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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쓰는 민주주의
그 곳엔 지치지 않는 배움이 있다 풀무야학 저녁 6시, 서울 쌍문동 한 주택가 구석진 건물에 가방을 든 아주머니들이 하나 둘 씩 들어가기 시작한다. 젊은 여자부터 중년의 티를 훨씬 넘어 머리 희끗한 노인들까지 그 구성원이 다양하다. 댄스 교습소는 아닐테고……. 건물로 들어가는 이유는 모르지만 외벽에 걸린 나무 현판이 그들의 목적을 짐작케 한다. ‘풀무야학’에 불이 켜진다. “사! 백! 팔! 십! 만!” 서너 평 되는 칸막이 교실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이들은 아니다. “자아, 숫자 다시 한번 보시고 따라 읽어 보세요.” 셈을 가르치는 젊은 교사의 목소리 또한 학생들 못지않게 기운차다. “여기서 하믄 자~알 되드만 집에 가서 혼자 하믄 잘 안돼.” 푸념하듯 아쉬워하듯 고백하는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깊은 아쉬움이..
소백산의 잔설이 이른 봄까지 날리던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아마 고등학교 2학년 새학기가 막 시작됐을 무렵이었다. 지루하고 따분하던 학교생활에서, 그래도 새학기만큼 매력적이고 가슴 뛰는 시간은 없었던 것 같다. 옆자리 짝꿍도 바뀌고, 모든 교과목의 담당 선생님들이 바뀌었으니 말이다. 새학기 첫 번째 한문 시간이었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의 한문 선생님은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칠판에다 흰 분필로 뭔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너는 온다’로 시작하는 이성부 시인의 ‘봄’이라는 시를 단숨에 써내려갔고, 우리는 그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아마 그때 교실 창문 밖으로는 겨우내 안달 난 봄이 살금살금 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처음 그녀를 만나고..
태풍의 영향권 안에 있어서인지 가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더웠다. 세탁소 지하 계단을 조심스레 밟아 내려가자, 남자 네 명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홈페이지 사진에서처럼 덩치들이 우람하지는 않다. 웃고 있는 ‘밴드바람’의 얼굴들이 환했다. 홍상환 씨가 얼른 2집 앨범 을 건넸다. 얼마 전 오디션을 보고 나서 7월 말쯤 합류한 보컬 김현효 씨는 말할 때 대구 사투리를 섞어서 쓴다. 기타를 맡고 있는 홍상환 씨는 ‘밴드바람’에 합류한 지 가장 오래됐다. 말할 때 아주 신중한 유하종 씨는 신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이며, 베이스를 연주한다. 드럼을 치고 있는 박성균 씨의 모자 밖으로 삐져나온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났다. 두 개의 밴드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는 박성균 씨는 다른 팀의 공연..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탄다. 엘리베이터 안 벽면에 붙은 다양한 광고를 무심히 지나치며 버스를 타고 다시 지하철을 탄다. 전철에서 일터까지는 10분이 걸린다. 건물 외벽에 붙은 광고를 보고 한창 인기 있는 연예인의 얼굴을 차지하고 있는 옥외광고를 올려본다. 사무실에 들어와 신문을 읽고 인터넷으로 뉴스를 본다. 자주 사용하는 몇 개의 이메일을 열면 지난 밤 사이에 도착한 스팸 메일을 지우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일하는 중에도 핸드폰에는 광고 문구가 찍히고 보험 가입을 권유하는 광고 전화가 수시로 걸려온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현란한 쇼윈도를 곁눈질 하고 밤이 되면 더 빛나는 건물 외벽에 붙은 광고판을 훑어본다. 이렇듯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우리는 수많은 매체에 일방적으로 강요당하..
아침부터 뿌려대던 장맛비는 오후가 되자 말끔하게 갰다. 습기가 유난히 많아 후텁지근한 날씨에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연신 손부채를 부쳐댄다. 원폭 관련 60주년 행사 ‘서울-히로시마 평화의 종이학 대장정’을 다큐멘터리로 만들기 위한 첫 촬영이 광화문에서 있다는 의 김환태 감독을 만났다. 진한 감색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에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멘 그는 씩씩해 보였다. 아직 점심식사 전이라는 그와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 토요일 서울 광화문의 한낮은 어디를 가나 시끌벅적하다. 결국 우리가 자리를 잡은 곳은 스파게티 집이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지금 제작 중인 영화 ‘받들어 총!’으로 시작되었다.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 찍으면서 많이 변했어요 작년 5월 인권영화제에 상영됐던 ‘..
출근 시간을 조금 지나서 탄 마을버스가 안국선원 앞에 멈추자 꽤 많은 사람들이 와라락 내린다. 함께 내린 이들 모두 안국선원 안으로 들어가고 혼자 남은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문이 활짝 열린 정갈한 낮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두레문화기행, 두레생태기행, 보리방송모니터회라고 씌어진 초록색 간판이 풀처럼 싱싱하다. 그렇게 열린 문은 아무 사람이나 반긴다는 듯이 환하고 따뜻하다. 현관에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마자 책이 빼곡히 꽂힌 책꽂이와 낮은 책상이 눈에 들어온다. 두레는 우리네 안방처럼 포근했다. 오후에 있을 회의 준비로 바쁜 조채희 사무국장은 동그란 눈에 웃는 얼굴을 가졌다. 명함이라고 내미는데 보니 그냥 소박한 누런 종이에 까만 글자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저희 김재일 대표님이 드라마 작가세요. ..
‘싸바싸바……’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미팅에 나온 남자가 몸을 흔들고 있는 상대방 여자에게 궁금하다는 듯이 “춤추는 거 좋아하세요?”라고 묻는다. 그러자 여자는 “춤추러 갈래요?”라며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대답을 한다. 이후 두 남녀가 춤을 추듯 신나게 빨래를 하는 장면이 화면에 들어온다. 미팅에 나온 두 젊은이가 만나 봉사활동을 한다는 내용의 한 기업 이미지 광고의 이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잠깐이나마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는 느낌이 들게 한다.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에는 이런 ‘봉사’와 ‘나눔’의 의미를 지역주민들과 함께 고민하며 실천하는 지역복지센터 가 있다. 지역자원을 활용한 봉사 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지난 2003년이다. 당시에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라는 시민운동단체의 부설..
“남의 단체에 얹혀살고 있어도 괜찮나요?” 수화기 저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당당하다. “물론입니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건강하게 활동하고 있는 단체라면 길거리에서 산들 어떻겠어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내다본 창밖은 흰 목련꽃이 한창이다. 오후에는 다들 취재를 나간다는 말에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다. 오전 열 시 약속을 지키기에는 시간이 빠듯했다. 전철역 계단을 급하게 뛰어 내려가서 막 출발하려는 전동차에 간신히 올라탔다. 대영빌딩 604호. 문에는 ‘민중의소리’ 팻말이 붙어 있다. 살며시 문을 열자 창가 쪽에서 회의를 하던 사람이 ‘여기요’ 라고 외친다. 일곱 명이서 동그란 탁자에 둘러앉아 뉴스 기획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네들과 조금 비껴 앉아서 그네들이 회의하는 모습을 본다. 모두들..
경기도 북부, 의정부에서도 외곽인 의정부시 고산동 116번지. 뺏벌이란 마을 입구에는 캠프 스탠리 미2사단 포병여단 본부가 있다. 이곳은 예부터 배가 많이 생산되던 지역이라 배나무가 많아 배벌로 불렸고 그러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부르기 쉽게 뺏벌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 의정부 인근 지역에 있는 8개의 캠프 중 가장 많은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외지인들이 호기심 반 경계의 마음 반으로 쳐다보는 이 마을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미군부대 기지촌이다. 마을 입구에 있는 단층짜리 관(官) 건물처럼 보이는 허름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첫눈에도 그곳이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쉼터 ‘두레방’ 이라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처음부터 이 건물에서 있었던 건 아니고 클럽들 사이에 있었는데 몇 년 전에..
몇 해 전, 먼 친구로부터 어느 채식주의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종교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며 그런 분야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닌 그냥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그 사람은 어느 날, 반찬으로 먹을 고등어를 손질하던 중 문득 생선의 그 푸른 살이 자신의 살과 다를 바가 없음을 느꼈고 그 살을 익혀서 입으로 넣는 일이 마치 자신의 살을 씹어 먹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그 후로 어떤 고기도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별 희한한 사람도 다 있군’, ‘그럼 뭘 먹고 살아?’ 하는 정도의 지극히 짧고 어리석은 말을 했던 기억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육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채식주의자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