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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에서 충무로까지ㅣ 배우 기주봉 본문
절치부심한 기주봉은 1979년 <관객모독>의 열연으로 ‘신촌의 앙팡테리블’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주목받는다. 30년 동안 76극단의 레퍼토리로 살아남은 <관객모독>은 한국 연극의 지형도를 흔들었고, 배우 기주봉의 삶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관객모독>은 초연 당시 배우들의 욕설과 물을 퍼붓는 기행이 화제가 됐지만, 객석에서도 유리창을 깨고 난동을 부리는 등 격렬한 반응이 쏟아졌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거칠게 객석을 압도하던 성격파 배우의 입에서 “정수기를 사 달라”는 단순한 말은 쉽게 흘러나오지 않았다.
형사 역을 도맡아 했지만 기주봉 만큼 악역을 선명하게 수행하는 배우도 드물다. 오랫동안 정극을 통해 다져진 비극성은 화면에서 찰나에 강렬한 인상을 뿜어낸다. 박찬욱 감독의 제안으로 원래 맡은 형사반장 역을 포기하고 배를 칼로 긋는 팽 기사를 연기했던 <복수는 나의 것>은 그러한 힘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친구>의 보스나 <두사부일체>의 재단이사장 상춘만도 그러하다. 드라마 <올인>의 배상두나 <불멸의 이순신>의 윤환시는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섬뜩하고 차가운 악당의 면모를 개성 있게 드러낸다. 강렬한 연기, 열린 마음으로 독립영화를 감싸다 드라마 <연애시대>와 <달콤한 스파이>로 대중들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선 기주봉이 선택했던 최근작은 민병훈 감독의 <포도나무를 베어라>. 수도원을 지키는 문 신부의 쓸쓸한 뒷모습은 젊은 신학도들의 고뇌를 현실과 연결하는 무게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혼자서 몰래 포도주를 마시거나 평소에는 엄격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인간적인 온화함을 드러내고 허물을 감싸주는 문 신부의 모습은 틀에 박힌 아버지나 선생님의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다. 저예산 예술영화 <포도나무를 베어라>에 출연하고 출연료도 변변하게 받지 못한 기주봉은 웃으며 “서로 도와주자고 하는 즐거운 일”이라고 한다. 제작을 겸한 민병훈 감독이 자신보다 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기주봉은 연기의 폭만큼 작품 선택의 폭도 드넓은 배우다. 기주봉은 오랫동안 독립영화계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연극계의 대선배인 그에게 수많은 졸업영화 작품이 의뢰됐던 건 그러한 개방적인 태도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성격이 분명하고 좋은 작품이라면 단편이라도 언제든 환영”이라고 말한다. 무대와 스크린을 벗어나면 “선생님보다는 선배”로 불리길 원하는 기주봉의 자상한 성격도 한몫 했다. 가난과 세월도 배우 기주봉을 잠식하지는 못했다. 반평생을 몸으로 겪어낸 배우의 어려운 현실에 대해 묻자 기주봉은 “보통 사람들이랑 똑같이 약삭빠르고 계산에 능한 사람이 무대에 서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리고 어느 수준까지 좋은 연기를 할 수 있겠나”라고 반문한다.
그의 아버지는 사상범이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는 동시에 연극인이었다. 기주봉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연기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했다. 흥미로운 건 기주봉의 스무 살 먹은 아들도 연기를 준비하고 있다. 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성격파 배우의 강렬한 눈빛이 순간 누그러든다. “같이 영화를 가끔 보는데 작품 분석은 나보다 나은 것 같다.”고 슬쩍 칭찬을 흘린다. “언젠가 아들과 함께 무대에 서서 부자간의 이야기를 연기하는 날을 기대한다.”고 그는 말했다. 삼대로 이어진 무대에 대한 열정을 목도하는 일은 관객들에게도 즐거운 경험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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