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사료이야기/사료(구술) 이야기 (55)
함께쓰는 민주주의
용공조작의 희생양 이철규 열사 의문사건 하형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전문요원 꽃잎처럼 지는 것을 슬퍼하진 말거라 분노의 계절이오면 시퍼렇게 살아오는 데 투쟁으로 일어서는 피맺힌 함성소리 따라서 울부짖는 못다한 피의 영혼아 또다시 타네 그대몸이 거역의 몸부림으로 오늘도 사라지는 부릅뜬 반란의 눈동자여 겨우내 얼어붙은 새날이 오면 다시 태어나서 우뚝 서리라. ( ‘영혼의 노래’, 이철규 열사 추모곡) 정치적 의문사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벌어진 인권침해에는 일정한 정치적 동기가 전제되어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정치적 동기가 전제된 의혹의 죽음을 우리는 ‘정치적 의문사’라 부르곤 한다. ‘정치적 의문사’는 제 5공화국 이후 형성된 일정한 역사적 개념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정치적 혼란과 갈등으로 말미암아 수..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지 올해로 35주기를 맞았다. 열사가 떠난지 35년 만에 청계천변 평화시장 앞길에 조성된 ‘전태일 거리’에는 그의 ‘사랑’ 정신을 이어줄 동판 블록 6,000여 개와 열사상이 세워져 후대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전태일의 ‘사랑’ 메시지를 만나 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사업회에 남겨져 있다. 바로 전태일의 일기장과 그가 남긴 글들이다. 전태일이 언제부터 일기를 썼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남아 있는 것은 1967년경 평화시장 시절부터이다. 사업회가 주관한 2002년 민주화운동 역사전시회에 전태일기념사업회 측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전시를 하면서 전태일 일기장 사본을 사료관에서 소장하게 되었다. 전태일 일기장과 수기는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1988, 일기·수기· 편지모음..
지난 9월 21일 통일운동가 김병권 선생이 타계했다. 3일 후에 거행된 민족통일장에서 이학영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은 조시를 통해 “이제 당신이 꿈꾸던 통일된 조국을 이룩하는 꿈, 자립된 평화의 나라를 만들려던 꿈, 가난과 소외가 사라지는 해방된 사회의 꿈을 우리가 대신 지고 가겠습니다.”라며 선생의 죽음에 애석함을 표시했다. 김병권 선생이 한평생 이 땅에서 이루려했던 꿈을 편안히 자리에 앉아 인터넷 기사로 읽어내려 가려니 송구스런 마음이 앞선다. 김병권 선생은 1960~70년대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비합법 지하운동 조직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었다. 1921년 대구에서 출생한 선생은 4·19혁명 당시 사회당 대구지부와 민족자주통일협의회에서 활동했고 1961년 남북학생회담 추진과 관련해 첫 옥고를..
79년 8월 신민당사에서는 YH무역회사의 기업 정상화를 주장하며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500여 명가량 되는 YH노조 조합원들의 농성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8월 11일 새벽 1,000여 명의 경찰들이 폭력으로 농성장을 진압한 결과 순식간에 그들은 당사에서 끌려 내려와 경찰서로 연행되거나 고향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김경숙만이 홀로 신민당 당사 뒷마당에 남겨졌다. 사랑하는 동생과 어머니 그리고 친구들을 남겨두고 숨을 거둔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유신정권 붕괴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평범하고 여린 소녀였던 그들이 한 나라의 야당 당사에 들어가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투쟁하며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노동자로 서게 된 것은 당시 경찰 발표처럼 누구의 사주에 의해서 하루아..
초고속 인터넷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정보를 얻기 위해 가장 먼저 인터넷을 검색한다. 책이나 자료 혹은 전문가를 통한 문의 등 이전의 관행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는 모습들이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인터넷 속의 지식이나 정보를 수없이 활용하면서도 전자환경 속에서 지식정보가 어떻게 생성되고 활용되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지식정보자원의 근간이 되는 기록물들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일반에게 제공되는지에 대해서는 복잡성 뿐 아니라, 어떤 방침이 선행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가치 있는 기록들이 일정 기준에 따라 평가되어 일반에게 인터넷을 통해 제공되기 위해서는 데이터베이스 구축 과정을 거쳐야 한다. 데이터베이스의 방법은 매우 다양한데, 이를테면 텍스트, 테깅, 스캐닝..
1980년 5?18민중항쟁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들이 드물지만, 같은 시기 강원도 사북에서 일어난 광부들의 저항과 투쟁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나마 사북에서 발생한 사건을 단지 술 취한 광부들이 일으킨 ‘광부들의 폭동’, ‘공포에 휩싸인 탄광’, ‘유혈 난동’으로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사북사태로 불리우는 이 사건은 당시도 폭동이었고, 25년이 지난 지금도 제대로 진실이 규명되지 않고 있다. 사북사태는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에 걸쳐 국내 최대의 민영탄광인 강원도 정선군 동원탄좌 사북영업소에서 광부와 그 가족 6,000여 명이 어용노조와 열악한 노동환경에 항거하여 곡괭이와 몽둥이로 무장, 무기고와 화약고를 장악하고 3일 동안 사북을 점거한 사건을 말한다. 사북에서의 사건..
민족일보와 조용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하여 민주화운동 관련 사료는 지나간 민주화운동의 역사들을 말하고 있다. 그 낡은 종이 한 장 한 장, 빛바랜 깃발과 사진 속에서 민주화를 향한 갈망과 외침과 뜨거운 함성들이 아우성치며, 투옥과 수배와 죽음도 마다않던 투쟁과 저항이 거친 숨으로 꿈틀댄다. 그래서인지 때로는 빛바랜 종이 한 장이 천근의 무게로 다가와 민주화와 통일의 뜨거운 염원으로 그날을 얘기하며 오늘을 묻고 있다. 지난 5월 3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과거사법)의 국회 통과로 많은 논란이 일어나고 개정 논의가 한창인 무렵, 사업회에 소중한 사료가 수집되었다. 현재 통과된 과거사법 논란의 핵심사안 중 하나인 ‘조용수와 민족일보’ 관련 사료이다. 이 사료는 『조용수와 민족일보』 저자..
충청북도 청주시 청주도시산업선교회가 2004년 10월 11일 32년간의 활동 내용에 대한 사료들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기증하였다. 이는 1972년 산업선교회가 창립되면서부터 생산하고 수집한 농민·학생·청년·노동·도시 빈민 운동 등에 관한 1만여 건의 민주화운동 관련 사료이다. 정진동 목사는 32년간 모아온 사료를 사업회에 기증하고, 1박 2일의 가을 여행을 다녀오면서 이렇게 소회를 피력하였다. 그간 32년의 청주 도시산업 선교의 민중들의 인권 사료를 정리하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으로 전달하고 피곤한 중에 1박 2일의 여행을 다녀왔다. (중략) 장성군의 필암 서원을 들려 옛 선비들의 유적을 관람하고, 특히 탐관오리들의 재산을 털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준 홍길동 생가를 들러서 명종 때 청백리로 이..
사진으로 남긴 투쟁의 기록, 박용수 선생의 필름 사료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박용수 선생의 8,90년대 민주화운동 사진필름 8만 7천여 점이 지난해 연말 사업회에 기탁되었다. 민주화운동의 역사 기록에서 박용수 선생의 사진이 가지는 엄청난 중요성과 소중함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어떤 수식어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박용수 선생이 80년대 민주화운동 투쟁현장을 뛰어다니며 찍은 사진들에는 민주화운동의 뜨거운 열기와 함성, 용솟음치는 기억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뜨거운 민주화의 열기만큼이나 집회와 투쟁이 많았던 80년대에 2,30대의 젊은 나이에도 일일이 참여하기 힘들만큼 수많은 집회와 시위마다 박용수 선생은 50대의 나이에 사진기를 둘러메고 어김없이 그 현장에 나타나곤 했다. 80년대 민주화운동 투쟁현장에는 늘..
영등포 산업선교회에서 기증한 민주화운동 사료의 의의 지난 3월, 18개월간의 협의를 통하여 영등포산업선교회가 60년대부터 보존해 온 산업선교 및 노동운동 관련 사료 34,000여 건을 사업회에 기증하였다. 이로써 사업회는 ‘민주화운동자료관추진위원회’ ‘가톨릭농민회’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 이어 ‘영등포 산업선교회’로부터 사료들을 기증받음으로써 약 40여만 건의 민주화운동 사료들을 확보하여 명실상부한 민주화운동 전문 사료관으로서 그리고 민주화운동 지식정보센터로서의 위상을 동시에 확보하게 되었다. 영등포 산업선교회(이하 영등포 산선)의 역사와 주요 기증사료에 대한 소개 및 수집 사료에 대한 온-오프라인에서의 공개 및 열람 계획을 소개하고자 한다. 영등포 산선의 역사 영등포 산선은 한국 교회 산업선교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