보리 밥알 하나에서 출발했다.

 



민족해방운동사 연작 중 <광주민중항쟁도>, 1898년

이적표현물이 된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

이른바 '민해운사'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정확히 말하자면 그림을 찍은 슬라이드 필름이 평양에 보내진 것이다. 걸개그림은 세로 2.5미터에 가로 7미터 그림 11폭이 이어진 즉, 가로 77미터의 초대형이었다. 동학혁명에서 일제강점기, 6·25, 5·18 광주민중항쟁 등 우리 근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사건 11개가 나누어 그려졌다. 1989년 6월 홍성담은 이 그림의 슬라이드 필름을 미국 L.A. '민족학교'를 통해 평양으로 보냈다. 작품은 이미 한양대학교에서 열렸던 집회에 내걸렸다가 경찰이 불태워 없앤 뒤였다.
당시 안기부와 검찰은 공소장을 통해 '민해운사' 중 홍 화백이 직접 그린 광주민중항쟁 부분에 대해 "5월 광주민중항쟁이 반미, 반파쇼, 반봉건 투쟁의 시각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내용으로 형상화하여 제작함으로써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의 주장과 활동에 동조하여 이를 이롭게 할 목적으로 제작했다."고 주장했다. 김선수·윤종현 변호사 등 홍 화백의 변호인단은 화가의 미술작품이 과연 사법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들은 변론 요지서를 통해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는 헌법에 의해 보장된 절대적 기본권"이라며 "국가형벌권이 화가의 작품 활동에까지 행사된다면 표현과 예술의 자유에 대한 본질적인 침해"라고 반박했다.
 


<헌혈구호> 목판화, 1984년

안기부와 검찰은 홍 화백에 대해 국가보안법상 국가기밀(간첩죄), 회합통신, 금품수수 혐의 등 총 7개의 혐의를 적용, 기소했고 홍화백은 1심에서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홍 화백에 대한 상고심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간첩죄 등의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변호인 접견권이 박탈된 상태에서 이뤄진 자백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변호인 접견권 보장을 명시한 이 판결은 당시 공공연한 관행으로 자리 잡았던 수사기관의 위법 행위에 제동을 걸었다. 대법원은 영장 발부 이전의 불법 구금과 수사기관에서의 고문과 가혹 행위 등 수사 과정에서의 위법행위는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간첩죄 등 5개의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으나 이적표현물 제작, 배포 혐의에 대해서는 그 죄를 인정했다. 당시 홍 화백에 대한 상고심 주심대법관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였다.

예술창작의 표현과 법원의 판단

민해운사 걸개그림은 당시 민중민족미술인연합(민미련) 건준위와 학생미술운동인연합이 공동으로 작업했다. 전국적으로 약 80여명의 작가들이 참여하여 1988년 10월부터 작업에 들어가 다음해 4월에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첫 전시회를 하고 전국 순회전시를 했다. 당시 참여한 작가들은 평양에 슬라이드를 보내면서 '남한의 진보적 청년 작가들은 우리의 근현대사를 이렇게 해석해서 형상화했다, 북의 작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후에 만나서 토론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는 요지의 메시지를 동봉했었다.
이후 북한에서 작가들이 그 슬라이드를 보고 그 크기 그대로 복원을 했다. 홍 화백과 청년미술인들은 그림이 북한에서 복원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복원 사실은 한참이 지나 감옥에서 당시 방북했던 문규현 신부에게 전해 들었다. 문 신부에 따르면 당시 북의 작가들은 11컷에 3컷을 덧붙여 14장 짜리로 복원했다고 한다. 당시 하나의 에피소드라면 남한에서 보낸 '민해운사'를 본 북한의 청년 작가들과 만수대 창작단의 노장 주요 멤버들이 복원 여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남한의 민중미술 양식이라 해도 좋을 걸개그림의 화풍과 내용들은 북한에서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지금이야 민중미술이 한국현대미술사에서 가장 가치 있는 양식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받지만 그때는 남과 북 모두에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투쟁속보> 목판화, 1987년


결국 대법원에서 간첩죄 등 주요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해 파기환송심까지 갔지만 그림은 이적표현물로 판결 받았다. 이것은 결국 사상의 자유에 관한 문제이다. 그림의 시각적 형상이 텍스트가 지시하는 의미 내용을 도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홍 화백의 말처럼 길거리에 걸어가는 사람을 잡아서 '네 마음 속에 이러이러한 생각을 품었지? 아니면 그전에 한번이라도 그런 적 있지 않느냐'라면서 국보법 위반이라고 하는 격이다.
그림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을 홍화백은 이렇게 말한다. "웃기는 일이다. 예술가는 창작표현에 관한 하나의 주체이다. 자기가 자신의 뜻대로 창작하고 그에 대한 책임도 지는 것이다. 책임이란 대중의 평가를 감수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법이 '여기까지만 그려라, 여기서부터는 못 그린다'는 식으로 선을 긋는 것은 인간의 뇌수 일부분을 덜어버리는 행위이다. 더 비극적인 일은 국보법에 저촉될까봐 예술인들이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예술은 대중과의 소통을 통해 스스로 자기 정화를 해 나간다. 권력의 이름으로 예술을 좌지우지하는 사회는 타락하고 부패할 수밖에 없다. <퇴폐예술전>을 만들어 낸 나치 독일과 무엇이 다른가?"

 

홍성담은 1955년에 태어나 조선대 미대를 졸업했다.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선전 요원으로 활동했다. 1983년〈시민미술학교>를 개설했으며, 1989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었다. 1990년 국제 엠네스티 본부에서 '올해의 양심수 3인' 중 한 명으로 그를 선정하였고 현재까지 '홍성담의 날'을 매년 기념하고 있다. 가나아트센터, 학고재 화랑, 독일 행체화랑 등 국내외에서 초대개인전을 수차례 가졌다.

 

글·자료사진 전승보
1963년 부산출생. 런던대 대학원(골드스미스) 큐레이터학과를 졸업했다. 미술잡지 기자, 미술관 큐레이터 등의 일을 해왔으며 현재는 아시아 지역 미술인들과 함께 ASIA ART FORUM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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