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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예술 수난사, 역사의 반복인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1. 21. 17:21
 


동아대 벽화<6월항쟁도>

올해 대학 새내기들은 1988년생들이다. 그들에게 1987년 6월민주항쟁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지금의 대학생들에게 당시의 정황과 사건들은 필름 속에 남아있는 먼 과거의 흔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래서인가? 지난 달 부산 동아대학교 총학생회는 동아대 승학캠퍼스 교수회관 앞 벽면에 그려진 가로 30미터, 세로 3미터 크기의 <6월 항쟁도>를 철거하겠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시대적 변화에 따른, 더 이상 필요가 없는 벽화의 교내 환경미화를 위한 정당한 철거인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예술탄압인가?
 
2007년 7월, 민중벽화 철거 사건
 

이 벽화는 6월민주항쟁 당시 숨진 동아대 졸업생 이태춘 동문을 추모하고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8년 학내 미술동아리 ‘열린그림마당’이 제작한 것이다. 부산 좌천동 육교 위에서 시위를 하던 도중 사망한 이 열사를 중심으로 도상이 표현된, 당시 대학생들의 시대 의식을 알 수 있는 그림이다. 오늘의 시각으로만 보자면 그림에 등장하는 구호들이 생경하기도 하고 미술대학생들의 아직 설익은 형식들이 거칠게 보일 수 있다. 그래서인가? 보수진영의 뉴라이트 계열로 알려진 동아대 총학생회는 ‘벽화가 주변과 어울리지 않고 민주화와 뚜렷한 연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지우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중앙운영위원회를 열어 철거에 대한 학내 의견을 수렴했다고 한다.
하지만 <6월 항쟁도>는 당시에는 물론이고 우리 미술사에 역사적인 사건으로 등장한 민중미술의 중요한 사료임과 동시에 부산지역 시민들의 민주화 염원을 담은 대표적인 시각 예술품이기도 하다. 시대의 증거를 세월이 흐른 후에 동시대에 맞지 않다고 철거한다면 세월이 지난 후에 남아있을 예술품과 유물이 얼마나 될까? 이 사건은 벽화를 보는 예술적 관점의 차이가 아니라 시대정신을 어떻게 읽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인 셈이다.
동아대 총학생회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미국에 대한 표현(성조기 훼손)과 벽화가 낡고 퇴색되어 학내 풍경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상의 표현문제에서 정말 우리 사회가 금기시해야 할 것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벽화 <6월 항쟁도>는 학내외의 민주화 염원과 더불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민족의 자주통일을 표현한, 그림이 그려질 무렵(1988년)에는 전국에 몇 없는 대형 민중벽화이기도 했다.
벽화는 이후 경찰 폭력 장면과 박종철 열사의 물고문 장면이 스프레이로 훼손되는 사건을 거치면서 당시 민중미술의 탄압사건에 연류 된 역사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1980년대 당시 집회 시위 현장에서 사용되던 걸개그림들이 오늘날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것은 예술성의 뛰어남이 아니라 역사적인 평가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성은 우리 시대의 예술적 다양함을 미술 사료적인 입장에서도 보존해야 할 만큼 그 가치가 높다 할 것이다.

 



이내창 열사의 묘


그동안 전국의 대학가에서 그려진 민중벽화들 대부분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것들 모두 보존해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그나마 남아있는 극소수의 벽화를 철거하겠다는 동아대 총학생회의 입장은 궁색해 보인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부산민족미술인협회, 부산 시민단체연대회의 등 단체와 동아대 6월항쟁기념사업준비위, 동아대 민주동문회 등은 “민주화의 염원을 담은 이 그림은 우리나라 민중미술의 중요한 작품이자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의 자랑스러운 증거”라며 “이를 미관상의 이유로 없애겠다는 것은 역사인식을 결여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미 이 벽화는 지난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공기금을 받아 서울에 있는 연구공간 ‘산방’에서 간접 자료(사진물) 수집을 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기념비적인 민중벽화로서 <6월 항쟁도>를 기록한 것이다. 당시 벽화 제작에 참여했던 한 작가는 “민주화에 동아대가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담은 그림이지 처음부터 주변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그린 것이 아니다.”면서 “학교 측도 아닌 학생이 경관을 운운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아대 부총학생회장은 “기념비 건립 등 20주년 기념사업은 충분히 했다.”면서 “주변 경관을 해치는 벽화를 지우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한다.

 

1989년 8월, 어느 대학생의 죽음

 

“……그렇게 여름방학 끝물인 무렵 8월 13일쯤인가 그와 마지막 술잔을 나누었다. 당시 태형이 친구인 정환이가 내려와서 둘을 비롯해 나, 짬짬거사, 장건상 등으로 기억하는 몇 사람이 내리 포장술집에서 늦게까지 술을 먹고 있었다. 그는 귀갓길에 술집에 들러 술 몇 잔을 마시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말 몇 마디 못 나눈 채 술집을 나가는 그의 두 어깨가 몹시 무거워보였는데, 아,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자리였다. 이틀 후 그는 생판 연고 없는 거문도 해안가에 누운 채로 발견됐고, 당시 전남 강진에 사는 후배 집에 놀러 갔었던 나는 김문수의 연락을 받고 여수에 가 선발대와 합류해서 거문도로 들어갔다. 안경이 벗겨지고 군데군데 심한 타박상을 입은 그는 말이 없었고, 나도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틀 전만 해도 안성에서 같이 술을 마시던 사람이 뭐 어쩌자고 여기까지 와서 이 지경이 됐는지 너무나 기가 막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박성용.cafe.daum.net/19890815)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이내창 열사의 죽음에 관한 어느 학우의 회고담이다.

 


그때는 그랬다. 대학생들이 줄줄이 죽어 나갔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유화국면이 조성되면서 학생들과 시민사회 단체들의 구속은 늘어만 갔다. 중앙대학교도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중앙대에서 예술대학은 운동권의 중심이었다. 당시 집회에 참석하는 학생들의 절반 이상은 예술대학생이었다. 문예창착과(문창과)의 걸물들과 연극영화과의 인재들, 미술학과에 산재했던 의식 있는 미술학생들이 예술대는 물론 중앙대를 끌고 나갔다.
총학생장이었던 이내창(86학번) 역시 미술을 전공하는 조소과 학생이었다. 늦깎이로 학교에 들어 온 그는 입학하자마자 교내의 민중예술사건(당시 사건으로 심영철은 이적표현물발간으로 국가보안법에 걸려 2년 동안 구속되었고 책들은 을지로의 인쇄소에서 곧장 안기부에 압수당했다.)을 목격하게 된다. 당시 중앙대 예술대에서는 운동권 아니면 학생회장이 될 수가 없었다. 만약 운동권 학생들을 모두 제적 시킨다면 문창과는 폐과되고 회화과는 학생들이 절반 이상이 날아가 버릴 판국이었다. 이내창 역시 판화 동아리를 창립하는 등 민중미술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학생 운동에 뛰어들었다.(1989년 8월 14일 학교를 나가서 그 다음날인 15일, 그가 교내 8·15 행사를 주도해야 할 그 시간에 그는 거문도 유림해수욕장에서 물에 빠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20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래서인가? 몇 남지 않은 민중벽화가 철거당한다고 한다. 이내창 열사가 당시 동아대 학생이었다면 아마 총학생회장을 했거나 동아대 미술동아리에서 바로 그 벽화를 그리고 있지 않았을까?
다시 돌아오는 8월에 그를 생각하는 것은 비단 그가 미술대 학생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에게 남은 역사의 기억이 내일의 기억으로 다시 올 것이란 생각 때문이라면 필자의 지나친 기우일까?

 

글·자료사진 전승보
1963년 부산에서 태어나 런던대학교(골드스미스) 대학원 큐레이터학과를 졸업했다. <아시아의 지금-에피소드 전>, <열다섯마을 이야기 전>, <또 다른 풍경 전>, <2006 아시아미술포럼> 등을 기획했고 현재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대학에서 박물관학과 전시기획론 등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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