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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림 사건과 예술인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4. 28. 18:45
 

1993년 봄이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당시 필자가 미술잡지사 기자로 일을 할 때, 시인 천상병 선생의 부인 목순옥 여사가 운영하던 카페 귀천에 들렀다. 달랑 테이블 하나에 의자 네 개가 전부였다. 두 평도 채 되지 않는 공간을 통해 고단했던 그의 삶의 여정을 느낄 수 있었다.
목 여사를 통해 지면으로만 대해오던 시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친 김에 어려운 원고 청탁을 했다. 그리고 마감 날, 동료 기자가 들고 온 원고지에는 천 시인의 오줌이 지려있었다. 누렇게 얼룩이 졌던 그 원고는 천 시인이 이생에 남긴 마지막 원고였다. 필자에게 동백림 사건의 이미지는 그렇게 천 시인의 오줌 지린 원고지를 통해 들어왔다.

시인 천상병 - 술 한 잔 값으로 얻은 죄
“북괴대남간첩사건발표. 교수 학생 194명 관련. 동독, 소련, 중공, 평양 내왕하며 접선. 김정보부장 회견.” 1967년 7월 28일자 어느 일간지에 보도된 기사 제목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유럽에 거주하는 유학생과 교민 194 명이 동백림(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내왕하며 대남적화 활동을 했다고 발표했다. 간첩으로 지목한 인물 중에는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 시인 천상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최종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된 피고인은 한 명도 없었으며 이후 3년 동안 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특사로 석방되었다.
서울상대 출신인 시인 천상병(1930~1993)은 마산 중학교 재학 중 담임선생이었던 시인 김춘수의 권유로 시를 써 청마 유치환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술을 벗 삼아 살았던 가난한 천재 천상병은 대학 시절에 소설가 한무숙 선생 집 안방에서 작은 양주병을 몰래 들고 나와 마셨더니 향수병이었다는 사건이 일화로 남아 있다.
그를 말할 때 술을 빼곤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종내 술 한 잔 값이 사단을 내고 말았다. 천 시인이 동백림 사건에 얽힌 것은 서울상대 동기생인 강빈구 때문인데, 그는 유학시절 김일성대학 교수를 두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서울상대 조교수로 근무하다 구속된 그는 천 시인의 이름을 댄 적이 없었지만 영문도 모르게 천상병이 잡혀와 있더라고 한다. 강빈구는 천 시인에게 동독을 방문했던 경험을 이야기했고 그에게 몇 차례 막걸리 값을 쥐어 주었던 사실이 있었다. 천 시인의 죄목은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상의 불고지죄 및 형법상의 공갈죄였다.
천 시인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3개월 동안 전기고문을 포함해 갖은 치욕스런 취조를 받았다. 결국 6개월의 옥고를 치룬 후 선고 유예로 풀려났으나 그 후 폐인처럼 생활을 하다 행려병자가 되어 아무도 모르게 청량리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었다. 그의 행방을 알 길이 없던 친구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60여 편의 유작시를 모아 유고 시집 『새』를 출간했다(1970년 12월). 그러나 시집이 나온 뒤 비로소 연락이 된 친구들이 찾아가니 천상병은 침대에 걸터앉아 아이같이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친구들을 맞았다고 한다. 그의 다리 사이에는 전기고문 후유증으로 소변을 가리지 못해 채워진 커다란 기저귀가 있었다.

 


1967년 서울형사지법에서 열린 ‘동백림 사건’ 공판 사진제공 경향신문

고암 이응로 - 여긴 무서워서 어째 왔노?
“모두 같은 민족 아닙니까? 여러분들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동백림에 간 것은 자식의 소식을 듣고, 거기서 만날 수 있다고 해서 간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보면 민족분단의 결과입니다. 죽은 줄로 알았던 아들이 북에 살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아들을 만나게 해 주겠으니 오라고 했을 때, 거절합니까, 만났다가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그만둡니까.” 동백림 사건 공판에서 고암 이응로(1904~89)의 최후 진술이다. 1967년 북에 살고 있는 아들을 보기 위해 윤이상과 함께 북한을 다녀온 탓으로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었던 것이다.
고암은 1958년 서독에서의 초대전을 계기로 유럽에 간 후 1960년 파리에 정착했다. 프랑스에서 한지에 수묵을 사용해 스스로 ‘서예적 추상’이라고 이름붙인 독창적인 작업으로 현지에서 인정받게 되는데 그는 회화적 기법과 재료에 대한 갖가지 실험으로도 유명하다. 파리 정착 기간 동안 목각, 타피스트리, 빠삐에 꼴레 등 다양한 실험을 하며 특히 한자를 해체하거나 변형한 ‘문자 추상화’로 동양적 정서를 표현했다.
고암의 이런 실험적인 자세와 열정은 옥고를 치르는 와중에도 그치질 않았다. 매일 밥알을 조금씩 모아서 밥풀로 만든 소조 작업 <군상>과 배식 때 나오는 간장을 잉크삼아 화장지에 데생을 하는 등 3백 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이런 그의 예술적 열정은 말년에 이르기까지 이어진다. 1980년에 들어와 5·18민중항쟁의 소식을 접하고 그에 호응하여 제작한 작품 <통일무> 연작들은 그의 사후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2001년) 되기도 한다.
세계적 명성을 얻은 고암이었지만 그의 파리 생활은 외로웠다. 한국 대사관의 접촉 금지로 한국인은 고암을 찾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무렵(1980년대 초) 한국인 미술 유학생 한 사람이 그를 찾아갔다. “하얀 백발의 노인이었다. 유난히 맑은 눈을 제외하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온통 흰 빛이었다. 노인의 글썽이는 눈빛을 대하자 나는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여긴 무서워서 어째 왔노?” 흰 담요를 잘라 조끼를 만들어 입으신 모습은, 산사에서 객을 맞는 고승 같은 느낌이었다.” 말년에 맞은 마지막 한국인 제자 전병현 화백의 증언이다.



사진제공 윤이상 평화재단, 대전 이응노미술관, 문순옥

윤이상 - 상처받은 용(龍)
1972년 뮌헨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전야제 개막 곡으로
‘현존하는 현대음악의 5대 거장’으로 불리던 윤이상(1917~ 1995)의 오페라 <심청>이 울려 퍼졌다. 그는 1959년 다름슈타트음악제 때 쇤베르크의 12음계 기법에 한국의 정악(正樂) 색채를 담은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동아시아 음악의 요소를 서양 음악에 접목한 그의 작품)을 발표하여 유럽 음악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었다.
윤이상은 동백림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 역시 고암 이응로와 시인 천상병처럼 서대문형무소에서 오페라 곡 <나비의 미망인>을 남겼으며, 완성된 작품은 집행유예로 먼저 풀려난 부인을 통해 독일에 전달되어 초연되었다. 수형 생활 도중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도 <율>과 <영상>을 작곡하기도 했다. 후일 만들어진 <광주여 영원하라.(1981년)> 는 1981년 5월, 쾰른에서 서부독일 라디오방송 교향악단의 연주로 초연되기도 했다.
윤이상은 종종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것은 어디까지나 음악가로서였다…… 따진다면 민족주의자일 뿐인데…….”라며 당시 중앙정보부가 자신을 간첩으로 만들어 버린 것에 불만을 터트리곤 했다. 그의 이력을 보면 1935년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에서 첼로, 작곡, 음악 이론을 공부했고 1941년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한국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4년 일제에 체포되어 두 달 동안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윤이상의 젊은 시절을 보면 그가 단순히 말로만 자신을 민족주의자라고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윤이상은 작품 활동을 하면서 북한에 여러 차례 오고갔다. 당연히 윤이상과 남한의 공식적 교류는 완전히 끊겼다. 반면 북한에서는 윤이상음악연구소와 윤이상관현악단을 만들며 대대적으로 예우했고 1982년부터 평양에서는 매년 윤이상 음악제가 개최되었고 87년에는 북한국립교향악단이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를 초연하기도 했다.
거장의 반열에 오른 윤이상. 차츰 그는 한국인에게 잊혀져 갔다. 그리고 그의 음악에 대한 이해와 평가조차 남한 땅에서는 실종되고 말았다.

글·자료사진 전승보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 칼리지) 대학원 큐레이터학과를 졸업했다. <창원 2007아시아미술제>, <2006아시아미술포럼>, <아시아의 지금 - 에피소드 2004>, <열다섯마을 이야기>전 등을 기획했다. 현재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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